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에게 배움은 끝이 없다. 요즘은 예술이나 인문학도 경영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 분야에서 새로운 철학이나 경영의 길을 찾는 것이다. 이번 호부터 ‘열공’ 삼매경에 빠진 CEO 이야기를 연재한다. 첫 회는 기본 소양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피죤의 이주연 부회장이다.
이주연 부회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경영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
|
이주연(45) 피죤 부회장은 3월이 되면 더욱 바빠진다. 종합 생활용품 전문기업인 피죤과 일본 혼다자동차 딜러인 피죤모터스를 이끌고 있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에 지난해 3월부터 이화여대 디자인경영대학원 겸임교수직까지 맡았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측에서는 디자인 마케팅 분야에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이 부회장이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학기에 20여 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세 시간씩 강의했다.
이 부회장은 “가르치면서 배우기도 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즐겁다”고 말한다. 토론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그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스타일이다. 수강생들과 문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한편 자신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되새긴다.
경영 현장에서 맞닥뜨린 문제의 해법이나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담고 있거나 메모해두긴 했지만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대목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곤 한다. 예컨대 소비자와 환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경영 흐름이나 자연친화적 제품을 중시하는 피죤의 사례가 그렇다.
또 대중 명품(Masstige) 마케팅 전략으로 성공한 코치(coach)의 이야기도 강의 주제로 엮어 토론한다. 강의를 매개로 디자이너나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의 20?0대를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걸 자연스레 접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의 심리와 행동 방식을 간접적으로 파악한다.
특히 수강생이 모두 여자라 그가 경영하는 피죤에 안성맞춤이었다. 피죤은 국내 첫 섬유 유연제인 ‘피죤’과 액체 세제 시장 점유율 80%가 넘는 ‘액츠’ 등을 만드는 생활용품 대표 기업이다. 그에게 학교 강의는 낯선 일이 아니다. 그는 1996년 피죤 디자인팀장으로 입사한 후 98년부터 2002년 봄까지 서울여대와 동국대에서 소묘, 페인팅, 미술사 등을 가르쳤다.
창업주인 이윤재 회장의 장녀로 서강대 영문과를 나온 그는 미국 메릴랜드 인스티튜트 칼리지 오브 아트와 퀸즈 칼리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한 화가 출신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낯선 드로잉 분야의 선구자이자 실험정신이 강한 신세대 화가로 촉망받았던 그는 금호미술관 등에서 전시회를 몇 차례 열기도 했다.
여느 CEO와 달리 흔한 CEO 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않는 이 부회장은 배움에는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는 “평소 잘 몰랐던 사실을 알거나 깨닫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남동생인 이정준 씨가 미국에서 교수 생활에 재미를 붙이는 바람에 가업을 잇는 그는 마케팅실장과 관리 총괄 부문장 등을 거치며 경영 수업을 착실히 받았다.
2003년 관리총괄 부문장에 오른 뒤에는 강의도 그만두고 조직관리와 새 제품 개발 등 안살림을 챙겼다. 눈코 뜰새 없이 바빴지만 그러면서도 2007년 5월에 SKK GSB(성균관대-MIT 슬로언 스쿨) MBA 과정을 억척스럽게 마쳤다. 이런 인연으로 다른 회사 CEO와 교류는 뜸하지만 대학교수들은 곧잘 만난다.
MBA 과정 때는 한참 동생뻘인 학생들과도 어울렸지만 이 부회장은 혼자 파고드는 스타일에 가깝다. 그가 책을 많이 읽는 이유다. 독서의 스펙트럼은 넓은 편이다. 경영 서적을 읽긴 하지만 그보다 인문, 역사, 종교, 과학 등의 서적을 탐독한다. 그는 “트렌드를 간과해선 곤란하겠지만 기본 소양이나 근본적인 정체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루해 보이는 책을 많이 읽는다”며 미소 지었다. 경영의 기본을 강조하는 아버지나 자신의 경영 철학과도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이주연 부회장의 공부법 ■ 강의를 매개로 경영 현장의 경험과 지식 재정리 ■ 책이 좋은 스승으로 인문·역사·종교·과학 서적 탐독 ■ CNN·BBC·디스커버리·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 즐겨 봐 |
|
이 부회장은 외국에 출장 가면 서점에 꼭 들른다. 국내에서는 뉴욕타임스의 과학 면 등에서 책 정보를 얻는다. 집 거실을 서재로 꾸민 이 부회장의 독서 방법은 좀 특이하다.
여러 곳에 여러 책을 두고 본다. 예컨대 안방에 종교, 부엌에 요리책을 놓고 보는 식이다. 그는 종교학자인 일레인 페이절스가 지은 , 물리학의 첨단 이론인 초끈 이론을 쉽게 설명한 브라이언 그린의 , 디자인된 일상을 현상학적으로 관찰하고 물건들에 대해 촌평한 빌렘 플루서의 <디자인의 작은 철학>, 궁궐의 의미와 역사에서 조선의 역사를 알아보는 홍순민의 <우리 궁궐 이야기> 등을 기억에 남는 책으로 꼽았다.
유행에 너무 뒤떨어지는 것 같아 TV 쇼 프로나 드라마도 보려고 한다는 그는 역사, 건축, 과학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디스커버리,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의 채널을 즐겨 본다. 아침에는 CNN이나 BBC 채널에서 뉴스 등을 챙긴다. 유학 시절에는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도 자주 들었다. “공부도 재미 있지만 경영은 더욱 흥미롭다”는 그는 현재 회사 전반을 모두 챙기고 있다. 다들 경기침체로 어렵지만 생활용품 전문기업이라 경기를 덜 타는 편이라고 전한다.
단 아직 중견기업이나 앞으로 더욱 성장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한다. 지난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피죤의 매출액은 관계사인 피죤 모터스와 선일의 매출액까지 더하면 2000억 원이 넘었다. 특히 이 부회장이 회사 안팎의 만류에도 적극 밀었던 액체 세제 액츠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뜨겁다.
“늘 하던 대로 기본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해야죠. 3월에 중국 톈진(天津)의 새로운 생산 기지가 완공되면 중국 시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