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욱 전 농심 회장과 양인모 비즈이노 대표의 품질 혁신 시리즈 두 번째 순서를 내놓는다. 현대자동차와 두산그룹에서 일하며 국산 엔진 개발의 신화를 쌓은 이현순 전 현대차·두산 부회장을 만났다. 이 전 부회장은 3세대 품질 혁신론에 적극 동감하며 이를 제조 현장의 문화로 정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제조업의 3세대 품질 혁신을 위한 좌담회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손욱 전 농심 회장·삼성SDI 사장, 양인모 비즈이노 대표, 이현순 중앙대학교 이사장·전 현대차 부회장·전 두산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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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산업은 한 나라의 제조업을 비롯해 산업 전반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다.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만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지는 그 나라의 산업 경쟁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지표와 같다. 국내 자동차 산업은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제조업 고용의 11.5%, 생산의 12.7%, 총수출의 12.1%를 차지했다.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고용 인원은 국내 총고용의 7%를 차지할 정도다. 핵심 기간산업으로서 자동차산업의 위상을 수치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자동차산업은 제조는 물론 부품·소재, 판매·정비, 전기·전자, IT·소프트웨어, 서비스·마케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산업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경제의 중추인 셈이다.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건 끊임없는 품질 혁신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맏형 격인 자동차산업의 품질 제일주의는 이후 국내 산업계 전반에 고루 퍼져 오늘날 제조 강국 한국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초일류’ 품질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유효하다. 독일이나 일본 브랜드에 비해 소비자 신뢰성, 내구성 등에서 낮은 점수를 받는 게 현실이다.손욱 전 농심 회장·삼성SDI 사장과 양인모 비즈이노 대표가 이현순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을 만나 품질 혁신의 길을 물었다. 이 전 부회장은 현대차에서 자체 엔진 개발을 총괄한 1세대 엔지니어다. 국내 자동차엔진 개발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 후 미국 제너럴모터스(GM)에 입사해 자동차엔진을 연구하던 이 전 부회장은, 1984년 고(故) 정주영 회장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현대차에 입사했다. 1991년 마침내 독자 기술로 개발한 ‘알파엔진’은 국내 자동차업계는 물론 글로벌 업계를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 전 부회장은 이후 두산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방산 분야 엔진 개발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서 열정을 쏟고 있다.
손욱: 3세대 품질 혁신을 위한 두 번째 시리즈에 이현순 전 부회장을 모시게 돼 영광이다. 이 부회장은 산업화 초기 1세대·2세대 품질 혁신을 경험한 분이다. 자동차가 제조업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이 부회장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혁신 과정과 역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품질 혁신에 대한 의견과 방향을 묻고 싶다.
이현순: 현장에서 떠난 지 오래지만 국내 자동차산업의 품질 혁신이 뒷걸음질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했다. 오히려 내가 근무하던 시절보다 부족한 것 같다. 근본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때 의미 있는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
손: 품질 혁신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된 건 우연한 기회다. 집에 냉장고 2대를 새로 들였는데, 1년 만에 다 고장 나서 바꿨다. 왜 그럴까? 예전 제품력이 다 어디로 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던 차에 마침 양인모 대표를 만났고, 지난 10여 년 전부터 품질에 대한 열정과 전사적 노력이 다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러다 한국 산업계 전체가 추락하는 게 아닌가, 초일류라고 말만 하지 중국은 턱밑까지 와 있고, 어떤 건 우리보다 한수 위라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오늘은 가장 중요한 자동차산업에 대해 이 부회장께 조언을 듣고자 한다.
양인모: 현대차는 초기에는 미국 포드, 이후로는 일본 미쓰비시 기술을 도입해 성장했다. 특히 제조 기술과 품질 모두 미쓰비시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독자 엔진 개발에 나섰고, 이를 이 부회장께서 주도했다. 미쓰비시 회장이 현대차를 방문해 이 부회장을 만나고선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 우리가 망한다”고 했다는 일화는 업계의 전설이다.
