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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호 배상면주가 대표 - “술은 감성을 나누는 미디어” 

 

오승일 포브스 차장 사진 김현동 기자
전통술 대중화의 선구자 배영호 대표. 그의 꿈은 ‘느린마을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배상면주가를 아시아 최고의 술문화 기업으로 일구는 것이다.

▎전통술 전도사 배영호 대표는 술문화 경영을 통해 일제 강점기 이후 명맥이 끊긴 우리 술의 발전과 전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흔히 ‘전통술’ 하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술이란 개념이 일반적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양조장에 주전자를 들고 가 막걸리를 받아오던 장면이나 몇몇 장인들이 정성들여 만든 술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통술이 ‘전통’만 의미하는 것이 아닌 대중들의 ‘문화’와 ‘삶’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 이후 명맥이 끊긴 우리 전통술의 진화와 보급에 매진해온 배상면주가의 배영호 대표다.

배 대표는 2013년 타계한 故 배상면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배상면 선생은 일생을 누룩 연구와 전통주 개발에 몰두하며 우리나라 주조사(酒造史)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전통주의 대가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은 배 대표는 1985년부터 국순당의 전신인 배한산업에서 술 빚는 법을 배웠다. 친형인 배중호 대표와 함께 국순당을 창업해 당시 고사 상태에 빠져 있던 우리 전통술 시장에 숨결을 불어넣은 ‘백세주 신화’를 일구어 냈다.

배 대표가 배상면주가로 홀로서기를 한 것은 1996년. 당시 승승장구하던 회사를 나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하나였다. ‘백세주’라는 한 가지 술에만 집중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배 대표는 “아버지가 전통술을 빚지 않았다면 이 사업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저 전통이라는 가치에만 매몰되어 있던 전통주를 현재 사람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한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배 대표는 그때부터 전통술이 ‘술 장사’가 아닌 ‘문화 장사’라는 생각으로 30년 가까이 고집스럽게 한 길을 걸어왔다.

배상면주가를 알린 ‘산사춘’의 공로

‘배상면주가’에는 아버지 이름 석 자에 부끄럽지 않은 좋은 술을 빚겠다는 배 대표의 의지가 담겨 있다. 당시 배 대표는 부친에게 “비석보다 더 오래가는 기념비를 만들어드릴 테니 존함을 빌려달라”고 제안했고 오랜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최초의 주류회사는 그렇게 탄생하게 됐다.

“주변에선 이웃어른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법인데 감히 아버지 함자를 기업명으로 쓴다며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 이름을 걸면 최소한 엉뚱한 짓은 안 할 것 같았다. 비석은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회사를 잘 키워서 오래 유지한다면 명예로운 일이 아니겠냐고 설득했다. 재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감회가 새롭다.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전통주 명가의 명성을 잇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 대표는 “모든 사업이 그렇듯 초기에는 고생이 말도 못했다”며 “한마디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국순당에 그냥 남아 있었다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집안의 도움 없이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지금의 성공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폭탄주에 지쳐 있던 대중들의 욕구를 제대로 읽어낸 ‘산사춘’의 공로가 컸다. 배상면주가만의 차별화된 ‘생쌀발효법’으로 만든 산사춘은 단백질이 분해된 아미노산이 많기 때문에 다른 술에 비해 영양 면에서 우수하고 아세트알데히드의 생성량이 적어 음주 후 숙취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상면주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산사춘일 정도로 1997년 출시 첫해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전통주 애호가뿐만 아니라 소주와 맥주만 마시던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산사춘은 2005년 1억 병 판매를 기록하며 백세주가 쌓아올린 신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형제기업인 국순당과 함께 시장을 이끌어가는 업계 리더로 발돋움하는 데 기폭제가 됐다. 배 대표는 “산사춘은 오늘날의 배상면주가를 있게 해준 고마운 술”이라며 “동시에 우리 술, 우리 약주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의미 있는 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배 대표는 술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좋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술은 감성을 나누는 미디어”라며 “전통술을 빚는 것은 인간 감성을 되살리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감성을 전파하기 위해 배상면주가 설립과 동시에 전통술 연구소를 세웠다. 또 업계에서는 드물게 오래 전부터 문화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에 자리한 ‘산사원’은 배 대표의 이런 철학이 가장 잘 반영된 곳이다. ‘산사나무의 정원’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은 4000평(1만3223㎡) 대지에 배상면주가 포천 공장과 함께 설립된 술 박물관으로 농림부가 그 가치를 인정해 지난해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지정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술은 모두 집에서 만들었다. 그 술을 누가 만들고, 누가 마시는지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는 동안 ‘술은 공장에서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산사원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호흡하던 전통 문화를 복원하고 싶었다.”

