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은 전 산업의 ‘소금’으로 불린다. ‘눈에 띄지 않지만 꼭 필요한 원료’이기 때문이다. 건축, 자동차, 신재생 에너지 재료는 물론 식품첨가물, 이제는 3D기술로 껌까지 만든다. ‘고부가가치’ 제품의 표본이 된 이곳은 105년 된 화학 소재 기업 바커케미칼이다.
▎분무 건조 타입으로 천연성분에 가까운 (Nature-Identical) 하이드록시타이로솔. 식품과 화장품에 적용된다. / 사진:바커케미칼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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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 립스틱, 보습크림, 제과/제빵, 자동차, 건축, 의료용 밴드, 카펫, 의류, 제지, 필름…. ’생활용품부터 식품, 제약, 반도체를 아우르는 이 제품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원료는 무엇일까. 바로 실리콘이다. 모발을 강화하고, 보호막을 형성하며, 입술을 빛나게 해주며, 섬유에는 탄성을 주는 부드러운 실크 감촉을 가진 원료다. 실리콘의 윤활(미끌미끌하게 해주는) 특징 때문이다.화학업계에선 ‘소금’ 같은 존재로 불리는 실리콘은 디지털화에 접어든 산업 트렌드 덕분에 오히려 호황기를 맞았다. 이전보다 강력한 안전성, 단열, 내구성을 요구하는 건축 자재부터 자동차 부품에 이르기까지 활용 범위도 다양하다. 자동차 후드에도 사용된다. 뜨거운 엔진 근처의 부품에는 기존 유기 고무보다 실리콘 고무가 더 많이 사용된다. 첨단자율 주행 보조 시스템에 필요한 수많은 센서와 컨트롤러를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실리콘이다.업계에서 선두주자는 바커케미칼(이하 바커)이다. 올해 창립 105주년을 맞았다. 뮌헨에 본사를 둔 바커는 실리콘, 폴리머, 폴리실리콘, 바이오솔루션 등 글로벌 장악력을 자랑한다. 각 부문에서 1, 2위를 다툰다. 약 1만4000명 직원이 일하는 바커의 2018년 매출액은 49억8000만 유로(한화 6조3500억원)에 이른다.“실리콘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제조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물성을 가져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기 소재(아크릴)에 비해 내열성, 이형성, 내화학성 등의 특징을 가져 다양한 소재에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2월 7일 판교 사무실에서 만난 조달호 바커케미칼코리아 대표는 실리콘 시장이 더 확대될 것이라 전망했다. “바커는 그동안 60년 넘게 자동차 산업용 실리콘을 개발해왔습니다. 각종 전자부품이 자동차 제어에 사용돼 왔고 첨단 실리콘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해졌어요.” 시장의 수요에 충분히 준비됐다고 자신하는 조 대표는 바커의 성장엔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조 대표는 바커의 경쟁력을 ‘변화에 유연한 포트폴리오’로 꼽았다. 바커는 1903년 ‘전자화학 컨소시엄 유한회사’로 시작해 1914년 바커그룹을 설립했다. 그동안 다양한 응용 분야에 맞는 제품을 주도적으로 혁신, 개발해왔다. 하나만 고집하지 않았다. 50년간 생산해온 아세톤도 과감히 버렸다. 매출의 60%를 차지하며 바커를 일으켜 세운 효자 종목이기도 했다. 1916년 아세트산 자체 합성 생산기술 ‘바커 프로세스’를 개발해 세상에 알렸지만 경쟁력이 떨어지기 전 재빨리 생산을 중단해 1947년 실리콘 사업에 뛰어들었다. 점점 사업 제품군을 다각화했다. 실리콘뿐 아니라 폴리머, 폴리실리콘 등으로 저변을 넓혔다. 산업 트렌드가 변할수록 바커 제품도 빠르게 진화했다. 처음부터 호응을 얻었던 건 아니다. 사용하기 전까지 제품력 증명엔 시간이 걸렸다. 조 대표는 “바커가 만든 건축용 폴리머 파우더는 시장에서 인정받기까지 10년이 걸렸지만 현재는 글로벌 시장 1위다”며 “60년간 전통을 이어가며 지금까지 300만 메트릭톤(metric ton)을 생산, 판매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바커의 포트폴리오는 모두 장기적인 플랜으로, 혁신적인 기술개발이 뒷받침됐다”고 덧붙였다.