이: 구보 토미오 회장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제로센 전투기 엔진을 설계한 최고의 엔지니어로, 이후 회장 자리까지 올랐다. 정주영 회장과도 엄청 친해서 조선소 세울 때도 많이 도와줬다. 현대차 초기에도 “우리 기술을 로열티 내고 쓰라”며 큰 도움을 줬다. 그러다 우리가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을 개발하겠다고 나서니 집요하게 방해 공작을 폈다. “독자 엔진은 턱도 없다, 너희 시스템으론 불가능하다. GM에서 이 박사 한 명 데리고 왔다는데 시간 낭비, 돈 낭비다”라며 비아냥댔다. 급기야 나를 내보내면 최신 기술을 더 싸게 준다는 제안까지 해왔다. 당시 한국 자동차산업은 독자 기술이라고 할 만한게 전무한 시절이었다. 미쓰비시에서 도면을 사오면 그대로 깎아서 만드는 것도 제대로 못 했다.
손: 삼성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작고한 이건희 회장도 일본 기업가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초기에는 그들의 품질 혁신을 그대로 가져와 배웠다. 1993년 후쿠다 다미오 삼성전자 고문이 삼성의 문제를 조목조목 분석한 보고서에서 그 유명한 ‘신경영’도 시작됐다.
이: 현대차도 마찬가지였다. 엔진, 트랜스미션, 주물까지 모든 공정에 미쓰비시에서 온 일본인 고문들이 하나씩 들어와 있었다. 못하면 큰 소리로 야단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너희가 무슨 엔진을 개발하냐, 턱도 없는 소리 말고 우리 말이나 잘 들어라”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독자 개발 의지를 꺾지 않았고 마북에 연구소까지 따로 지었다. 연구소 부지를 정 회장과 운동화 신고 돌아다니면서 돌아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양: 기술과 품질 혁신 초기에 만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내부의 관행과 저항이다. 당시 현대차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이: 맞는 말이다. 당시 현대차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미쓰비시의 수제자들이었다. 미쓰비시 방식에 완전히 매몰돼 있었다. 우리가 무슨 엔진과 자동변속기를 설계하느냐며 저항이 거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대차 임직원 중 독자적으로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정 회장과 나밖에 없었다. 기를 쓰고 시도한 끝에 1988년 자체 제작에 성공했다. 2년 동안 울산에 엔진·미션 제조공장을 지어 1991년 1월 1일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엑센트, 스쿠프에 우리가 자체 개발한 ‘알파엔진’을 처음으로 탑재했다. 세계 최초의 MPI(Multi-Point Injection) 엔진이었다.
손: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다. 독자 기술 개발이라는 건 상상을 뛰어넘는 열정이 없으면 이뤄내기 힘들다는 걸 잘 안다.
이: 인젝션 시스템에 대한 기술을 처음 개발한 곳은 독일 보쉬(BOSCH)였다. 기술 협력을 요청하려고 처음 보쉬에 가니 “우리는 벤츠, BMW와 거래하는 세계 톱클래스다. 너희 같은 삼류 회사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같이할 수 없다”며 쫓아냈다.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찾아보니 미국의 벤딕스라는 유명한 기계회사에서 같은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더라. 지프, 크라이슬러와 협업 중이었는데, 우리와 하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MPI 엔진을 내놓았다.
▎이현순 이사장은 드라마틱한 한국의 자동차엔진 국산화 뒷이야기를 풀어냈다. 최근 자동차 전장화에서 비롯된 품질 혁신 부재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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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보쉬에서 크게 놀라고 당황했겠다.
이: 무시하고 쫓아낸 놈들이 진짜 엔진을 턱 내놓은 데다, 회사까지 점점 커지니 적잖이 놀라고 긴장했던 것 같다. 나중엔 보쉬에서 편지가 오더라. “생각이 바뀌어서 협력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체 생산 중이었고 당연히 협력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당시 현대차는 미국에 엑셀 차량을 주력으로 수출했다. 1년에 25만 대 수준이었다. 엑셀 엔진에는 피드백 카브레이터 시스템이 장착돼 있었다. 연료 분사를 전자·전기적으로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이를 미쓰비시에서 납품받았는데, 문제는 그 원천기술도 보쉬가 쥐고 있었다는 거다. “기술 원류가 우리에게 있으니 해당 부품의 현대 공급을 멈추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몇 년 전 일본이 소부장 공격에 나섰던 것처럼, 보쉬가 우리 팔을 비튼 거였다.
