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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STMENT - 예술가로 변신한 기업가 

 

글 이용성 포브스코리아 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충남 천안의 복합문화공간 ‘아라리오 스몰시티’를 세운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은 고가의 데이미언 허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을 구입해 천안 고속버스터미널에 설치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컬렉터인 그는 미술관을 짓는 게 꿈이다.

▎김창일 회장이 충남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전시장 4층에 전시 중인 2013년 작 ‘자소상(무제)’ 옆에서 촬영에 응했다. 부표·냉장고·택배상자·사다리 등 일상에서 마주한 물건에서 발견한 본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는 “택배상자 테이프에 새겨져 있는 ‘통상주식회사’라는 문구가 사업가이자 아티스트인 본인의 독특한 정체성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아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7월 24일 충남 천안 신부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창일(62) 아라리오 회장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고등학교(휘문고)와 대학(경희대) 동문으로 ‘절친’인 김종학 PD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김 PD는 이번 인터뷰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듣고 놀라 어제 문상을 갔습니다. 오늘도 마음이 편치 않아 나 혼자라도 그 친구 추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회장은 “김 PD에게 열흘 전쯤 전화를 걸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는데 중국에 있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며 오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힘들어서 사람 만나기싫으니까 한국에 있는데도 중국이라고 한 것 같아요. 그 친구 천재인데, 사람이 여러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잖아요. 사람을 너무 믿는데다 주변에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내가 몇 번 조언을 했는데….”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주변 푸른 조각광장에 설치된 김창일 회장의 소장 작품들. (위부터 시곗바늘 방향으로) 코헤이 나와의 ‘매니폴드’, 데이미언 허스트의 ‘채러티’, 키스 해링의 ‘줄리아’.
사업가·수집가·예술가 세 얼굴

김 회장은 ‘세 얼굴의 사나이’다. 우선 충남 천안시 중심가에 6만6115㎡(2만평) 대지에 백화점(신세계 충청점)과 멀티플렉스(야우리시네마), 갤러리(아라리오갤러리), 식당가와 천안고속터미널까지 갖춘 ‘아라리오 스몰시티’를 세운 성공 사업가다.

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영국 미술전문지 ‘아트 리뷰’ 선정 세계 1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린 미술품 수집가다. 1999년부터는 씨킴(CIKim)이란 이름으로 돌연 ‘작가 겸업’을 선언했다. 오는 9월 22일까지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Sailing’이란 제목의 일곱 번째 개인전을 연다.

그는 “갤러리 오너이자 컬렉터가 작품활동까지 한다는 시선이 곱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좋은 작품을 많이 보니 알게 모르게 다른 작품을 모방하게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위축돼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죠.”

김 회장은 ‘모든 것이 예술의 영역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당함과 평화를 되찾았다. “언젠가 도로 위에 보수공사를 위해 표시해 놓은 듯한 ‘0461’이란 숫자를 봤어요. 거꾸로 읽으면 1940인데 ‘4’자만 거꾸로 돼있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것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예술가로서의 길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작업실이 있는 제주도 바닷가를 산책하다 주운 폐품을 모아 사람을 만들었다. 그림에 토마토를 던져 새로운 질감을 구현하기도 한다. 또 2005년 일상의 풍경을 주제로 한 사진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면 나름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고통·공포·가난·재난과 같은 암울한 주제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AIDS is going to Lose(에이즈는 극복될 것이다)’라는 글귀를 들고 있는 소녀, 병든 소년을 그린 뒤 실제 링거와 주사바늘을 캔버스에 연결시킨 작품 등이 이 같은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김 회장은 1·4 후퇴 직후인 1951년 2월, 부산에 피난온 이북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어머니가 빚 대신 떠안은 천안 대흥동 터미널을 발판으로 사업을 일으켰다. “매달 터미널에서 300만원 손해를 봤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에게 터미널 운영 수익으로 매달 300만원을 부치기로 약속한 터라 매월 총 600만원의 적자를 떠안아야 했죠.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적자 덩어리’ 터미널로 큰 성공

결국 수익을 올릴 곳은 매점 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천안고속터미널 내 임대매점을 모두 직영으로 돌렸다. “알루미늄으로 매점을 새롭게 꾸미는데 50만원이 들었습니다.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죠. 고민 끝에 코카콜라와 퍼모스트(‘빙그레’의 전신) 등 매점에서 취급하는 식음료 제품 회사 로고를 매점입구에 걸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임대매점을 직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몇몇 임대업자가 흉기를 들이대고 협박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매점 하나 바꿨을 뿐’이지만 1년 만에 골칫덩어리 천안고속터미널은 억대 연매출을 올리는 사업체로 탈바꿈했다.

“더러운 게 있으면 파리가 꼬이고, 꽃이 있으면 벌이 온다”는 신념으로 김 회장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터미널을 쾌적한 공간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했다. 1989년 6월 현재 위치인 신부동으로 천안고속터미널을 이전한 후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250억원을 들여 터미널·백화점·갤러리가 한 블록에 위치한 ‘아라리오 스몰시티’를 세웠다.

