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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경영학(23) - 유비, 공명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 

마지막 고집 부리다 치명적 패배
후계구도 마련엔 최선의 포석 

최우석 前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유비의 오나라 정벌은 어차피 무리였다. 국력을 총동원해 5만여 명의 군사를 모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지휘관과 참모가 부족했다. 경험이 풍부한 관우곂꼴?등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법정이나 방통 같은 뛰어난 참모를 대신할 후계자가 없었다. 촉나라가 변방에 떨어져 있어서 그랬는지 인재 선발 시스템이 잘못됐는지 창업 1세대를 이을 신진기예의 후계세대가 모자랐다. 철두철미 능력주의로 나간 조조보다 인정이 많은 유비는 인재의 세대교체에 신경을 덜 썼는지 모른다. 창업세대가 요직을 꽉 잡고 있으면 아무래도 신진들이 크기 어렵다. 유비는 오나라 정벌에 나서면서도 북쪽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나라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기 때문에 마초·조운·위연 등 백전노장들을 후방에 남겨두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공명이 참전하지 않았다. 공명이 오나라 정벌에 소극적이기도 했지만, 유비가 없는 성도에서 나랏일을 총괄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에게 일이 너무 집중됐다. 제갈공명이 너무 출중한 탓도 있지만, 유비가 적당히 권력을 나눠 일을 배분시키지 못한 데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난세의 통 큰 보스지만 안정기의 뛰어난 경영자 자질에선 조조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유비가 가장 본받으려 했던 한고조 유방은 인재를 골고루 잘 썼다. 세 사람의 뛰어난 인재, 즉 소하(蕭何)·장량(張良)·한신(韓信)을 각기 특장(特長)에 맞춰 잘 부렸다. 소하는 승상으로서 나라 안을 빈틈없이 다스리고 군수등을 책임지고 조달해 유방이 전선에서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했다. 장량은 항상 유방 곁에 있으면서 시의적절한 전략과 전술을 내놓았다. 그 위에 진평(陳平)이라는 파격적 참모가 있어 장량의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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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호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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