손: 독자 기술 개발이라는 게 무엇 하나 쉬운 과정이 없다. 어떻게 해결했나.
이: 현대차도 큰일이 났다. 보쉬와 미쓰비시의 엄포가 별로 무섭진 않았지만, 6개월 정도는 지나야 기술 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다. 반년간 차를 팔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몇 달 후면 훨씬 우수한 성능을 가진 차를 미국에 수출할 수 있다는 걸 보쉬도 알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의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는지 알고 있었다. 고(故) 정세영 회장을 계속 찔러댔다고 한다. 정세영 회장은 “나는 기술자가 아니라 모르니, 이 박사와 얘기하라”며 둘러댔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하니 보쉬와 협상에 나섰다. 결국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대신 그들의 기술을 온전히 우리에게 오픈하는 등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양: 현대차의 독자 엔진 개발을 보는 글로벌 업계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이: 2003년 들어 알파, 베타, 감마까지 30여 개 엔진의 설계를 마쳤다. 당시는 독일 벤츠의 위세가 대단했다. 미국 크라이슬러까지 인수했을 정도다. 그런 벤츠가 우리 엔진 기술을 사가고 싶다고 먼저 제안하더라. 당시 자동차산업은 전륜구동이 대세로 자리 잡던 시절이다. 벤츠는 창립부터 그때까지 오로지 후륜구동만 고집했다. 전륜구동과 후륜구동은 엔진이 완전히 다르다. 전륜은 운전석 앞에 엔진을 놓아야 해서 길이가 굉장히 짧다. 후륜 엔진은 절대 실을 수가 없다. 그러니 설계 방법 자체가 다르다. 벤츠는 전륜엔진 설계 경험이 아예 없었다. 트랜스미션도 후륜은 뒤 차축까지 연결해야 하니 좁고 길다. 이에 비해 전륜 트랜스미션은 길이가 매우 짧고 통통하다. 결국 우리의 전륜구동 엔진을 벤츠에 기술지도 해줬다. 한국에서 최초로 자동차 선진국에 엔진 기술을 수출한 역사다. 트랜스미션은 기술 전수 없이 판매만 허용했다. 지금도 크라이슬러가 매년 2조원어치를 사 간다.
양: 신기술 개발이 끝나면, 양산 시 품질을 보증하는 품질 혁신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현대차는 어땠나.
이: 처음에는 미쓰비시에서 기술을 전수했으니 일본의 품질관리 기준을 배웠다. 그들의 스펙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서 팔았다. 이후 세계 최고의 엔진을 개발하자는 비전을 달성하면서 품질에 대한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0년 초부터 식스시그마를 도입하기 시작해, 임직원 교육과 전문가 양성에도 힘썼다. 품질 혁신 고도화를 위해 식스시그마 상위 버전인 DFSS(Design For Six Sigma)도 도입했다. 설계 엔지니어들이 의무적으로 DFSS를 공부하고 익히도록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가 회사를 떠나고선 품질 혁신활동의 맥이 끊어진 것 같다.