변화에 유연한 기업
▎조달호 바커케미칼코리아 대표. 벽에는 직원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장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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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형 자동차에 대비한 전장용 실리콘은 바커의 혁신 제품 중 하나다. 자율주행차에는 잠김 방지 브레이크 시스템(ABS)이나 차선 이탈 방지 시스템 같은 정교한 부품들이 쓰이는데, 실리콘은 먼지나 배기가스, 수분으로부터 부품을 보호하고, 제조 공정도 향상할 수 있다.1980년대부터 바커는 생명공학 분야인 바이오솔루션에도 손을 뻗쳐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렸다. 지난해 싱코바이오사의 네덜란드 생산기지를 인수했다. 바이오 의약품과 생미생물 제품, 백신 생산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제약산업의 생산 역량은 두 배로 증가했다. 2014년엔 독일 할레 소재 바이오테크를, 2016년엔 스페인의 레온 소재 발효시설을 인수했다.식품첨가물에도 바커의 기술이 들어간다. 달걀 대신 수용성 섬유소만으로 제과/제빵 제품이나 마요네즈, 드레싱을 만들 수도 있다. 지방이나 단백질이 포함되지 않은 크림 제품도 제조한다. 옥수수나 감자 등의 전분이 효소로 분해될 때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분해산물(사이클로덱스트린)은 쓴맛과 좋지 않은 냄새를 제거해주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칼로리가 낮고 콜레스테롤도 없다. 이 성분의 제조기술 역사만 30년이 넘는다. 가공식품이나 식품착향료 등에 들어가는 성분(시스테인)도 세계 최초로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 공정으로 바꿨다. 할랄과 코셔 인증까지 받았다. 친환경적이고 엄격한 채식주의 제품이라는 뜻이다.최근엔 신기술도 선보였다. 쫀득한 소프트 캔디가 입안에서 씹는 순간 껌으로 변하는 기술이다. 또 세계 최초로 3D 프린팅을 적용해 다양한 주문 제작 형태로 껌을 성형하는 기술도 선보였다. 이름이나 로고, 실물 모양의 미니어처 등 고객 맞춤형 껌을 생산할 수 있다. 다양한 제품 생산방식은 바커의 안정적인 성장에 기여할 수 있었다.
한국은 아시아 시장 교두보
▎비나파스(VINNAPAS®) EP706 의 유리전이온도 측정 테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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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커의 기술혁신은 아시아 시장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전체 그룹 매출 중 약 40%가 아시아에서 나온다. 신흥국들의 현대화 덕분이다.한국에서는 더 잘나간다. 5년간 매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 했다. 2016년엔 한국에 진출한 법인 기업들 중 연간 최고 매출액을 경신하기도 했다. 한국 법인을 설립한 1996년 이후 바커코리아는 처음으로 매출액 5000억원을 돌파했다. 전년 대비 성장률은 12.24%였다. 정확한 수치가 나오진 않았지만 올해도 두 자릿수 성장을 전망한다.바커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한국을 택했다. 동남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인 셈이다. 2017년 울산에 폴리머 VAE 디스퍼전 및 건축용 폴리머 파우더 공장을 착공했다. 6000만 유로 상당의 통 큰 투자였다. 판교테크노밸리에 있는 전자재료용 실리콘 기술 연구소인 CoEE(Center of Excellence Electronics)는 ‘글로컬’ 시장을 겨냥했다. 김영진 바커코리아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자동차·전기전자·화학·반도체 산업 등이 발달해 다양한 적용과 테스트가 가능하고 고객사 피드백이 빠르다”며 “디스플레이 수요가 증가하면서 미래형 핵심 실리콘 제품을 개발 중이다. 우리 연구소에서 실리콘 UV 경화방식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상업화에 성공했다”고 말했다.기능성 실리콘 사업부에선 스킨, 색조, 헤어케어 등 동양인에 맞는 화장품, 모발 실리콘 제품 등을 개발한다. 주요 국내 브랜드 제품에 들어가며 매출 신장에도 기여했다.
‘바커 가문식’ 지속가능성
▎베이커리에 쓰이는 시스테인(L-Cyst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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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독일기업은 ‘지속가능성’을 강조한다. 바커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돈을 더 오래 벌겠다’는 취지가 아니다. 바커의 친환경 생산시스템(Closed-loop integrated production process)은 화학공정에서 나온 폐열과 부산물을 에너지나 원자재로 변형해 재사용한다. 생산성 개선 프로그램인 WOS(WACKER Operating System)에도 생산설비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과 에너지 절감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에 세운 공장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한다. 업계에선 ‘바커 가문식’ 기업문화로 설명한다.실제 바커그룹은 바커 가문이 50% 지분을 소유한 가족회사다. 그룹사는 감독이사회와 경영이사회로 나뉘어 있다. 두 이사회는 감시·견제하는 역할을 맡는 점은 같지만 성격이 좀 다르다. 감독이사회는 장기 전략이나 다른 기업 인수합병 등 주요 의사결정의 일부에만 관여해 경영이사회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준다. 경영이사회는 경영진 임명과 해임 등 경영진 감독과 견제 역할을 수행한다. 창업주의 증손자인 피터 알렉산더 바커 박사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는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셈이다. 회장단 4명으로 구성된 경영이사회는 모든 현장 실무에 관여한다. 바커그룹의 주요 사업부와 지역별 경영은 경영이사회 관할이라고 보면 된다. 경영 활동이 다소 미시적일 수 있지만, 업계에선 현장 경영을 중시하는 바커그룹만의 문화로 알려져 있다.
끈끈한 동료애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실리콘 전자재료 연구소 (CoEE). / 사진:지미연 객원 기자, 바커케미칼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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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승계한 바커는 임직원 모두를 ‘가족’으로 끌어안는 모습도 보여준다. 조 대표는 “바커그룹은 ‘가족은 어려울 때 함께한다’는 끈끈한 동료 문화가 강하다”며 “특히 노사문제에서 정리해고는 거의 없고 함께 가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서 임직원들의 장기근속과 충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조달호 바커케미칼코리아 대표는 “바커는 당장이 아닌 미래 인류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기업”이라며 “바커그룹은 혼자만의 성과가 아닌 장기적인 업적을 공유하면서 함께 가는 ‘동반 성장’을 중요시 여긴다. 나조차도 바커에 와서 업계·임직원과 함께 성장하는 ‘동료문화’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