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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금융’ 실현해 줄 장애인전용신탁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
최근 공공후견에 이어 공공신탁 개념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이 저소득층 노인가구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고 필요할 때 찾아 쓸 수 있게 해 생활·금융 지원의 공백을 메우자는 취지다. 특히 일본의 ‘특정증여신탁’은 부모가 위탁자로 계약할 수 있고, 지적장애인의 가입도 문제없다.

그날따라 전화벨 소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경기도의 한 영업점에서 걸려온 신탁 상담 전화였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10년간 신탁 상담이 크게 늘었지만, 언제나 자산 규모가 큰 순으로 상담하게 된다는 걸. 자산 규모가 작더라도 신탁이 더 절실한 이가 훨씬 많다. 그래서 최근엔 상담 우선순위를 정할 때 자산 규모보다 신탁이 꼭 필요한지를 더 따져보게 된다. 이날 상담을 의뢰한 분은 발달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였다.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

상담을 요청한 이는 50대 여성 김소영(가명)씨였다. 지난해 남편과 사별했다.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둘째 아들은 발달장애가 있었다. 사별한 남편이 남긴 재산으로 사망보험금과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지만, 생계를 위해 자신은 매일 일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결혼 전 구입해둔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임대료가 있어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김씨의 고민은 발달장애인인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성년이 된 첫째 아들은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했지만, 둘째 아들은 그럴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김씨는 시댁 식구와 남편의 사망보험금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남편이 남긴 사망보험금 1억원의 분할 문제로 시부모와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김씨는 그 보험금의 일부라도 둘째 아들이 생활하는 데 큰 힘이 되길 바랐다. ‘장애인전용신탁’을 알게 된 김씨는 곧바로 센터를 직접 찾았다. 사망보험금과 자신이 보유한 오피스텔을 장애인 아들에게 미리 증여해 아들이 사망할 때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신탁계약을 맺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신탁은 아들을 둘러싼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무분별한 금전적인 요구에 대비할 수 있으면서 증여세 등 각종 세제 혜택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탁시스템은 이렇게 작용했다. 일단 김씨는 자신이 보유한 현금 1억원과 월세가 나오는 오피스텔 한 채(시가 약 1억5000만원)를 둘째에게 증여 후 자녀가 수탁자인 금융기관과 신탁계약을 맺으면 자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세제 혜택도 있었다. 장애인에게 5억원까지 증여하고, 그 증여한 재산을 신탁하면 증여세 대상에서 제외됐다. 물론 증여된 재산을 중도 인출하거나 처분하는 경우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세법이 개정되면서 신탁기간 중 장애인 본인의 의료비, 특수교육비, 간병비 등의 용도로 중도 인출하더라도 세제 혜택이 그대로 유지됐다.

신탁으로 한발 앞서는 일본 ‘복지금융’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둘째가 증여받은 재산의 소유자로서 신탁계약의 ‘당사자’가 돼야 하는데 법률행위능력이 없었다. 법률행위를 대신해줄 성년후견인을 선임하는 절차부터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씨는 실망했다. 점점 거세지는 시댁의 금전 요구에 버텨낼 자신도 없었고, 후견 절차를 밟아야 하는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될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설득했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후견 절차가 끝나는 대로 신탁계약을 체결하자고. 원래 김씨가 원한 바는 자신 명의의 재산을 바로 신탁계약 해 아들을 위한 자산관리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실제 후견 절차만 끝나면 신탁이 보호막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신탁으로 ‘복지금융’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김씨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대비책을 간절히 원한다. 국가도 각종 복지제도 외에 재산 관리와 관련해서 여러 세제 혜택을 마련하고 있는데 그중 ‘장애인전용신탁’이 대표적이다.

장애인이 재산을 증여받고, 장애인을 수익자로 하는 신탁에 가입하는 등 일정 요건을 모두 갖추면 증여받은 재산 중 5억원까지 과세가액에 산입하지 않는다(상속세 및 증여세법 52조의2 1항). 수익자는 장애인 본인이어야 하고,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장애인, 국가유공상이자, 항시 치료를 요하는 중증환자(암환자, 만성신부전증환자, 고엽제후유증환자 등)가 해당한다. 증여자의 범위는 직계존비속뿐 아니라 타인도 포함된다.

신탁할 수 있는 재산은 금전, 유가증권, 부동산이다. 단, 증여세를 면제받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조건으로 ▶증여받은 재산을 전부 신탁업자에게 신탁할 것 ▶그 장애인이 신탁의 이익 전부를 받는 수익자일 것 ▶신탁 기간이 그 장애인이 사망할 때까지로 되어 있을 것 등이 있다.

장애인이 사망하기 전에 신탁기간이 끝날 때는 신탁 기간을 계속 연장해야 한다. 만약 신탁을 해지하거나 신탁기간이 끝났는데 연장하지 않는 경우, 신탁기간 중 수익자를 변경하거나 신탁한 증여재산가액이 감소한 경우, 또는 신탁 이익의 전부 또는 일부가 해당 장애인이 아닌 사람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확인된 경우에는 증여세가 부과(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52조의2 2항)되기 때문에 엄격한 사후관리 요건이 뒤따른다.

일본에선 ‘특정증여신탁’이란 이름으로 장애인에게 세제 혜택을 주고 있다. 6000만 엔(약 6억원) 한도까지 신탁에 편입된 재산은 증여세를 면제해준다. 장애인은 상속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우므로 부모 생전에 증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실제 부모 사후 다른 상속인들이 장애를 가진 상속인을 배제하는 경우 고향에서 먼 시설에 내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75년 일본에서 처음 생긴 ‘특정증여신탁’은 부모 등 증여자가 위탁자로 계약하기 때문에 가입하기 편하고, 정기적인 생활비 등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 2013년엔 경증 지적장애인·정신장애인까지도 특정증여신탁 가입 대상에 추가했다. 이는 복지금융의 좋은 예다.

한국에선 1998년 장애인신탁이 도입됐다. 위탁자를 증여자(부모)로 할 수 있는 구조를 허용하고, 원금 중 일부 금액을 생활지원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변경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렇게 바뀌면 김씨가 하는 고민이 상당수 해결될 수 있다.

201904호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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