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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33) 색(色)의 작가, 홍경택 

현대식 책가도의 매력에 빠지다 

정형모 전문기자
5일간 추정 매출액 650억원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세우며 10월 17일 막을 내린 2021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는 미술시장에 대한 최근의 관심이 얼마나 달아올랐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동안 해외 아트페어 중심으로 활동하다 오랜만에 KIAF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 홍경택(53)에게도 이번 행사는 멋진 경험이었다. 민화 ‘책가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새로 선보인 ‘책’ 연작 중 하나가 마지막 날 극적으로 인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알아봐주는 분이 계시다는 게 놀랍고 고맙다”는 작가는 지난 2013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유화 ‘연필 I’로 당시 크리스티 역대 한국 작가 최고가 기록(663만 HKD·약 9억8400만원·수수료 포함)을 세운 바 있다.

▎매끄럽고 반짝이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온 홍경택 작가.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 창가는 야들야들한 고사릿과의 초록 식물들 덕분에 마치 미니 정글 같았다. 겹겹이 쌓인 새 캔버스와 미완성작들 사이로 재즈 선율과 커피 향내가 리드미컬하게 섞여 흘러나왔다.

“이 동네에서 50년 넘게 살았어요. 부모님이 근처에서 패션 장갑 공장을 하셨거든요. 결혼식이나 파티에 쓰는, 화려한 원단에 구슬 장식도 달린 기다란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셨죠. 몇 년 전 아르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에서 형형색색 실패들을 모아 설치작업을 한 것도 어린 시절 익숙하게 보아왔던 장면들 덕분이었을지도 몰라요.” 작가의 현란한 화풍의 배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디자인과 회화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작가’에 대한 동경으로 그림을 선택했다는 홍 작가는 “외워서 그려야 하는” 입시 미술이 싫었고, 엄숙하고 진지하며 심지어 ‘칙칙한’ 그림만 요구하는 미술계 풍토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쳤으니, 대학 3학년 전공수업 시간이었다. “첫 시간에 교수님이 ‘너희가 그리고 싶은 거 그려라’ 하시더라고요. 제 안에 갇혀 있던 뭔가를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새롭다’고 칭찬해주시더라고요. 자신감이 생겼죠. 빨리 부딪쳐보고 싶었어요.”

졸업하자마자 미술계로 나온 것도 그런 ‘자신감’ 덕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그의 그림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 대안공간의 작가 지원 프로젝트에서는 ‘0표’을 얻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가 첫 개인전을 연 것은 졸업한 지 7년이 지난 2000년이 돼서였다.

“어떻게든 미술계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교를 하라는 학교의 제안도 뿌리치고 갤러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청소하고, 다른 작가들 그림 걸어주고, 포스터 붙이고…. 남는 시간에는 사람도 거의 안 만나고 그림만 그렸습니다. 작업실엔 냉방도 거의 하지 않았죠. 솔직히 부모님 서포트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작가가 될 거니까 가난에 익숙해져야 돼’하는 마음이 더 컸거든요.”

#펜 | 길고 곧고 반짝이는


▎무제(2020). 60.6×45.5㎝ acrylic & oil on linen / 사진:홍경택 작가
홍콩 크리스티가 인정했듯, ‘연필’ 시리즈는 그의 대표작이다. 형형색색 곧고 기다란 볼펜과 연필들이 방사형으로 놀라운 속도감과 에너지를 분출한다. 사람 키보다 큰 캔버스를 촘촘하게 메워 오라(aura)도 엄청나다.

“사물의 표면에 관심이 많았어요. 플라스틱에서 느껴지는 가볍고 유혹적인, 또 성적인 매끈함을 표현하고 싶었죠. 무거운 사회 분위기, 미술계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많았고요. 작품이 커진 것은 설치 작업 때문이에요. 전시장이 커지면서 회화보다 설치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는데, ‘설치와 맞장뜨려면 작품이 커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큰 작품을 하면 배우는 것도 많아요. 완성할 때의 쾌감도 크다 보니 계속해서 더 크게 그리게 되더라고요.”

그가 가장 아끼는 펜은 단추를 누르면 꽃잎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볼펜이다. 단순해 보이는 꽃봉오리는 그의 그림에 힘을 주는 ‘포인트’가 됐다. 대중문화 캐릭터가 달린 볼펜들도 속속 모델이 됐다. 펜 뭉치를 그릴 때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주제어를 ‘어나니머스(Anonymous·무명씨)’라고 붙여보니 “느낌이 왔다”고 했다. 누구나 스타가 되는 시대, 이름 없는 캐릭터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확보하는 순간이다.

