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agement

Home>포브스>Management

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35) 실크로드의 기술 인재 쟁탈전 

 

앞으로 한국 엔지니어들의 해외진출이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자가 대접 받는 세상이 돼야 인재 출혈이 없을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서 사업을 하다 보니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전 세계에서 반도체산업이 발달한 도시 어디를 가도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보인다. 미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 유럽 등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 구석구석에서 반도체 강국 한국의 인재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몇 달 전 우리회사 임원이 대만 출장을 갔을 때 TSMC 엔지니어 수천 명이 Intel 등 미국 회사로 옮겨가서 큰 파장이 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서 첨단 공정 팹을 지으며, 최고의 파운드리 기술을 가진 대만 엔지니어들을 고액 연봉으로 대거 스카우트해 간 것이다. 한국도 반도체 엔지니어 유출이 심각하다. 삼성과 SK의 최고 임원들도 반도체 인력 유출 문제를 하소연한다. 요즘은 중국 쪽보다 미국 쪽으로 인력 유출이 심각하다.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굴기를 하면서 한국과 대만에서 일하던 수많은 엔지니어가 몇 배의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중국 반도체 업계로 옮겨갔다. 휴대폰, LED, LCD 등 중국의 대형 전자업체에서는 한국 엔지니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으로 미국, 중국, 유럽, 인도 등에서 반도체 팹을 많이 건설하면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해외 유출이 더 가속화될 것이다. 세계 각국은 반도체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동안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잘 훈련된 한국의 반도체 인재들은 언어장벽에도 세계 각국에서 몸값이 높다. 결국 한국 반도체산업의 가장 큰 리스크는 돈이 아니라 인력이 될 것이다.

실크로드에서는 교역과 문화 교류 과정에서 치열한 인재 쟁탈전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는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류로 유명했지만, 사실상 유라시아 전역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기술을 교환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특히 무기와 관련된 군사 기술과 산업기술은 국운을 걸고 지키려 했다. 실크로드에서는 새로운 첨단기술이 나올 때마다 치열한 인재 쟁탈전이 있었고, 동시에 기술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노하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청동기 시대에 구리를 제련하는 기술은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요즘 반도체 기술이 유출되지 않게 법으로 보호하듯이 청동기 기술은 소수의 기술자가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폐쇄적으로 공유했다. 청동기가 상류층의 상징이 되고 계급이 높을수록 많은 청동기를 보유하게 되자, 엔지니어들의 신분도 같이 상승했다. 요즘 우리가 첨단기술자들을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하듯이 청동기 시대에도 고급 엔지니어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고대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시작된 청동기는 인재 쟁탈전을 거쳐 수천 년 동안 시베리아와 만주를 거쳐 고조선에 이르렀다. 고조선의 청동기도 유라시아의 청동기 장인이 확산되어서 유입된 결과이고, 가야의 석탈해 신화에도 철기를 굽는 대장장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기술자는 고대 최고의 테크노크라트였다.

3000여 년 전 지금의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던 히타이트는 철의 제국이었다. 히타이트는 철 제조기술을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자원으로 인식하고 적들이 이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대비했다. 철 제조 장소를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고, 특별한 암호를 사용하여 비밀리에 철 제조 기술을 전달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철 제조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 제조 기술은 소수의 지배층만 알고 있는 비밀로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1200년경 해상 민족의 침입으로 히타이트가 멸망하자, 히타이트의 대장장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 아시리아, 이집트, 이란 등 여러 지역에 제철 기술이 퍼지면서 철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의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천신족도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진 유목민 집단이라고 추측된다.


▎1000보를 날아갔다는 신라의 최신식 활 쇠뇌.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역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고대 전쟁 기록은 사실 알고 보면 당시 첨단무기들의 전쟁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1000보를 날아갔다는 당대 최신식 활인 신라의 ‘쇠뇌’를 탐냈다. 당 고종은 신라의 화살 명장 ‘구진천’을 데려와 쇠뇌를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당나라로 끌려간 구진천이 신라의 국운을 위해서 끝까지 쇠뇌 제조 기술을 넘기지 않은 것 같다. 그 후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군 20만 명이 신라군 3만 명에게 패할 때 쇠뇌가 큰 활약을 했을 것이다.

