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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 - 증권업계 순이익 1위 올해도 지킨다 

 

사진 전민규 기자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가 연임에 성공하며 올해로 9년째 한국투자증권을 이끌게 됐다. ‘최연소·최장수 CEO’라는 기록을 세운 그의 꿈은 출근할 때 설레고 퇴근할 때 마음이 가벼운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는 든든한 계열사를 만든다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해외에 진출해 2020년까지 한국투자증권을 아시아 대표 투자은행으로 키울 계획이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우상으로 여기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꿈은 판사도 의사도 아니었다. 김우중 회장처럼 한 기업의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어림잡아도 30년이 나왔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30년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하나 하나 이뤄나갔다. 마침내 증권사에 입사한 지 18년 3개월 뒤 꿈을 이뤘다. 소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유상호(55) 한국투자증권 대표다.

유 대표는 지난 3월 26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재선임 안이 통과되면서 9년째 한국투자증권을 이끌게 됐다. 연임에 성공하며 ‘증권사 최장수 CEO’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런 그의 임기는 1년이다. 한국투자증권은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최고경영자와 이사 등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임기가 짧다 보니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한다는 부담감이 무척 클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8년 넘게 증권사를 경영해 온 유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했다. “임기가 아무리 길어도 문제가 생기면 취임 반년 만에도 해임됩니다. 그래서 저는 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년 안에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습니다. 그저 이 회사의 미래를 위한 초석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매년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 대표는 자신이 증권사 대표 중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임기와 상관없이 스스로 대표로서 적합하지 않다거나 열정이 식었다는 판단이 들때는 언제든 그만둘 각오로 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88년 ‘증권맨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27년을 넘게 일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열정이 넘친다. 인터뷰가 있었던 지난 4월 17일에도 바쁜 일정과 업무를 소화해내느라 세 시간 남짓 잠을 잤다는 유 대표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쳤다.

런던법인 주재원 시절 인생의 황금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재학시절, 유 대표는 결코 튀는 학생이 아니었다. 1~2학년 때는 5대 경영대 연합 학술동아리인 ‘향영’활동에 전념했다. 이 향영에서 평생의 동반자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1980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일찌감치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공부에 전념했다. “공부가 재미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졸업 전부터 경영전문대학원(MBA)을 준비했습니다.”

MBA에 입학하는 데 직장 경험이 있는 게 유리해 졸업 후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1년 반을 근무한 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MBA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988년 MBA 졸업 후 박사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정작 입학 허가가 떨어지자 고민이 시작됐다. “주변에서는 무조건 박사과정을 밟으라고 했지만, 저는 간판을 얻기 위해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살면서 처음 마주한 일생일대의 선택의 순간이었다. 5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을 정도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며칠 밤낮을 ‘유상호가 어떤 인간 인지’에 대해 자문해본 결과 공부보다는 현장이 더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 길로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다.

유 대표는 당시 국내 대표 대형사였던 대우증권에서 ‘증권맨’ 생활을 시작했다. 국제본부 국제기획파트에서 해외 진출과 관련된 업무를 맡아 해오던 중 자본시장 개방에 맞춰 영국 런던법인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가 1992년이었다. 유 대표는 런던법인에서 일했던 때를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표현했다. 그가 런던법인에서 한 일은 그 지역의 기관투자자들을 상대로 한 한국주식 세일즈였다. “기업마다 외국인 매수할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습니다. 증권사마다 한도 내에서 더 많은 주식을 매수하려고 매일 전쟁을 벌입니다.” 이때 한국주식 거래량의 5%를 매매해 세운 유 대표의 기록은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1년에 한 번, 많으면 두 번꼴이죠.”