아라리오 스몰시티는 서울 반포동 센트럴시티와 비슷한 테마로 구성했지만 규모는 작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더 유명하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조각 ‘찬가(Hymm)’와 ‘채러티(Charity)’,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해링의 ‘줄리아(Julia)’ 등 옥외 광장 곳곳에 자리 잡은 고가의 대형 예술작품 때문이다.

독일의 저명한 예술잡지 ‘Art’는 최근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지만, 천안이야말로 예술적으로 가장 핫(hot)한 도시’라고 평했다. ‘전 세계 미술지도에 반드시 표기돼야 할 곳’이란 극찬과 함께 아라리오 스몰시티를 한국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꼽았다.

국내외 유명 작가 26명의 작품이 설치된 이곳은 김 회장이 지난 25년간 모은 미술품의 정수를 보여준다. 인체 장기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허스트의 ‘찬가’는 지난해 런던 올림픽 당시 템즈강변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앞에 설치됐던 조각이다. 모금함을 든 소녀를 표현한 ‘채러티’도 허스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두 작품 모두 1000만 달러를 호가한다. 그는 “많은 행인이 오가는 광장에 전시하다 보니 복제품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김 회장이 모은 작품에 눈독 들이는 수집가가 많다. 그는 아라리오 스몰시티 광장에 전시된 작품들을 개인이 아닌 천안시민의 것이라고 여긴다.

김 회장은 미국 뉴욕에서 발행하는 ‘아트뉴스(ARTnews)’, 영국의 미술잡지 ’아트리뷰ArtReview)‘, 독일의 라이프스타일잡지‘모노폴(Monopol)’ 등이 해마다 선정하는 ‘파워 컬렉터’ 명단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자주 이름을 올린다. 그가 수집한 작품은 총 7000여 점. 그중에는 독일의 포스트 모더니즘 화가 시그마 폴케, 독일 화가 네오 라흐, 키스 해링을 비롯,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미국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 등 기라성같은 작가의 작품이 있다.

“폴케와 라흐, 영국의 설치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등의 작품을 갖고 싶었던 사치(세계적 미술품 수집가이자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의 설립자인 찰스 사치)가 백지수표를 건넸다”며 김 회장은 “백지수표에 액수를 기입하는데도 예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10년 전 에민의 작품은 200만 달러, 폴케는 600만 달러를 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컬렉터로서의 첫 출발은 순조롭지 않았다. 천안고속터미널 사업이 안정 단계에 접어들면서 미술품에 눈을 돌린 김 회장은 1980년 서울 인사동 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 7점을 구입했지만 모두 가짜로 판명돼 낭패를 봤다. “그 사건이 보약이 됐습니다. 그 후로는 믿을만한 갤러리가 아니면 찾지 않습니다.”

사업가 덕목은 긍정적 마인드

예술작품 투자 초보자를 위한 조언을 구했다. “자식이나 다음 세대에 좋은 작품 감상하라고 물려주는 것입니다. 자기 대에서 금처럼 사고 팔려고 예술작품에 큰 돈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럴거면 차라리 건물이나 땅을 사는 게 낫죠.”

김 회장은 “유명 작가를 따라 가는 것이 최악의 투자 방법”이라고 했다. “내가 세계적인 수집가 명단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영국 미술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2000년대 초 영국 작품들을 수집한 덕분입니다. 이후 독일 작품 등으로 이어지면서 유행에 앞서 수집했어요. 같은 작가 작품 중에서도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안목을 길러야 해요. 때로는 실력 있는 전문가의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구매해야죠.” 실제로 2000년대 초 그가 30만 달러에 구입한 라흐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 수작으로 꼽힌다. 작품 한 점에 200만 달러 이상을 호가한다.

한 달의 절반을 제주도 하도리 작업실에 머문다는 그의 다음 목표는 그동안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할 미술관을 직접 설계해 제주도에 짓는 것. “사업가·예술가, 그리고 컬렉터로서 성공과 실패를 통해 배운 모든 것을 미술관에 쏟아 붓고 싶어요. 전시 작품이 90% 확보됐으니 시작하면 금방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세계 유명 미술관을 통해 안목을 기르고 영감과 힘을 얻었듯이 새로운 미술관도 많은 사람에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회장은 미술품 구매나 사업 등 중요한 결정에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본인의 ‘감’에 주로 의존한다. “사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그냥 흘려보내는 법이 없어요. 어떤 결론에 이를 때까지 철저히 곱씹습니다. 감에 의존한다고 그냥 기분대로 한다는 건 아니니까요.”

김 회장은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는 ‘긍정적 마인드’를 꼽았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비판적 사고가 좋은 작품의 원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사업가는 긍정적 마인드를 가져야 해요. 부정적 사고는 본인은 물론 주변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문제에 직면하면 해결책을 찾기보다 남을 탓합니다. 그런 사람에겐 사업이 맞지 않습니다.”

201309호 (20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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