돌궐은 우수한 제철 기술과 기마술로 6~8세기에 내몽골에서 흑해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했다. 13세기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즈칸의 이름이 아버지가 죽인 적장의 이름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를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몽골계 브랴트족은 대장장이를 샤먼보다 더 높고 강한 존재로 존중했다. 고대 한반도에서는 대장장이가 대우받았지만, 주자학적 세계관에 빠져 사농공상에 함몰되었던 조선에서 대장장이는 천대받는 직업 중 하나였다.

조선은 16세기 초 획기적인 은 제련 기술인 ‘연은분리법’을 개발했으나, 이 기술은 곧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조선에서 경수(慶寿, 게이주)와 종단(宗丹, 소탄)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하여 연은 분리법에 관한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일본은 몽골제국이 만들어놓은 세계적인 ‘은 본위제도’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 연은분리법으로 대량의 은을 제련하고 팔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도자기도 고대에서 근대까지 첨단기술 중 하나였다. 특히 중국은 1000년 이상 도자기가 발전한 나라였지만, 청자는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가 되어서야 중국 월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는 장보고가 활동했던 청해진과 가까운 전남 강진에서 중국 월주 계통의 청자 기술을 받아들여 11세기에 고려청자를 만들어냈다. 초기 청자의 기법과 문양이 중국 월주 가마에서 만든 도자기와 유사해 중국 월주의 도공을 스카우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의 뛰어난 자기 기술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갔고, 일본의 자기는 산 하나가 없어질 정도로 세계적인 대박 상품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많은 도공이 돌아가지 않았다. 사농공상의 주자학적 질서 속에서 천대받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실력만 있으면 최고의 사무라이 계급으로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는 일본에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 끌려갔던 도공들이 조선에 들어와 그나마 남아 있는 도공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스카우트해 갔다.


▎강진군 고려청자박물관 내 가마에서 도공들이 장작을 넣고 있다. 강진은 대구면 일대 102만9640㎡에 총 188기의 도요지가 남아 있다. / 사진:강진군
얼마 전 국내 주요 대학 반도체학과에 지원했던 학생 중 상당수가 등록을 포기하고 의대를 선택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의학 역시 인간 삶에서 필수적인 학문이다. 우리 삶에서 의학의 발달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들의 의대 쏠림현상은 의학의 발전과 의술에 대한 열정만은 아닐 것이다. 불확실한 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고 검증된 길을 가려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클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치열한 경쟁 상대인 대만과 중국에서는 뛰어난 인재들이 공대에 진학한다.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공계 출신 국가지도자들이 대만과 중국에는 수두룩하다. 미국은 전 세계 이공계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1970~80년대 한국에서는 수재들이 공대에 몰려들었다. 그 인재들 중에 의대에 가지 않고 괜히 공대 갔다고 후회하는 이가 많았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삶의 터전으로 미국을 택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최고의 엔지니어가 되더라도 사회적 지위와 벌이가 미국만 못했던 것이다.

한국이 일구어낸 기적적인 발전은 부족한 자원과 지정학적인 조건에서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의대 쏠림현상을 겪고 있다. 이를 보고 ‘사농공상’이라 하며 수많은 직업과 기술을 경시하고 오로지 과거급제에만 인생을 걸었던 조선시대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국이 인생을 걸고 새로운 기술에 뛰어드는 과학기술자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면, 새로운 인재가 영입되지도 않겠지만, 지금 있는 인재들조차 미국, 중국 등 경쟁국에 빼앗길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30년 뒤에 대만과 중국, 미국의 총명한 인재들에게 밀려 암울한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새로운 기술에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음은 수천 년 인류 문명의 역사가 증명하지 않는가.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명약관화한 사실 앞에서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304호 (2023.03.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