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살롱 드 PJ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03) 

아이리시위스키 이야기 

평온한 초록빛 에메랄드그린의 나라에서, 빛나는 초록빛 위스키와 더욱 빛나는 초록빛 사람들을 찾아 떠나는 세 번째 위스키 기행.

▎툴라모어 증류소의 위스키 저장고.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초록색 조명으로 포인트를 더했다.
3월 17일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명절인 성패트릭데이다. 전 세계 모든 아일랜드인이 패트릭 성인을 매개로 하나가 되는 이날에는 더블린을 비롯해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런던, 뉴욕 등 아이리시 커뮤니티가 있는 전 세계 곳곳에서 그들만의 초록빛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흔히 아일랜드 하면 떠올리는 색깔은 바로 초록색이다. 아일랜드 국기에도 초록색을 사용하여 그들의 국토를 나타내는데, 마치 윈도우XP의 배경화면처럼 완만한 언덕과 그곳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 떼가 아일랜드를 상징한다.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윈도우XP 배경화면의 초록빛 구릉은 사실 이제 더는 지구상에 없다. 많은 이가 MS 본사가 있는 시애틀 근처의 어디쯤이 아닐까 생각하는 그곳은 나파밸리의 포도밭이었다. 1990년대에 필록세라균이 창궐하여 포도나무가 모두 죽어서 벌목되고 난 후 한동안 그저 푸른 풀밭으로 있던 광경을 어느 사진작가가 포착했다. 짐작하듯이 그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부자가 되었다. 이후 다시 포도나무를 심어 이곳은 이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는데, 이조차 아일랜드의 초록빛 에메랄드 구릉만큼은 푸르지 않아 MS사에서는 배경화면으로 쓰기 위해 조금 더 강렬한 초록색으로 보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예이츠나 조이스 같은 문호들이 아일랜드의 멋을 더해주지만, 위스키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이 아일랜드가 전 세계 모든 위스키의 원조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스카치의 ‘Whisky’와 달리 아일랜드에서는 ‘Whiskey’로 쓰는데 스펠링만 다른 것이 아니라 만드는 방식도 꽤 다르다. 지금은 두 번 증류하는 스코틀랜드 방식이 전 세계 위스키 생산의 표준 같지만, 세 번 증류하여 증류주의 거친 향과 목 넘김을 바로잡은 부드러운 아이리시위스키가 사실 원조이다. 맥주, 소주뿐 아니라 모든 술을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판단하는 우리 한국인의 입맛에는 오히려 아이리시위스키가 더 잘 맞는다. 아일랜드와 바다를 통해 접해 있는 스코틀랜드의 로우랜드 지방에서도 아일랜드의 영향을 받아 세 번 증류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맛도 꽤 비슷하다. 한때 우리나라 시장을 점령했던 윈저나 임페리얼, 썸싱스페셜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의 기주도 로우랜드 쪽에서 온 것이 많다. 효율적인 생산을 강조하여 두 번만 증류한 스카치위스키는 목 넘김만으로 보자면, 아이리시 위스키에 조금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의 풍미를 돋우기 위하여 훈연에 사용하는 관목(히스)으로 만든 강렬한 이탄(Peat)이 아일랜드에서는 초록빛 잔디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피트아이리시위스키조차도 스카치위스키에 비하면 풍미 또한 상대적으로 마일드하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영국 속령이던 시절, 영국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위스키의 주원료인 몰트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몰래 위스키를 만드는 길을 택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몰트 함량을 낮추어 세금을 적게 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것이 오늘날 아이리시위스키 맛이 스카치위스키와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아이리시위스키는 한 가지 몰트로만 만드는 싱글 몰트 위스키는 거의 없고, 몰트를 포함한 여러 곡물을 섞어서 증류한 팟스틸 위스키 혹은 블렌디드 아이리시위스키가 대부분이다. 맛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나는 풀향기가 나고 가벼워서 목 넘김이 좋은 아이리시위스키를 무척 좋아한다.

