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러시아 작곡가, 우크라이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는 1839년 러시아의 카레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인이었던 그의 작품에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있는 유명한 대문을 표현했다는 웅장한 곡이 있다. 1891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민족의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찬양하는 칸타타를 작곡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체로 러시아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이제부터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알아두어야 할까.

▎키예프(Kiev: 키이우)의 황금 대문. 폭격으로부터 무사하기를 기대한다.
무소르그스키(혹은 무소륵스키)가 태어날 당시의 러시아제국은 황제와 귀족이 다스리던 나라였다. 당시 러시아는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를, 동쪽으로는 알래스카를 포함하고 있었다. 무소르그스키는 대대로 지주였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0대 중반까지는 부유하게 살았다. 그가 20대 초반이었던 1861년, 당시 황제 알렉산더(혹은 알렉산드르) 2세는 정치적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농노해방령을 선포했다. 그의 뜻에 따라 러시아는 전근대적 농노국가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국가로 서서히 이행했다.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농민들이 도시의 공장에 노동자로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소르그스키의 가족은 이 과정에서 고통을 맛봤다. 먹고살기 위해 직업을 구해야 했던 지주의 아들은 말단 관리가 되었고, 하급 관리의 삶은 좋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1881년 46세로 사망할 때까지 알코올의존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작품 세계는 행복한 감정을 표현하는 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시대 러시아 작곡가인 차이콥스키의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세련된 우울함이나 음울함 쪽도 아니었다. 그 시대 러시아에서는 자신들의 조국을 서구화해야 한다는 이들과 동방의 나라 러시아로 남겨두자는 이들이 논쟁하고 있었다. 서구화가 곧 근대화고 그것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던 이들과, 공동체와 전통적 도덕, 특히 러시아정교회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이 이견을 보였다. 서구파 차이콥스키의 세계가 우울하더라도 세련되었다면, 무소르그스키의 세계는 동방에 남아 있자는 지향과 맞닿아 있었던 듯하고 그래서 토속적인 것 같다. 이른바 러시아적인 것을 추구했던 작곡가 5명이 있었고 그들을 ‘러시아 5인조’라고 부르는데, 무소르그스키는 그 구성원이었고, 차이콥스키는 아니었다.

서쪽을 바라보았던 차이콥스키는 그쪽에서 유행했고 높이 평가되던 장르인 교향곡을 여섯 곡이나 작곡했고, 소나타, 협주곡과 같은 서구적 기악음악도 많이 작곡했다. 고전발레도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다.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 음악은 차이콥스키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작품이다. 오늘날 러시아의 발레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사실 발레는 절대왕정 시대의 프랑스가 육성했던 예술이었다. 19세기 동안 러시아는 유럽과 세계에서 영국과 적대했고, 프랑스와 친했다. 러시아의 프랑스 콤플렉스의 결과물이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의 세계 최고 수준 발레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서구적 차이콥스키도 종종 조국의 민속적 소재를 사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조국은 러시아이자 우크라이나였다. 차이콥스키에게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조부가 있었다. 또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던 친척과 친동생도 있었다. 이 우크라이나계 작곡가는 거의 매년 우크라이나에 머물렀으며, 이곳에서는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에서 얻지 못했던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작품 30여 곡을 우크라이나에서 썼으며,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과 3악장은 우크라이나 민요의 향연장이다. 1악장의 웅장한 첫 부분에서 차이콥스키는 우크라이나의 거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가요를 인용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친구였던 건축가 하르트만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키예프의 대문]. 하르트만의 계획은 이미 존재하는 키이우의 유명한 대문과 분위기가 유사하지만 좀 더 현대적인 대문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차이콥스키와 대조적으로, 무소르그스키는 교향곡과 소나타 등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주로 교향시와 오페라를 썼고 이 장르들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대표적인 것이 [민둥산의 하룻밤] 혹은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라는 교향시다. 이 교향시는 판본 3개가 있고, 판본별로 그것을 만들게 된 동기, 배경 등이 조금씩 다르다. 첫 번째 판본, 그러니까 작곡가가 처음 작곡한 버전은 작곡가에 따르면 고골의 문학 세계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이 1832년에 쓴 단편소설 중에는 ‘성 요한제 전야’라는 이야기가 있다. 매년 6월 24일이면 산에서 성 요한에게 경건한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전날 마녀들이 먼저 모여 자신들의 왕인 악마를 기쁘게 하는 잔치를 벌이다가 새벽에 들리는 교회 종소리와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마녀들이 모이는 산이 키예프에 있는 트라고라프산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키예프(Kiev)는 잘 알려져 있듯이 우크라이나의 수도이고 그 나라 발음으로는 키이우 혹은 크이우라고 읽는다. 트라고라프가 오늘날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러시아의 대문호’라고 여겨지는 고골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당시에는 실재했던 산일 것이고, 이후 이름이 바뀐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산이거나. 고골도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민둥산의 하룻밤]은 종종 연주되는, 독특한 작품이다. 원곡은 피아노곡이거나 합창곡 등이었는데, 무소르그스키의 친구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관현악 곡으로 편곡했다. 무소르그스키가 살았던 시절,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였고, 무소르그스키는 ‘자국’의 전설을 콘텐트 삼아 [민둥산의 하룻밤]을 작곡했다. 오늘날의 반러시아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이런 ‘자국’ 논리는 제국주의의 부당한 논리일 것이다.

