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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승계와 신탁 

 

기업승계는 우리 사회가 보유한 자산을 다음 세대로 이전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한국 전체 기업 중 95% 이상이 창업주가 1970년대 이후 설립한 중소기업이다. 80대가 된 창업주는 오늘도 기업이 다음 세대를 넘어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한다.

기업승계는 단순히 재산 상속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일궈온 기업,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보유한 자산을 다음 세대로 이전하는 일이다. 기업승계를 위한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이어지는 이유다. 중소벤처기업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국내 중소기업은 약 660만 개, 전체 근로자 수는 1700만 명이 넘는다. 머릿수만 따지면 전체 기업의 99.9%가 중소기업이고 전체 근로자 수의 83.1%가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일자리를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다수 중소기업의 창업주가 80대에 접어들었다는 게 문제다. 1970~1980년대 고도 성장기에 30~40대 나이로 사업에 뛰어든 이들이 이제 경영승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까닭이다. 이미 2세 경영이 시작돼 부모 세대보다 더 성장한 기업도 속속 나오고 있다. 실제로 재산 상속 자체보다 훌륭한 후계자가 기업활동을 이어가길 바라는 창업주가 훨씬 많다.

기업승계가 정착된 선진국에서는 100년 기업이 흔하다. 2020년 일본의 닛케이 BP 컨설팅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100년 이상 업력을 지닌 기업은 일본이 3만3076개로 가장 많고, 미국도 1만9497개에 이른다. 스웨덴은 1만3997개, 독일 4947개, 영국 1861개 등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200년 이상 업력을 가진 기업도 일본 1340개, 미국 239개, 독일 201개, 영국 83개로 조사됐다.

반면 한국에서 100년 이상 업력을 지닌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지난해 종합인쇄회사 ‘보진재(寶晉齋)’가 108년 역사를 끝으로 폐업하면서 9개였던 100년 기업이 8개로 줄었다. 선진국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수준이라 2016년부터 30년 이상 된 기업을 ‘장수기업’, 45년 된 기업을 ‘명문 장수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

기업승계의 발목을 잡는 주요 원인은 역시나 조세 부담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매년 실시하는 중소기업 가업승계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70% 이상이 조세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다른 이유로는 자금이나 판로 등 종합적 지원정책 부족(17%), 가족 간 후계자를 아직 정하지 못한 이유(3%) 등을 꼽기도 했다. 다행히도 응답자의 70%는 기업승계를 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40%에 머물렀던 2015년보다 승계 의지는 그만큼 강해졌다고 봐야 한다.

한국 세법도 원활한 승계를 지원하기 위해 ‘가업상속공제제도’와 ‘가업승계 주식에 대한 증여세 과세 특례제도’를 운영 중이다. 가업상속공제란 10년 이상의 경우 200억원, 20년 이상 300억원, 30년 이상은 최대 500억원까지 상속공제를 해주는 제도이다. 상속세 과표가 600억원일 때 가업상속공제제도를 활용한다면 600억원에서 500억원을 차감하고 100억원에 대해서만 세금을 매긴다는 것이다. 대상은 상속증여세법과 조세특례법상 중소기업으로, 매출액 3000억원 미만이면서 자산 총액 5000억원 미만인 기업이 해당한다.

세금을 대폭 경감해주다 보니 요건이 까다롭다. 가업의 요건, 기업을 물려주는 피상속인의 요건, 기업을 물려받는 상속인 요건 등 세 가지가 있다. 더 어려운 것은 7년간 준수해야 하는 까다로운 사후관리 요건이다. 혜택을 받으려면 가업용 자산의 80% 이상을 유지해야 하고, 업종 변경은 표준산업분류에서 중분류 범위에서만 해야 한다. 경기 불확실성과 급변하는 환경을 생각하면 세제 혜택도 받으면서 새로운 시장 진출에 대한 허용 등 제도 개선에 대한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회계법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중은행도 기업 컨설팅과 승계 플랜에 나섰다. 회계 및 세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중소·중견기업의 재무진단, 세무진단, 인사/성과평가, 회계감사 준비, 밸류에이션(Valuation), 내부통제, 지식재산권 자문 등이다. 승계 컨설팅에서는 경영진의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주식가치 평가, 시나리오 분석, 자회사 설립 시 절세 포인트 검토, 사업구조, 개인 자산의 점검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신탁을 통한 기업승계 문의가 폭증하고 있다. 기업승계신탁이란 기업 CEO가 보유한 주식을 수탁자에게 신탁하고, 본인 사후에 미리 지정한 승계자에게 상속하는 신탁계약을 말한다. 별도의 유언장 없이도 신탁계약에 따라 원활한 기업승계를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신탁을 설정한다는 것은 나만의 가상 재단이나 법인을 만들어놓는 것과 비슷하다. 기업승계신탁은 주식을 신탁이라는 가상 재단으로 이전해 안전하게 관리하며 의결권 행사는 위탁자의 지시에 따라 수탁자가 행사하도록 구성한다.

몇 가지 이점이 더 있다. 신탁으로 이전된 재산은 위탁자의 재산도 아니고 수탁자의 고유재산과도 분리되는 독립적인 특성이 있어 예상치 못한 법적 분쟁을 방지할 수 있다. CEO 입장에서는 승계자를 미리 지정함으로써 본인의 유고 시 별도의 유언 없이 원활한 승계가 진행되어 경영권 분쟁을 방지하고 안정적인 지속경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자녀에게 낭비벽이 있거나 증여받은 재산을 잘 관리하지 못할 것 같아 상담하는 창업주도 많다. 우리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렇다. 신탁으로 정상적으로 이전된 재산은 강제집행 대상에서 제외되는 특성이 있어 재산보호기능을 한다. 따라서 자녀에게 증여하면서 증여와 동시에 신탁을 설정하도록 하되, 신탁재산에 대한 관리와 의결권 절차 등에는 부모의 협의가를 정해 두면 신탁재산을 장기간 안전하게 관리·승계할 수 있다.

기업승계에서 황혼이혼도 꽤 큰 이슈다. 승계세대의 이혼으로 인한 재산분할 문제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해외에서는 신탁을 활용하고 있다. 이혼은 종국적으로 재산 형성과 유지에 대한 기여도 문제라고 한다. 혼인 전 또는 상속이나 증여받은 재산을 신탁으로 이전해 수탁자가 관리하게 함으로써 재산분할로 인한 분쟁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2020년, 신탁을 설정하면 기업승계 과정에서도 유류분과 관련된 고민도 풀어볼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피상속인 사망 1년 전 신탁된 재산은 유류분의 기초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판결로, 대법원 판례는 아니지만 현재 유류분을 고민하는 경우라면 의미 있게 검토할 필요는 있다. 물론 논란의 여지도 있다. 기업상속공제를 계획한 경우 신탁으로 소유권을 이전하면 신탁도 과세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신탁은 설정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로운 자산관리와 상속설계가 가능하기에 충분히 기업승계 솔루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

-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 센터장

202109호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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