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 머나먼 땅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한반도 사람들의 자취를 볼 수 있다. 당나라 때 인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궁전벽화에 그려진 왠지 초췌해 보이는 고구려 사신들, 울란바토르에서는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 열사, 키질 석굴에서는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화가의 자취를 만났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시장에서 고려식을 판매하는 고려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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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역사 속의 한반도 인물들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러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스토리들도 가슴 뭉클했다. 한 달에 연금 100달러를 받으며 사는 박박디 마을의 할머니들, 소련이 붕괴되고 신생국 카자흐스탄의 역사 교과서를 쓴 강 게오르기 선생, 지금은 이름에 ‘스탄’이 붙은 나라들의 시장에서 인기 상품이 된 홍당무김치를 팔고 있는 고려인 아주머니들, 페르가나의 현지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로 아리랑을 연주해 우리 일행을 감동하게 했던 퇴직 음악 선생님, 당당하게 카자흐스탄 굴지의 대기업을 운영하는 신유리 대표, 자동차로 유라시아를 횡단해 북한을 거쳐 남한까지 오려 했다가 실패한 비탈리씨. 그들은 지난 30여 년간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경쟁사회를 살았던 남한 사람들보다 더 심한 격동의 세월을 보냈었다. 냉전시대 소련 내 고려인은 아르메니아인, 유태인과 더불어 소련에서 가장 잘나가는 소수민족이었다. 소련이 와해되고 여러 나라로 갈라지면서 새로 만들어진 국민국가에서 고려인이 소수민족으로 바뀌는 와중에 커다란 변화가 몰아닥쳤다. 카자흐스탄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같은 나라에서는 고려인들이 국적을 얻지 못하는 일까지 생겼다.그들을 부르는 이름도 시대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고려인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3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원래는 구소련 지역에 사는 한민족을 조선인으로 불렀는데, 남한과의 교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88올림픽 때쯤에 고려인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조선인이라고 부르면 남한 사람들이 싫어하고 한국인이라고 부르면 북한 사람들이 싫어했고, 러시아어로 한민족의 땅, 국가 전반을 ‘코야(Корея)’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려인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 말은 ‘코료사람(Корё-сарам)’, 즉 고려 사람이다.
고려인 강제 이주의 출발점, 연해주 라즈돌노예역
▎우골나야 도착 후 버스로 약 40분을 달린 끝에 라즈돌노예역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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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할 때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라즈돌노예역에서 모여서 갔다. 1937년 9월 라즈돌노예에서 모여서 갔던 17만 조선인의 후예가 지금의 50만 고려인이다. 87년 전 이 역사를 거쳐간 수많은 조선인이 지금 고려인이 되어 남한으로 일하러 오고 있다. 고려인 강제 이주는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들이 일본 스파이로 의심받아 중앙아시아로 실려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스탈린 대숙청의 광풍 속에 유태인, 독일인, 폴란드인 등 여러 다른 민족도 강제로 이주당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미개척지를 농토로 경작해 집단화하겠다는 소련의 국가계획하에 고려인 17만 명이 옮겨진 것이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시장에 가면 대숙청 시기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여러 민족의 후손들이 민족별로 특화된 상품을 파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라즈돌노예역은 한가로워 보이는 여느 러시아 시골마을의 역과 같지만, 고려인들에겐 가슴 아픈 곳이다. 1937년 연해주 일대에 살았던 17만 고려인의 강제 이주가 이곳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고려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에서 일군 터전과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인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까지는 6000여㎞. 칼바람이 몰아치는 시베리아의 9월에 고려인들은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거의 빈손으로 화물열차를 탔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원래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의 재산을 인수받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배분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부패한 소련 관료들이 현지에 도착한 고려인들에게 약속한 재산을 돌려주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척박한 땅에 물을 끌어들이고 벼농사를 지으며 치열하게 살아남았다. 먹고살기 힘들어도 자식들은 공부를 시켰다. 구소련 여러 나라에서 고려인들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교통경찰들은 적발된 고려인이 돈이 없다고 하면 믿지 않을 정도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터에는 양측에 고려인이 핵심 지휘관으로 포진해 있다. 카자흐스탄만 해도 11만 명, 인구의 0.6%에 불과한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 10대 기업 중 4개를 운영할 만큼 탄탄히 자리를 잡았다. 함경도와 연해주의 척박한 환경에서 벼농사를 개척했던 고려인의 강인한 생존 DNA가 그 성공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초원으로 쫓겨온 고려인들의 삶을 보고 싶었다. 역사 공부 모임 멤버들과 2018년에 카자흐스탄 박박디 마을을 방문했다. 박박디는 민들레라는 뜻이다. 민들레라는 이름을 택한 것은 아마 민들레같이 강인하게 살아남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소련이 와해된 1990년대 초에 배우 차인표가 출연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를 이 동네에서 찍었다. 우리 일행이 찾아뵙고 인사드리려 했던 이주 1세대 어르신 문성진씨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문성진씨는 남한에 가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는데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지금은 70~80대가 된 2세대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 할머니들은 한 달에 연금 100달러 정도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모두 얼굴이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고려말을 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썼는데, 30%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함경도 사투리가 100여 년 동안 연해주를 거쳐 중앙유라시아까지 오면서 서로 의사소통이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이 할머니들은 고려인 이주 이후에 태어난 2세대인데도 어렸을 때 토굴에서 살았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카자흐스탄의 유목민들은 양을 끌고 나가서 차 마시고 열심히 일하지 않았지만, 고려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일했다고 한다. 구소련 시절 노력영웅이 30명 정도 있었는데 인구의 1%도 안 되는 고려인이 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중앙유라시아에 수확량이 많은 쌀 재배를 성공적으로 이식한 고려인들은 1970년대부터 구소련의 도시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은 19세기 말 극심한 가뭄을 피해 함경도에서 항일운동의 본산지였던 연해주로 와서 자리 잡았다가 쫓겨났고, 중앙유라시아의 집단농장과 구소련의 도시를 거쳐 이제 남한으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가 만난 할머니들의 자식들은 벌이가 더 좋은 남한과 러시아로 일하러 갔다. 고려인들의 긴 여정에 애틋한 마음과 동질감이 들었다.