일 년에 한 번 일어남직한 일을 해낸 터라 유 대표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날은 런던과 한국의 시차 때문에 낮에 주문을 내놓고 밤이 되면 주식 단말기를 통해 한국 주식시장이 개장한 이후 체결상황을 확인하느라 퇴근을 못했다고 했다. 주식단말기를 보며 체결이 늦으면 한국 본사에 전화해 체결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렇게 밤을 새워도 주식 체결 현황이 좋아 피곤한지 몰랐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투자자들에게 체결상황을 보고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느지막이 점심을 먹기 위해 회사 근처 한식집을 찾으면 매매가 많지 않았던 경쟁사 브로커들은 이미 와서 밥을 먹고 있단다. “매매가 잘된 날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소주 5병을 달라고 외칩니다. 엄청 큰 목소리로요. 그럼 부러워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날은 낮부터 동료하고 폭탄주를 엄청 마셨습니다. 힘들었지만 참 재미있게 일했던 시절입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유 대표의 입가에 연신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업무 성과가 좋다보니 당시 주재원 중 가장 긴 7년을 그곳에 머물렀다. 직위도 부사장까지 올랐다. 1999년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돼 날벼락처럼 대우그룹이 부도가 났다. 유 대표는 그때를 직장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로 기억하고 있었다. 대우그룹의 부도로 메리츠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유 대표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2년 연초, 유 대표는 지인의 주선으로 김남구 현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을 만나게 된다. 스스럼없이 만난 자리라 자연스럽게 증권업계의 미래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게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끝에 김 부회장이 유 대표에게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제안을 받은 후 그가 한국투자증권으로 옮기기까지는 10개월이 걸렸다. 그는 그렇게 길게 고민한 이유에 대해 “메리츠증권에서 함께 일한 분들을 설득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옮기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저를 믿어준 그 분들하고의 의리가 있으니 참고 기다리며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0개월 기다려준 김 부회장님에게도 감사했습니다.” 2002년 부사장으로 한국투자증권에 온 유 대표는 그로부터 5년 후인 2007년 3월 대표에 취임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증권사 최연소 CEO였다. 이때 세운 ‘최연소 CEO’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유 대표가 취임 후 가장 집중했던 것은 수익구조의 다변화였다. 브로커리지(위탁매매)에 의존하던 수익구조를 ‘투자은행(IB)와 자산관리(AM)’로 개편한 것. 그의 경영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한국투자증권은 수익구조 다변화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업계 최고 실적을 거뒀다. 특히 지난해 상반기에는 순이익 1029억원을 기록하며 업계에서 유일하게 1000억원을 넘어섰다. 증권업황 악화로 대부분의 증권사들의 수익성이 악화된 가운데 거둔 성적이라 더 의미가 크다. 유 대표는 한국투자증권이 불황에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증권사의 주요 수익원이 되는 주요 사업이 5~6개정도 되는데, 저희는 이 사업이 1등 아니면 2~3위의 골고루 좋은 성적을 낸 덕분”이라고 했다.

실제로 한국거래소가 선정한 2014년 기업공개(IPO)주관업무 우수증권회사에 한국투자증권은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KB투자증권과 함께 선정됐다. 특히 한국투자증권은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을 합해 상장기업의 주가, 순이익, 시가총액, 예비심사승인율 등 종합평가에 의한 우수 증권회사에 5년 연속 선정되는 쾌거를 올렸다. 지난해 한국투자증권은 대표 주관건수 12건, 주관실적 4978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ROE 두 자릿수 만들겠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가운데)이 2014년 12월2일 열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해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유 대표의 해외진출 전략 역시 최근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단기적인 성과만을 바라보고 해외진출을 하는 게 아니라 해외에 든든한 계열사를 만든다는 장기적인 전략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유 대표는 설명했다. 2010년 한국투자증권이 인수한 ‘키스 베트남(KIS Vietnam)’이 인수 2년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업계 순위가 인수 당시 50위에서 19위로 인수 4년 만에 30계단이나 상승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현지사무소까지 열었다. 영국 런던(1994년), 홍콩 현지법인(1997년), 미국 뉴욕(2001년), 싱가포르(2008년), 베트남(2010년), 중국 베이징(2010년) 등에 이은 7번째 해외 거점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이번 인도네시아 현지사무소 설립으로 인도네시아 시장에 대한 확신이 들면 법인 설립이나 증권사 인수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유 대표가 이렇게 해외진출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2020년 아시아 대표 투자은행(IB)’으로 거듭나겠다는 한국투자증권의 장기 목표를 이루기위해서란다.

올해는 한국투자증권에게 남다른 의미가 될 전망이다. 올 6월 1일로 동원증권과 한투증권이 통합해 한국투자증권이 탄생한지 꼭 10년이 된다. 유 대표도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서 이 부문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통합 후 10년간 많은 발전을 이뤄냈고 증권업계 선두자리에 올랐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여기에는 지금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자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걸 이뤄 내려고 한다. 유 대표에게는 올해 두 개의 목표가 있다. 일단 지난 4년간 지켜온 증권업계 순이익 1위 자리를 올해도 이어갈 계획이다. 또한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두 자릿수로 올려놓을 계획이다. ROE는 기업이 자기자본을 활용해 1년간 얼마를 벌었는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로, ROE가 높다는 건 자기자본에 비해 당기순이익을 많이 내 효율적인 영업활동을 했다는 걸 뜻한다. 따라서 ROE를 올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ROE 두 자릿수는 개인적인 욕심”이라며 웃어 보이는 유 대표는 그렇다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직원들을 무조건 채찍질할 생각은 없단다. “정말 좋은 회사는 출근할 때 설레고 퇴근할 때 마음이 가벼운 회사입니다. 저는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행복한 분위기에서 굳이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좋은 성과가 나오기 마련이라는 게 유 대표의 생각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도 그랬다. 그는 증권업황의 악화로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직원 수를 줄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 때도 단한번의 구조조정도 하지 않았다. “최고의 인재와 함께하면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거기에 맞는 최고의 대우도 해줄 수 있습니다.”

- 글 정혜선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

201505호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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