양: 미국 JD파워의 평가를 보면 현대와 토요타의 품질 수준은 큰 차이가 없는 듯 보인다. 문제는 신뢰성, 즉 내구성이다. 국내 자동차업계는 하위 구성품의 산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계를 하고, 규격에 맞지 않는 불량품을 제거해서 수출한다. 반면 토요타는 불안정한 초기 기간이 지나면 시간이 갈수록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결국 산포를 고려한 올바른 설계가 양산품의 내구성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독일에서 세계 자동차를 평가했는데, 현대가 10위에 그쳤다. 가격이나 다양한 옵션에선 10위 안에 든 항목이 많았는데, 성능 면에서 순위가 밀렸다. 실제로 3년 전쯤 다이얼 변속기의 DFSS 설계를 컨설팅한 적이 있는데, 현대차가 기존의 다쿠치 방식을 DFSS로 잘못 알고 있다는 걸 재확인했다. 다쿠치 방식으로는 올바른 공차 설계를 할 수 없다. 치수공차 개념은 있는데, 성능공차 개념은 없더라.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1998년 들어 정세영 회장이 ‘10년 10만 마일 보증’을 선언했다. 정확히는 파워트레인 보증이다 보니, 품질에 대한 로드가 온통 나한테 쏠려 엄청난 압박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품질을 올리지 않으면 돈으로 막아야 했다. 식스시그마 도입이 그즈음 이뤄진 배경이다. 부품의 내구성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DFSS를 도입하기로 했고.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출신 전문가들을 영입하며 힘을 쏟았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떠난 후 후임자는 생산에 관심이 없는 소프트웨어 전문가였다. 하드웨어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 같았다.
▎손욱 전 회장과 양인모 대표는 3세대 품질 혁신의 맥이 끊긴 한국 제조업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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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시 현대차와 삼성전자가 받아들인 DFSS는 GE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나마 현대차는 다쿠치 방식(강건설계)이라도 이어갔지만, 삼성전자는 아예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현대차 컨설팅 당시에도 올바른 DFSS 도입의 필요성을 이해한 담당 임원이 이를 확산해 추진하려고 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인해 안타깝지만 멈춰야 했다.
손: 이건희 회장이 2014년에 쓰러졌다. 그해 이 회장은 신년사에서 “앞으로 삼성은 창조, 상생, 품격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창조와 상생은 알겠는데 품격이 도대체 뭘까. 바로 초일류 품질을 의미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 회장은 품질 전문가를 키우기 위해 아예 비서실에 전담 팀을 구성할 정도로 품질 혁신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이 회장이 쓰러졌고 미래전략실도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는 통에 품질 혁신 기조가 사라져버렸다. 그때 하던 노력을 5~10년간 꾸준히 했다면 지금 삼성의 품질이 초일류에 도달했을 거다. 잃어버린 10년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현대차도 비슷하다. 특히 최근에는 자동차에 소프트웨어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 소프트웨어는 품질관리가 어려운 대표적인 영역이다. 버그를 걸러내질 못한다. 현대차뿐만 아니라 모든 자동차 회사가 소프트웨어 버그로 골머리를 앓는다. 워낙 복잡하고 방대한 데다, 분야별로 독자 개발한 걸 종합해 붙이면 거기서 또 충돌이 일어난다. 자동차업계의 큰 숙제다.
손: 삼성종합기술원장 시절에 식스시그마 도입을 추진했다. 하드웨어 개발 쪽은 굉장히 쉽게 받아들이고 금방 따라오는데, 소프트웨어 쪽은 “우린 아니다”라며 이해를 못 하더라. 버그라는 게 뭔가, 제조업으로 치면 불량 아닌가. 그런데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버그란 당연히 있는 거고, 문제가 생기면 업그레이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달랐다.
이: 자동차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제품이다. 양산 후고친다는 개념이 얼마나 위험한가. 그런데 소프트웨어 쪽 사람들은 업그레이드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손: 기술원 시절, 소프트웨어 담당 임원과 식스시그마 도입에 대해 매일 토론했는데, 잘 진척되지 못했다. 마침 GE코리아의 강석진 회장이 GE의 소프트웨어 부문에 식스시그마를 적용한 대가가 온다고 하더라. 잘됐다 싶어 기술원에 그분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었다. 비로소 소프트웨어에서 품질 혁신이 중요하다는 걸 이해하더라. 이후 나온 4세대 통신 등이 모두 소프트웨어에 품질혁신 개념을 도입해 거둔 성과다.
이: 글로벌 자동차업계가 모두 소프트웨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 일단 시장에 제품을 내놓고 문제가 생기면 고치면 된다는 식이다. 최근 주행 중 갑자기 시동이 꺼지는 경우 많은데, 정비소에 가져가 몇 날 며칠을 뜯어봐도 원인을 찾지 못한다. 기계 중심에서 전자화로 바뀌면서 말썽을 일으키는 건데, 앞으로 문제가 점점 더 커질 거라 본다.