아일랜드의 미니어처, 아이리시 펍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그린 컬러를 패키지에 사용한 아이리시위스키, 툴라모어.
지난가을, 아이리시위스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더블린을 여행했다. 생각했던 대로 아일랜드의 자연은 아름다웠으나, 아일랜드, 특히 더블린의 사람들과 음식, 펍의 분위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활기차고 재미있는 사람들과 근사한 더블린 풍광, 쌉쌀한 기네스 맥주부터 맛있는 각종 파이와 스튜, 입맛에 잘 맞는 최고의 위스키까지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다. 과거의 가난하고 IRA 테러를 연상시키는 과격한 이미지의 아일랜드는 이제 EU에서 몇 안 되는 영어 사용국으로서 프랑스나 벨기에보다 훨씬 더 브렉시트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구글,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의 유럽 본사를 유치하면서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을 제치고 1인당 GDP 10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EU 톱클래스 국가로 올라섰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온다는 말도 있듯이 많은 면에서 여유로워진 아일랜드의 모습을 보았지만, 이번에 방문한 더블린 다운타운의 펍에서 그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속 모습을 보고 느끼며 원래 그들의 천성에 이미 여유가 자리함을 알게 되었다. 이웃한 영국과 달리 아일랜드의 펍에서는 그날 밤 옆자리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된다. 별다른 뜻 없이 옆 사람에게 한 잔씩 건네는 멋쟁이도 종종 볼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주제로도 옆자리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기본이다. 스포츠 중계방송과 바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대화할 때 목청을 높여야 하는 불편은 있지만, 아일랜드의 펍은 그 무엇보다도 아일랜드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멋진 미니어처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에서 “펍을 피해서 더블린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퍼즐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더블리너들의 인생에서 펍의 의미는 대단하다. 그들은 펍에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비즈니스를 한다. 모든 것이 펍에서 이루어진다. 참고로 모든 아이리시 펍에는 스카치위스키가 거의 없다. 조니워커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가 한두 가지 정도 있을 뿐, 싱글 몰트 스카치는 언감생심이다. 다만 같은 피를 공유한다고 믿는 미국의 버번위스키는 그래도 꽤 보인다. 미국에서도 Whisky가 아니고 Whiskey니까.

기네스와 툴라모어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성패트릭 성당.
더블린 시내에서 몇몇 증류소를 보고 난 후, 랜드마크인 기네스 맥주를 가보았다. 분명 대단한 건물도 없는, 도시 한가운데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기네스 공장터였는데 6층에 올라가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루프톱에서는 시원하게 뚫린 360도의 원형 창을 통해 더블린 시내의 모든 것이 다 보인다. 기네스맥주와 애플 시드르 한 잔을 마시며 더블린의 풍광을 음미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온 젊은 한국 친구가 혼잣말로 열심히 유튜브로 중계를 하고 있다. 젊었을 때 부지런히 움직이며 다양한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험해내는 한국 청년이 꽤 대견했다. 여하튼 이곳은 지구상에서 내가 다녀본 멋진 풍광을 꼽을 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드는 멋진 곳이었다. 더블린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기네스 공장터의 루프톱에서 기네스맥주 한 잔을 마시길 추천한다.

일정이 촉박하여 원래 계획했던 더블린 외곽의 증류소들을 모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인의 소개로 그중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툴라모어 증류소를 방문했다. 이곳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고속철도는 없지만 동그랗게 생긴 섬나라이기에 어디든 더블린에서 철도로 두세 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덜컹거리는 아이리시 레일의 기차를 타고서 툴라모어로 향했다. 틀라모어 기차역에서 단 두 팀이 내렸지만 역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는 한 대뿐이라 먼저 나간 중년 독일 남성들이 먼저 탔고, 나는 다시 돌아오는 택시를 기다려서 타고 툴라모어 증류소에 도착했다. 물론 앞 팀을 여기에서 만난 것은 당연지사. 툴라모어 역에서 택시를 탄 외국 관광객이 갈 곳은 툴라모어 증류소밖에 없지 않을까?

지인이 소개해준 툴라모어 위스키의 글로벌 앰배서더인 케빈을 만나 증류소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증류소에 딸려 있는 근사한 오센틱 바에서 진짜 아이리시커피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따뜻하고 달콤한 그 아이리시커피를 한 잔 마신 후엔 레시피도 깨끗이 잊어버렸지만, 왜 많은 사람이 아이리시커피에 열광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추운 겨울날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커피와 위스키, 그 둘을 단단히 이어주는 크림까지 완벽한 삼위일체였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지구 반대편에서 와준 위스키 순례자인 나를 환영해준 것이 고마워 조금 늦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마을 이름이기도 한 툴라모어 다운타운에 나와서 그 동네 최고의 로컬푸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아이리시 음식을 한 상 가득 먹었다. 물론 코리안스타일로 연장자인 내가 점심을 샀다. 거듭 사양하는 GDP 10만 달러의 선진국 시민에게 말이다. 언젠가 툴라모어 위스키가 한국에 진출하는 날, 케빈과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툴라모어 위스키와 고즈넉한 아일랜드 시골 투어를 마무리했다.