무소르그스키는 키예프(키이우)의 상징인 [키예프의 대문] 혹은 [키예프의 금문]을 음악화하기도 했다. 11세기에 키이우 성곽의 주요 관문으로 만들어졌던 이 대문은 중세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금문]을 본떠 건축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오늘날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의 특정 지구에 해당한다.) 1866년, 알렉산더 2세는 키예프에서 암살당할 뻔했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황제는 자신의 살아남음을 기념한다는 다소 뜨악한 행사로서 키예프에 새로운 대문을 신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는 그것을 위한 디자인 경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 무소르그스키의 친구였던 하르트만을 비롯해 많은 건축가가 디자인을 제출했는데, 황제는 이후 이 대회를 취소했고, 결국 새로운 대문의 신축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르트만은 이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추모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하르트만의 여러 작품을 무소르그스키가 관람했고 그림들에서 영감을 받아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모음곡을 작곡했다. 그중 마지막 곡은 신축 계획안에 담긴 키예프의 대문 모습을 표현한 곡으로, [키예프의 대문]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상술한 [민둥산의 하룻밤]과 같이 이 [전람회의 그림]도 피아노 곡으로 작곡했고, 오늘날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 버전을 연주한다. 지휘자들은 프랑스 작곡가 라벨이 편곡한 관현악 버전으로 이 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다.

러시아인으로서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일부로 당연하게 여기며 우크라이나 소재를 사용했던 무소르그스키가 있고, 우크라이나계였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작곡가로 알려진 차이콥스키가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프로코피예프 같은 이도 있다. 프로코피예프는 칸타타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작곡했는데,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류리크 가문 출신이며 러시아의 민족적 영웅이다. 류리크 가문은 서기 862년에서 1612년까지 루스인이 세웠던 국가들을 지배했다. 루스인은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의 기원이 된 민족이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같은 조상을 가졌던 것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서쪽 스웨덴군과 독일 기사단의 호전적 공격으로부터 러시아의 영토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인데, 이 영웅담은 근거가 불분명하다. 실존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의 활약상에는 신화가 개입된 측면이 있다. 게다가, 몽고의 침략에 맞서서는 특별한 공헌을 하지 못했다. 네프스키는 몽고에 대해서는 철저한 주화파였다. 비슷한 시기에, 몽고에 대한 주전파들로 가득했던 우크라이나는 네프스키가 이끌던 러시아와 운명을 달리한다. 즉, 우크라이나는 몽고의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을 치렀다. 아무튼 그를 러시아의 민족적 영웅으로 보는 분위기는 러시아에서는 대세다. 그런 그를 다룬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영화도 있고, 그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던 곡을 프로코피예프는 더 가다듬어 칸타타 [알렉산더 네프스키]로 작곡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체로 러시아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그는 자신을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작곡가라고 여겼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합창이 들어가는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음악은 웅장하고 격렬하다. 국내에서는 2004년과 2005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음악으로도 쓰였다.


▎‘성 요한의 날’(Saint John’s Day) 행사를 준비하는 이탈리아의 한 가톨릭교회 앞에 사람들. 매년 6월 24일에 열리는 유럽 여러 나라의 행사다. 성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해준 성인이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리며, 요한복음을 썼던 사도 요한과는 다른 인물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문호 고골은 ‘성 요한의 날’의 전날(6월 23일) 밤에 마녀들이 모여 축제를 벌인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 축제의 이름은 ‘성 요한제 전야’(Saint John’s Eve)다. 무소르그스키가 이 전야를 음악화한 것이 [민둥산의 하룻밤]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우크라이나의 도시 손초프카(Sontsivka)에서 태어났다. 현재 러시아는 자국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의해 학살되고 있다며 이것을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계 주민들을 학살한다는 곳이 우크라이나 동쪽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이다. 손초프카는 바로 도네츠크에 있다.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계였을까? 아니다. 유대계였다.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혁명 정부를 싫어해 1920년대에 러시아를 떠났다가 다시 귀국했다. 그러고는 사회주의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에 부응하는 작품들을 쓰느라 애썼다. 그렇게 살던 그는 공교롭게도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했다. 모든 이가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여하느라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가족 이외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조문객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스탈린에게 박해를 받았던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였다. 우크라이나와 무관한 쇼스타코비치가 우크라이나 출신 프로코피예프를 애도했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204호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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