박물관에서는 전통주의 역사와 제조 과정에 대해 배울 수 있고 미리 신청만 하면 전문가의 지도로 전통주 빚기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또 배 대표가 사업 초기부터 수집해온 술 빚는 도구와 기계도 만날 수 있다. 수집품은 술잔, 술병 같은 부엌세간부터 세미기, 냉각기, 주주기 등을 갖춘 양조기계까지 수백 점이 넘는다.

시중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배상면주가의 다양한 술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보고 시음해 볼 수 있는 점도 이곳의 매력이다. 배와 고구마 등으로 빚은 증류주 ‘아락’과 토기를 망치로 깨야만 마실 수 있는 고급 증류주 ‘오매락 퍽’을 비롯해 산사원 설립 당시 회랑에 묻어두었다가 최근 우연히 발견된 9년산 산사춘 등 역사와 전통을 지닌 술도가의 노력의 산실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산사원의 백미는 무엇보다 산사정원과 그 안에 세워진 ‘세월랑’이다. 600여 개의 항아리가 늘어선 회랑과 정원, 전통 한옥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은 시기만 잘 맞춰 가면 술 익는 냄새가 담벼락 너머까지 넘실댄다. 정원에는 산사춘의 원료가 되는 200년 된 산사나무 열두 그루가 심어져 있다. 배 대표는 “감성을 담은 특별한 시간을 세월이라고 한다. 숙성주는 이 세월을 품고 있다”며 “한국에서 숙성주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지었으며 600개 항아리에서 맛있게 술이 익고 있다”고 설명했다.

느린마을양조장&펍은 도심형 미니 양조장


▎1. 느린마을양조장&펍은 양조장에서 직접 빚은 다양한 맛의 프리미엄 막걸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 2.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산사원에는 ‘술은 감성을 나누는 미디어’라는 배영호 대표의 철학이 녹아 있다.
배 대표가 최근 전개 중인 느린마을양조장&펍은 산사원을 도시 안으로 옮겨 놓은 도심형 미니 양조장이다. 양조장 대부분이 도시 외곽에서 술을 만들어 주점에 공급하는 방식이라면 느린마을양조장&펍은 각 양조장에서 직접 술을 빚어 판매한다.

“산사원이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반대로 양조장이 도시 속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술을 만드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이, 파는 이와 사는 이가 얼굴을 익혀가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곳이 전통의 가양주 문화이자 양조장의 모습이었다.”

술은 각 지점에서 고객들이 찾는 만큼 빚어내고 판매하기 때문에 오래된 것이 없어 신선하고 건강하다. 먼 곳까지 배달하기 위해 인공적인 첨가물을 타지 않아서 맛도 좋다. 금세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면서 양재동 본점을 비롯해 강남점, 청계천점까지 확장했으며, 얼마 전 누적 방문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느리다’는 단어는 자칫 경쟁시대에 뒤처진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배 대표는 “무조건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퇴행할 수 있지만 지금의 기술과 옛 방식을 잘 결합하면 더 좋은 술 맛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 그동안 살아온 시간이 다 보인다고 한다. 느린마을 프로젝트는 느리게 가자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소중히 하자는 취지다. 알코올 도수나 가격으로 변화를 주는 대신 새로운 감성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배 대표의 비전은 국내에 머물지 않는다. 올해로 창립 18주년을 맞은 배상면주가는 현재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 20여 개국에 전통술을 수출하고 있다. 배 대표는 “우리 목표는 서울에 100개, 전 세계에 1000개의 배상면주가 양조장을 세우는 것이다”라며 “술이 아닌 문화와 감성을 파는 경영철학으로 아시아 최고의 술문화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전 세계에 600개의 양조장을 보유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정말 소중하고 놀라운 자산이다. 독특한 지역색을 가진 우리 것, 우리 문화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유럽은 400년, 일본은 350년 동안 해온 일을 우린 이제 30년 남짓 했을 뿐이다. 힘든 일이지만 남과 다른 창의적인 생각이 뒷받침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글 오승일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김현동 기자

201505호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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