▎더블린 시내에 있는 아이리시 펍들. 스카치위스키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어쩌다 제일 구석에 몇 가지가 초라하게 놓여 있을 뿐.


아일랜드 그린


▎툴라모어 다운타운의 모습.
역시 아일랜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느낌은 초록색이었다. 아일랜드 그린에 대해 하나 더 이야기한다면 역시 신호등을 빼놓을 수 없다. 뉴욕주 시러큐스 티퍼러리 힐(Tipperary Hill)에 있는 한 사거리의 신호 등을 자세히 보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초록색 등이 위에 있고 붉은색 등이 아래에 있는, 이른바 업사이드다운 신호등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에 온 아이리시 이민자들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매우 높아 신호등에서도 영국을 상징하는 유니온잭에서 유래된 붉은색이 자신들의 그린컬러 위에 올라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초기 미국의 수 많은 신호등이 아이리시 이민자들의 거주지에서 많이 파괴되었다. 티퍼러리라는 지명도 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한 도시 이름이라 당연히 아이리시가 많이 거주했을 것이고, 결코 업사이드다운이 아닌 신호등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제는 아이리시 이민자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유일하게 이곳에만 업사이드다운 신호등을 세우고 아일랜드 이민자와 주로 WASP(White Angle-Saxon Protestant)로 대변되는 영국계 이민자들의 갈등을 봉합했다. 궁금한 분들은 Tipperary Hill Traffic Light로 검색해보면 업사이드다운 신호등이 그 사거리에 떡 하니 매달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각 계층 간 갈등과 증오가 여과 없이 폭발하고 정치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하고 있는데, 이런 앵글로아이리시 스타일의 조크로 현실을 좀 편하게 풀어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어떨까? 모든 일을 농담처럼 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일엔 농담이라는 양념이 반드시 들어가야 인간사의 많은 일을 멋있고 재미있게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피닉스( Phoenix ), 아이리시위스키의 부활


▎툴라모어 증류소에 붙어 있는 피닉스 문양.
아이리시위스키는 정말 멋진 물건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또 다른 버전으로 미국을 지배한 버번위스키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스카치와 견주어도 맛과 향의 스펙트럼이 넓다. 20세기 초 미국 금주법 시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아이리시위스키 산업은 몰락했고 1970년대 이후 하나둘 부활하기까지 오직 제임슨과 부시밀, 두 가지 위스키만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마저도 부시밀은 북아일랜드에 있었기에 순수한 아일랜드공화국 위스키는 제임슨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외에도 틸링, 미들턴, 퍼큘렌, 라이터스 티어스, 레드브레스트 등 많은 위스키가 새롭게 혹은 부활하여 아이리시위스키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래서 틸링과 툴라모어 등 다시 주목받고 있는 아이리시위스키는 그들의 상징으로 피닉스(Phoenix), 즉 불사조를 많이 쓴다. 이 외에도 곳곳에서 아이리시위스키 산업의 부활을 나타내는 피닉스 문양은 아일랜드 전체에서 무척 사랑받고 있다.

또 대부분의 미국 버번위스키 이름이 모두 Whisky가 아니라 Whiskey로 끝나는 것은 이들의 조상이 모두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역만리 떨어져 있고 주재료도 옥수수뿐이었기 때문에 아일랜드와는 많이 다르지만, 아이리시위스키를 만들 듯 노력했기에 나는 버번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어렴풋한 아일랜드 그린의 실루엣을 떠올린다.

맛과 향, 가성비가 좋을 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특히 선호하는 부드러운 목 넘김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춘 아이리시위스키. 이번 주말에는 근사한 아일랜드 풍광을 상상하며 아이리시위스키 한 잔을 마셔보는 건 어떨까?

※ 박병진(PJ Park)은…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202305호 (20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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