▎라즈돌노예 역사 내부 모습.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당시의 모습이 대부분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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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고려인들
▎1994~95년에 방송된 드라마 [까레이스키]를 찍었던 동네 박박디 마을. 2018년 필자 일행이 방문했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마을에서 1세대는 모두 돌아가셨고, 70~80대인 2세대 할머니들이 한적하게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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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도심지를 다니면 ‘KOREAN FOOD’라는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한류 덕분에 중앙아시아에서 한국 음식이 인기가 있지만, 고려인들은 이미 80여 년 전부터 소련에 한식을 전파해왔다. 냉전시대의 유산 때문에 한국어를 잘 못 하는 고려인이 많지만, 먹는 음식 중에는 한식이 많다. 이미 구소련권의 시장에서는 고려인들이 현지 입맛에 맞춰 만든 김치(짐치), 잡채(푼초자), 홍당무볶음(마르코프차), 국수(국시)를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구소련 전역에 ‘고려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음식을 전파해서 지금은 구소련 대부분의 국가에서 ‘고려식’을 먹을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전통시장을 가보면 고려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고려식 반찬가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려인들은 선진 벼농사법과 함께 김치, 보신탕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전파했다. 요즘 우즈벡, 카작 사람들은 보신탕도 잘 먹는다고 한다.요즘은 한국에 취업했다가 돌아온 고려인들이 도심지에 한국 음식점을 많이 개업한다. 음식 맛이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꽤 괜찮다. 전 세계 주요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도 한국 음식이 최고급 음식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 덕분에 예전보다 한국 음식점 찾기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중앙유라시아를 여행하며 만난 현지인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강 게오르기 교수였다. 우리 일행은 지난 4월에도 알마티에서 강 게오르기 교수를 비롯한 고려인 인사들과 식사를 같이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 게오르기 교수는 스스로 진주 강씨라는 것을 강조하는 고려인 3세다. 그와 그의 가족사는 한 편의 고려인 역사 축약판이다. 1991년 소련이 와해하며 탄생한 신생국 카자흐스탄에서 유일한 역사학자였고, 고려인으로서 카자흐스탄 130개 민족의 역사 교과서와 고려인의 역사를 집필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역사학계의 거장이며, 북한, 중국, 미국 등지에서 그의 책들이 번역출판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돈이 안 된다고 출판되지 못했다.
20여 년간 카자흐스탄 역사를 집필한 유일한 역사학자
▎카자흐스탄의 역사 교과서를 쓴 고려인 강 게오르기 교수를 만났다. 중앙이 강 게오르기 교수, 교수 오른쪽이 필자다. 당시 강 게오르기 교수가 집필한 카자흐스탄 역사 교과서를 선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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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은 독립 후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 아닌 독립국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고, 무엇보다 역사 교과서가 필요했다. 강 교수는 역사학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카자흐스탄에서 20여 년간 카자흐스탄의 역사를 집필했다. 역사학자로서 그는 국가주의(State Nationalism)에 대해서 매일 고민했다. 소련이 와해되고 거의 대부분 나라에서 내전이 있었다고 한다. 130개 민족이 모여서 만들어진 카자흐스탄에서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어 내전이 없었던 것은 국가와 국민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 한다. 강 교수가 이렇게 공들여 역사 교과서를 발간하자 그 발간 행사는 국가 주요 행사가 되었다.그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에 대한 한국의 지원을 아쉬워했다.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신분증 없는 고려인이 많은데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 고려인에게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37년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중앙아시아로 같이 끌려왔던 독일, 그리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카자흐스탄에 많이 살고 있지만, 아무 때나 고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도 한국에 많이 가지만, 다른 나라와 같이 열려 있지는 않다. 해외동포들은 “어떤 나라에 살아도 아무 때나 고국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또 다른 고려인 유가이 빅토르씨는 1992년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수교를 기념해서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북한을 거쳐 남한에 가려고 준비했다. 전 재산을 털어 자동차 8대를 사서 총 17대에 57명이 나눠 타고 알마티~캅차가이~띠어리쿠르간~알타이공화국~노보시비르스크~이르쿠츠크~울란우~하바롭스크를 경유해 2주간을 달려 두만강 조·중 국경에 도착했다. 북한 입국이 8월 15일이었는데 하루 늦게 도착했다고 북한에서 입국을 막았다. 2014년 그의 후배 고려인 32명은 ‘고려인 이주 150주년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으로 모스크바에서 북한을 거쳐 서울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고려인들과 그들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러일전쟁, 세계1차대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2차대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의 부상 등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에서 고려인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고려인들이 일을 찾아 한국으로 점점 더 많이 들어오고, 한국 곳곳에 고려인마을이 생기면서 오랜 시간 머나먼 땅에 떨어져 있던 고려인들과 한국인들의 삶이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다.
※ 김정웅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자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겸임교수. 30여 년간 5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의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기업 간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다가 폐업 위기를 겪었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해 전화위복을 이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레거시 장비를 전 세계에 5만 대 넘게 판매하며 서플러스글로벌을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과 2021년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Autism Expo를 개최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