양: 두 분 말씀대로 품질에 대한 혁신 노력이 사라진 게 근본적인 문제다. 특히 제조업은 제품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구성품의 산포 상태를 반드시 처음부터 반영해 설계해야 하는데, 우리는 LG전자 정도를 제외하면 이를 제대로 실현하는 기업이 없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이고, 제조 기술이 이 정도까지 왔는데 아직까지 설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다. 특히 전기제품은 구성품 간 교호작용이 존재해 전통적인 반응적 설계로는 처음부터 올바른 설계를 하기가 곤란하다. 자동차를 포함한 제품이 전기·전자화되면서 소프트웨어 불량이 증가하는 것도 이들 부품을 올바로 설계하지 못해 기인하는 것이 많다고 본다. 따라서 예측적 설계를 적용해 이들 부품들을 올바로 설계함으로써 소프트웨어 불량을 분리해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제가 생기면 이를 고치는 반응적 설계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제는 예측적 설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은 아직도 이런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손: 일본의 제조력에 크게 당한 미국은 모토롤라가 처음 통계적 개선 방법인 식스시그마를 개발하고, GE의 잭 웰치 회장이 이를 전사적 시그마, 나아가 DFSS로 발전시키면서 위기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웰치 회장은 마지막 재임 기간에 전사적 식스시그마를 완성해서 GE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초우량 제조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꿨다. 그 결과 1997년에 DFSS를 개발했다. 이를 처음으로 적용한 사업이 바로 의료기기다. CT 스캐너가 대표적인데, 일체의 조정 과정 없이 시장에 나오자마자 아무 문제 없이 가동됐다. 한마디로 대성공을 거뒀다. 예측적 설계, 공차를 반영한 설계를 과학적·통계적으로 해낸 덕분이다. 지금도 글로벌 헬스케어 기기의 시장점유율은 GE가 22%로 1위다. 2위인 지멘스에 비해 2배 가까운 점유율로 압도적이다.
이: 자동차가 갈수록 전장화되면서 데이터도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장에서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기 어렵다는 데 있다. 대기업이 아니면 정해진 스펙에 맞게 작업하고, 그런 데이터를 쌓는 기업이 많지 않다.
손: 이 부회장 말씀이 정확하다. AI 시대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올바른 빅데이터가 좍 깔려야 한다. 쓰레기 같은 데이터를 AI가 분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제조 부문이 올바른 식스시그마 시스템하에서 올바른 데이터를 쌓아야 한다. 원료가 좋아야 좋은 제품이 나오는 것과 같다. 지금부터라도 ‘처음부터 올바르게’라는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해야 한다. ISO9000은 한마디로 ‘노스펙 노워크(No Spec No Work)’다. 근래에는 대기업에도 품질에 올인하는 기업가가 없는 것 같다. 이건희, 정세영, 정주영, 정몽구 같은 리더가 없다.
이: 오늘날 현대차를 이 정도 반석에 올려놓은 건 정몽구 회장의 품질 제일주의가 큰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그런 리더가 아쉽다.
▎현대차가 1981년 내놓은 ‘알파엔진’. 이현순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국이 처음으로 독자 개발한 자동차 엔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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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일본도 우리와 비슷하다. 일본은 TQC(Total Quality Control)라 해서 현장 중심의 불량 개선 활동 위주다. CEO가 소홀히 하기 쉽다. 반면 미국은 1980년 대부터 TQM(Total Quality Management)으로 진화 발전시켰다. 일본이 ‘불량률 몇 퍼센트’ 개념으로 관리하는 데 비해, 미국은 매니지먼트, 즉 돈으로 환산했다. 품질비용(Quality Cost)이다. 이익과 손해가 얼마라는 게 딱딱 나오니 CEO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1997년 삼성SDI도 품질비용 개념을 도입했다. 예방비용, 평가비용, 사내실패비용, 사외실패비용 등이 구체적인 비용 항목으로 산정됐다. 실제로 1998년부터 품질비용이 줄어들자 경상이익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과학적·통계적 관리가 곧 기업의 이익과 직결된다는 걸 증명한 사례다. 그게 바로 초일류다.
