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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2) 

진시황의 역린과 당태종의 역린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용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 중 턱 밑에 유독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 있다는 거다. 그것이 역린인데, 이를 건드리면 용이 분노해 누구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한다. 역린의 지적재산권은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 사상가 한비자가 갖고 있다.

『한비자』 ‘세난(說難)’편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무릇 용이라는 동물은 유순한 까닭에 길들이면 능히 올라탈 수 있다. 하지만 목 아래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역린)이 있는데, 용을 길들인 사람이라도 그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군주를 설득하려 할 경우 그 역린을 건드리지 말아야 설득을 기대할 수 있다.”

한비자는 권력자에 대한 유세(遊說)의 어려움을 강조한 것이다. 설득하려는 상대의 의중을 잘 살펴서 주장을 펴야 뜻한 바를 이룰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익을 마음에 두고 있는 군주에게 명예를 강조하면 효과를 거둘 수 있겠나 말이다. 맹자가 대표적 사례다. 현인을 널리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맹자에게 양혜왕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할 수 있을지 고견을 주십시오.”

그런데 맹자는 다짜고짜 왕을 야단치며 엉뚱한 소리를 한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왕이 나라의 이익을 구하는 게 당연한 일일진대, 어질고 올바름이 우선이라는 ‘맹자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맹자 말도 일리가 없진 않다. 계속 들어보자.

“왕이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만 말하면, 대부들은 어떻게 내 일가를 이롭게 할까만 말하고, 선비와 서인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만 말합니다. 그렇게 상하 모두가 서로 이익만 취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그 아래 천승을 가진 귀족일 것이며, 천승의 나라에서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그 아래 백승을 가진 귀족일 것입니다. 만승이 천승을 취하고, 천승이 백승을 취함이 적은 것이 아니지만, 진실로 의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다 빼앗지 않고는 만족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맹자』 ‘양혜황’ 장구 상)

인의로 나라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야 무엇이 문제겠나. 하지만 당시 위나라는 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역학관계 속에서 전쟁과 외교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혜왕의 귀에 인의가 들어올 리 없었고, 맹자의 말은 끝내 황야에서 홀로 외치는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하기야 어떠한 현자가 나타난들 혜왕의 눈에 들었을까. 그는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없었다. 사실 혜왕에게 필요한 사람은 맹자보다 법가의 창시자 격인 상앙 같은 이였다. 실제로 혜왕은 상앙을 중용하도록 추천을 받기까지 했다. 당시 위나라 대부였던 공손좌가 혜왕에게 “상앙을 재상으로 쓰든지 아니면 죽이라”고 코치한 것이다. 그를 중용하면 나라가 발전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아 그가 다른 나라에서 중용된다면 장차 위나라에 큰 화근이 될 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혜왕은 결단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상앙을 놓치고 만다. 상앙은 이후 진(秦)나라로 가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진을 위나라 대신 중국을 통일한 초강대국으로 성장시킨다.

한비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맹자와 마찬가지로 공손좌 역시 유세를 잘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한비자 역시 조금 모호하다. 한비자가 세난에서 예를 든 게 미자하의 경우다. 미자하는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 때 대부를 지낸 인물이다. 하루는 그의 모친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수레를 타고 문병을 다녀왔다. 당시 위나라 법에 따르면 왕의 수레를 몰래 타는 경우,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미자하를 총애했던 영공은 효성이 지극하다면서 그를 용서했다. 또 하루는 궁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따서 먹다가 남은 반쪽을 영공에게 주었다. 영공은 미자하가 자신을 그만큼 사랑한다며 칭찬했다. 세월이 흘러 미자하에 대한 영공의 사랑이 식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사소한 죄를 지었다. 그러자 영공은 크게 화를 내며 미자하를 내쫓았다.

“이놈은 옛날에 과인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타기도 하고,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과인에게 먹으라고 내밀기도 했다.”

군주의 마음에 따라 예전에 칭찬을 받던 일이 오늘에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군주의 마음을 읽으면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군주의 마음을 읽지 못할 경우 목숨이 위태로워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예로서는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군주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제시하는 좋은 예다. 그래서 후세의 오해를 초래한 것이다.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변덕스런 군주에게 바른 소리를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군주 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비겁함을 변호하는데 역린이라는 대단히 훌륭하고 편리한 ‘면피’ 도구를 제공한 셈이었다.

역린은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린이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리더의 행동에 역린, 즉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을 만들어놓는다면 그 성역은 갈수록 넓어질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바른 소리는 사라지게 되고, 그 리더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용의 온몸이 역린으로 뒤덮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조직의 미래는 설명이 필요 없다.

따라서 역린이란 다르게 해석돼야 한다. 설득하는데 위험이 따르는 만큼 설득 효과도 크다는 뜻을 새겨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영공에게도 미자하를 가까이 두지 말라고 충언하는 신하가 있었다. 위나라 대부 사추(史鰌) 같은 사람이다. 그는 영종에게 여러 번 충고했지만 영공은 듣지 않았다. 사추는 숨을 거두기 전 아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염도 하지 말고 창문 밖에 내놓으라고 유언했다. 문상을 온 영공이 이를 보고 무슨 이유냐고 물었다. 사추의 아들이 “살아서 임금을 바르게 이끌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유지를 전했다. 그러자 비로소 영공이 깨닫고 미자하를 내쫓게 된다. 이를 ‘시체가 돼서도 간언한다’는 뜻의 ‘시간(屍諫)’이라고 한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충격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실 죽은 뒤 하는 시간보다 더 어려운 게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린을 뽑는 데 도전했다. 진시황처럼 포악한 절대군주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시황은 스스로 ‘역린’을 선포한 황제였다.

