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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에도 변수는 나온다디자인할 때 전제해야 할 조건은 ‘내가 디자인했지만 그것이 사용자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가정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썼다 해도 미처 몰랐던 또 다른 이슈가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설사 빈틈이 없었다 해도 사용자들이 그것을 원래 목적과 다르게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간단한 예로 차량 깜빡이가 있다. 운전을 하며 왼쪽 깜빡이를 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운전자가 왼쪽 차선으로 바꿔 주행하겠다는 신호를 주변에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당당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는 운전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 같은 수많은 변수에서 사용자 경험은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고, 그 스케일이 클수록 변수가 나올 가능성도 상승한다. 그런 만큼 디자인에서 변수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보다 이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상하지 못한 다른 차량의 갑작스러운 경로 변경에서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경고 시스템 혹은 사고를 피하게 하는 제동시스템을 운전자에게 제공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르면 물어보자디자인할 때 체면이나 자존심은 잠깐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생각과 달리 높은 확률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디자인이 만든 사람 입장에서 좋아 보인다고 해도 다수 사용자가 현재 방식에 불만이 있거나 다른 것을 원하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변수의 존재 혹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알려면 내부에서만 논의할 게 아니라 사용자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게 정답이다. 그렇기에 프로덕트 디자인 때 정식 출시 전에 수많은 내부 테스트와 사용자 베타 테스트를 실시하고, 출시 후에도 계속해서 사용자 테스트를 진행하며 검증과 개선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데이터 없이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론으로만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런 자세는 ‘궁예의 관심법’과 별반 차이가 없다.
넛지(Nudge)를 활용하자[넛지]는 리처드 H. 탈러와 캐스 R. 선스타인이 공동 저술한 책으로, 행동경제학이 바탕이다. 이 책은 정부와 기업이 어떻게 소비자 선택을 개선할 수 있는지,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행복을 향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사람들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선택 아키텍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 개념은 사용자 행동과 결정을 유도하는, 아주 미묘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지하철을 타기 전에 흔히 볼 수 있는 바닥에 그려진 발자국은 넛지식 디자인 디테일의 좋은 예시다. 지하철에 탑승할 때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서서 효과적으로 승하차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밖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양쪽 구석에 서게 유도해 효율적으로 승하차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 같은 작은 디자인 디테일은 여전히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주지만 결과적으로는 설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동을 미묘하게 바꿔 모두가 혜택을 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명동 광역버스 정류장에 필요했던 것은 대대적 구조 개선보다 약간의 넛지였을지 모른다.
※ 이상인 - 이상인 디자이너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의 미국 본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했다. 베스트셀러 『디자이너의 생각법』 시리즈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