#훵케스트라 | 셀럽과 21세기 이콘


▎Pens- Anonymous(2015~2019). 248.5×333.3㎝ oil on linen / 사진:홍경택 작가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가장 힘이 되는 친구는 음악이다. 팝, 그중에서도 미국 가수 프린스의 음악에 심취하며 “귀가 트였다”고 했다. “프린스는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장르를 섭렵했죠. 대중문화인으로 알려졌지만 ‘작가’의 길을 걸어간 예술가이기도 해요. 그의 흥망성쇠를 접하고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지, 어떻게 해야 예술가로 인정받는지 간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말초적이며 섹슈얼한 ‘훵크(funk)’ 음악의 분위기에 엄숙한 클래식을 대표하는 단위인 오케스트라(orchestra)를 결합해 만든 것이 ‘훵케스트라’ 시리즈다. 기독교의 성화(聖畵) 양식을 차용해 현대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대중문화 스타의 얼굴을 그려넣고,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밀조밀함을 디자인적 패턴으로 양식화한 그림이다. 음악가 바흐나 화가 고흐 같은 예술가, 메릴린 먼로나 비틀스 같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그의 작품에 등장했다. 최근엔 BTS도 주인공이 됐다.

뒤늦게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로서 “시각적 자극을 위해 신성모독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는 작가는 종교와 속세, 가벼움과 진지함, 클래식과 대중문화를 잇는 어떤 가교 구실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종교와 대중예술 사이에 있는 것이 처음엔 너무 이질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면서 느낀 게 있어요. 그의 작품은 기괴하고 폭력적이며 뒤틀리고 모호한, 인간의 바닥까지 보여주거든요. 그러면서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래요. 그것은 신앙심이 깊은 것과는 다른 얘기죠. 린치의 영화나 프린스의 음악에는 뭔가 신성(神聖)한 게 등장하거든요. 그런 걸 표현하고 싶은 거죠.”

#책가도 | 이성과 판타지의 오묘한 결합


▎BTS(2019). 250×250㎝ acrylic & oil on linen / 사진:홍경택 작가
서구 팝아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작가의 ‘채무감’을 덜어준 것이 우리 민화, 그중에서도 ‘책가도’였다. 책가도는 책장에 가득한 책과 신기한 서양 기물을 그린 조선 후기 그림 양식을 말한다.

“처음 책가도를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색감도 그렇고, 무엇보다 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게 됐죠. 글자가 적힌 종이 한 장 한 장이 모여 책이 되고, 그것들이 책꽂이를 메우고, 다시 거대한 서가를 이루고… 인간의 역사가 집적된 현장이잖아요. 글자 한 자가 이렇게 문명을 일궈냈구나,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정보의 파라다이스, 미로이자 둥지. 이것을 현대화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홍경택의 책가도에는 판타지가 들어 있다. 서재에 새가 날고 어린아이가 주문을 외운다. 책장 중간에 멋진 풍광이 펼쳐지기도 한다. 가장 이성적인 공간에서 환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아주 옛날에는 사냥을 잘할 수 있게 해달라며 동굴 벽에 소 그림을 남겼죠. 그런데 중세 이후 이성의 시대가 되면서 그런 것들은 주술이고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렸어요. 예술가란 이 주술과 이성의 중간에서 둘을 연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미술 역시 마법과 과학 사이에 있는것이고요.”


▎작업실에서 만난 홍경택 작가. ‘책’ 연작을 준비 중이다. / 사진:전민규 기자
이번 KIAF에서 팔린 신작 ‘책’ 시리즈는 ‘홍경택 책가도’의 ‘각론’ 같은 작품이다. “원이 신이라면 사각형은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새 시리즈를 통해 ‘수평과 수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올해 들어 서울대 미술관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제주아트디자인페스타와 한중교류전, 중국 아트021 상하이 등에 작품을 출품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낸 그에게 내년은 더욱 각별한 해가 될 터다.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박물관에서 책거리 그림을 본격적으로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책거리와 민화 그림은 얼마 전 미국 순회전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전시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옛 책거리 그림과 홍경택의 책거리가 유럽인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111호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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