진시황의 생모인 황태후 조씨는 태감인 노애과 관계를 가졌다. 노애는 거세를 위장한 환관으로 황태후와 관계해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다. 황태후의 입김으로 장신후에 봉해져 나랏일을 쥐락펴락했다. 신하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다 언쟁이 붙으면 눈을 부라리고 “내가 황제의 의붓아버지인데 하찮은 네 놈들이 감히 나와 맞서려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참다못한 신하들이 황제에게 달려가 고했고, 진시황은 격노했다. 주살을 당할까 두려워한 노애는 선수를 쳐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위조해 군사를 모으고 융적 무리까지 끌어들여 군사를 모았다. 하지만 노애 따위가 어찌 진시황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진시황은 반란군을 간단히 진압한 뒤 노애를 잡아다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어머니 조태후와 노애 사이에서 태어난 두 동생은 자루에 넣어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그리고 조태후는 부양궁에 유폐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렸다.

“이후로 감히 태후의 일로 내게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옷을 벗겨 찔레 가시로 골육을 도려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 다음 사지를 잘라 대궐 앞에 쌓으리라.”

역린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하지만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태후의 유폐에 불복하고 황제의 잘못에 대해 간언하는 신하가 줄을 이었다. 진시황은 그들을 예고한 대로 처형했다. 궁전 앞에 사지가 찢긴 시체들이 스물일곱 구나 쌓였다. 이 정도면 역린을 인정한다는 게 부끄러운 일 아니겠나.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모초(茅焦)라는 사람이 함양의 궁전 앞에 서서 외쳤다.

“제나라에서 온 모초라는 자가 황제께 간언하고자 합니다.”

보고를 받은 진시황은 모초를 들게 했다.

“대궐 아래 쌓인 시체들을 보지 못했느냐.”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모초가 대답했다.

“하늘에도 이십팔 수(宿)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가 스물일곱이니 이십팔 수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해보거라.”

“무릇 사생존망은 성스럽고 밝은 군주들이 다투어 들으려 하는 문제인데, 폐하께서는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폐하께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러 놓고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다는 말입니까? 폐하는 의붓아버지를 거열형에 처해 질투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입니다. 또 두 아우를 자루에 넣어 쳐 죽였으니 어질지 못하다는 평가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잘못입니다. 게다가 어머니를 부양궁에 가두었으니 불효막심한 행동을 내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잘못입니다. 이와 함께 간언하는 선비들을 고문하고 죽여 하나라 걸왕이나 은나라 주왕 같은 폭군 기질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잘못입니다. 이로써 천하에 진나라로 향할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제후들이 이 일을 빌미로 진나라를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이에 진나라가 멸망해 폐하가 위험해 처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제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저를 죽이십시오.”

모초는 옷을 벗고 사람을 죽이는 돌판 위에 엎드렸다. 그러나 크게 깨우친 진시황은 황급히 계단 아래로 내려와 근위병들을 물리친 뒤 모초를 잡아 일으켰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황제는 그를 중부(작은 아버지)로 삼고 상경의 벼슬을 내렸다. 조태후가 함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진시황의 역린 제거하기가 스물여덟 번째 시도로 성공한 것이다. 만약 모초 또한 실패했다면 스물아홉 번째, 서른 번째 시도도 계속 나왔으리라. 진시황 앞에서도 그럴진대 다른 경우는, 게다가 오늘날 간언하는 데 목숨을 걸 필요까지는 없는 민주사회에서 역린을 피한다는 것은 비겁하고 부끄러운 짓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이 리더의 잘못 앞에서 역린을 핑계 대며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이다.

리더 스스로 역린 뽑아야

알량하다는 말은 잘못일 수 있겠다. 자칫 바른말을 하다 직장을 잃을 수 있고, 현대사회에서 실직이란 목이 날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는 까닭이다. (해고되는 것을 목이 날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만큼 바른말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역린은 리더 스스로 부정해야 한다. 나아가 아랫사람들이 역린으로 느낄 만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뽑아내야 한다. 그것을 한 지도자가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당 태종이다. ‘정관의치(貞觀之治)’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정관 6년 당 태종은 신하들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용은 어루만져 훈련을 시킬 수 있지만 목 아래 역린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짐도 들은 바 있소. 그대들은 역린을 피하지 말고 각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구상들을 건의하도록 하시오. 늘 그렇다면 짐이 어찌 나라가 망할 것을 걱정할 리 있겠소?” (『정관정요』)

황제가 직접 자신의 역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린도 없었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뽑아버린 것이다. 이때뿐만이 아니다. 당 태종은 늘 신하들이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수시로 쓴소리를 해달라고 독려했다. 그 말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명군과 현명한 재상이 만나야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천하가 안정될 수 있소. 짐은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다행이 여러 대신이 짐을 잘 보좌한 덕분에 여러 허물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소. 대신들의 직언과 바른 논의에 의지해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고자 하오.”(정관 원년)

“명군은 늘 자신의 단점을 생각하는 까닭에 날로 현명해지지만 암군은 자신의 단점을 변명하며 옹호하는 까닭에 영원히 어리석어지오. 수양제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단점을 감싸면서 신하들의 간언을 물리쳤소. 이런 정황에서 신하가 군주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오.”(정관 2년)

“신하들이 간언하려고 해도 군주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오. (…) 나는 가슴을 크게 열고 신하의 원대한 생각과 간언을 받아들일 것이오. 여러분은 두려워해 말을 진실되게 펼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정관 15년)

“군주는 반드시 과실을 간언하는 충신을 얻어 항상 군주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도록 해야 하오. 군주가 하루에 정무를 무수히 처리하면서 혼자 시비를 판단하면, 비록 근심하고 수고롭다 해도 어찌 문제를 훌륭히 처리할 수 있겠소?”(정관 16년)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1905호 (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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