이: 품질 혁신은 절대 아래서부터 이뤄지지 않는다. 리더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톱다운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한국에 와 나를 찾은 적이 있었다. 엔진 개발 과정에서 뭐가 제일 어려웠냐고 묻길래 열변형이라고 답했다. “온도편차를 80도 이내로 하려고 했는데 결국 92도밖에 안 됐다” 하니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라더라. 엔진에 온도계 240개를 박고 실제로 작동하면서 온도가 어떻게 바뀌는지 체크했다고 설명했다. 3~4년 전 시험이 끝난 엔진도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제야 “나도 제로센 전투기 엔진을 만들 때 열변형 때문에 진짜 애를 먹었다”며 “너 진짜 대단하다”고 하더라. “너 같은 엔지니어를 만나서 행복하다”고까지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구보 회장은 그날 바로 오카자키 연구소로 향했다고 한다. 퇴근 시간을 넘겨 강당에 연구소 간부 500명을 불러 모은 구보 회장은 “정신차려라, 한국에 아주 독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엄청 열심히 한다. 지금처럼 엉성하게 하면 10년 안에 그 친구에게 기술 배우는 날이 온다”고 일갈했다. 난데없는 회장의 호통에 미쓰비시 엔지니어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는데,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만에 우리의 엔진 기술을 배우러 왔다. 배운다고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울산공장과 똑같은 공장을 일본에 지어줬다. 현대차 과장급 엔지니어가 3년 넘게 일본에 머물렀다.
손: 이 부회장 같은 분은 펠로우(Fellow)가 돼야 한다. 예전에 IBM에 갔는데, 뭘 하다 막히니까 좀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서 머리 하얀 양반이 오더라. 그를 펠로우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분이 명쾌하게 문제를 풀고 가는 게 아닌가. 펠로우가 뭐냐고 물었더니, 어느 분야의 최고 장인이라고 했다. IBM은 직책과 나이에 상관없이 특정 분야의 장인을 펠로우로 임명해 대우했다. 그들의 역량을 끝까지 끌어냈다. 회사의 사업 자체보다 인류사회에 기여한다는 개념
이: 더 컸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 삼성종합기술원에 있을 때 펠로우 제도를 도입했는데, 인사팀이 워낙 빡빡하게 굴어서 잘 안 됐다. 나중엔 삼성전자에서도 도입했는데, 펠로우를 본부장도 시키고 뭣도 시키고 하더라. 그러면 안 된다. 지원은 해주되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게 해야 한다.
이: 조직의 힘이라는 게 문제가 터질 때 드러난다. 인력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가 핵심이다. 두산에 처음 왔는데, 탱크 엔진 개발을 5년 넘도록 못 하고 실패만 반복하고 있었다. 거액의 개발비만 날리고 있었다. 와서 보니 문제가 뭔지 금방 알겠더라. “설계부터 잘못됐다”고 하니 “이 설계가 독일에서 갖고 온 건데 어떻게 바꾸느냐”면서 잘못됐다 해도 믿지 않았다. 자동차엔진이나 만들던 이가 뭘 알겠느냐는 거였다. 당장 중역 5명의 사표를 받았다. 이제부터 엔진 개발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렇게 2년 만에 국산 전차와 장갑차, 중장비 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두산뿐만 아니다. 현대차에서도 처음엔 99%가 나를 사기꾼이라고 했다. GM에서 온 놈이 왕회장을 홀렸다고 수근댔다.
손: 결국은 리더십의 문제다. 엔지니어와 연구자를 대우하지 않는 문화에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어렵다. 리더가 품질과 혁신이라는 문화를 조직 구석구석까지 뿌리 깊게 내려야 한다. 이제라도 우리 기업가들이 3세대 품질 혁신에 나서야만 한다. 한국 제조업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