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전통과 문화가 담긴 독특한 증류주 아와모리, 오랫동안 아와모리를 만들어온 경험으로 완성도 높은 위스키를 선보이는 스자키 증류소를 찾아 이국적인 분위기와 일본 특유의 문화가 공존하는 오키나와로 떠났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모이는 중심가인 나하의 국제거리. 다양한 먹거리와 관광기념품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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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만에 빛을 본 우승 축하주2023년 프로야구에서 LG트윈스가 30년 만에 거둔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야구 외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한국 프로야구의 전성기인 1994년 우승 이래 30년 후의 우승인지라 관계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사연이 있을 것이 자명하지만, 그중에서 구단주인 구광모 회장의 소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선친인 구본무 회장은 1995년 1월 LG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며 직전 해의 우승팀을 물려받아 야구단에 많은 성원과 투자를 보냈으나, 아쉽게도 생전에 LG의 우승을 보지 못했다. LG로서는 30년 만에 우승한 것도 경사스러운 일이었지만, 선대 회장이 다음 우승 축하주로 미리 준비한 오키나와의 특산주인 아와모리를 드디어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큰 숙제를 해결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와모리는 그렇게 비싼 술은 아니다. 아와모리 중 3년 이상 숙성한 것을 쿠스, 즉 고주(古酒)라고 하기 때문에 그 이름만으로도 상당히 비쌀 것 같지만 대개는 비싸도 4000~5000엔을 넘지 않는다. 너무 비싼 술은 도리에 맞지 않고 너무 싼 술을 마시는 것은 위선이라 생각한 고 구본무 회장의 술에 대한 철학에 딱 들어맞는, 적당히 좋은 술인 아와모리는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좋은 선택이다. 나는 딱히 응원하는 야구팀이 없긴 하지만, 이런 연유로 LG야구팀이 우승 축하주로 그 아와모리를 기쁘게 마시고 계속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란다.
▎짧은 숙성 기간에도 완성도가 뛰어난 신자토 싱글 캐스크 위스키로 만든 하이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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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모리도 증류주이기 때문에 그냥 놓아두면 매년 일정량이 증발하는 ‘에인절스 셰어(Angel’s Share)’가 있다. 사실 에인절스 셰어는 증류소의 숙성 창고에서 위스키가 증발하는 것을 의미하니 이는 정확한 비유는 아니다. 바텐더가 사장 몰래 한잔 마시는 것을 포함해서 자연 증발이 아닌 어떤 이유로든 술이 사라진다면 스코틀랜드에선 이를 ‘데블스 셰어(Devil’s Share)’라고 부른다. 아무튼 그 아와모리가 하릴없이 LG의 우승을 기다리며 구단 사무실에서 20여 년간 방치되었고, 구단에서 LG의 우승이 다가온다고 느끼면서 조금씩 그 양을 보충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보다 에인절스 셰어 수치가 높아 위스키 생산이 힘들다는 우리나라의 연평균 증발량은 5~8% 정도이니, 수학적으로 보자면 공비가 0.95~0.92인 무한등비급수가 되겠다. 이 정도라면 계산은 안 해봤지만 20년으로만 잡아도 남은 술이 절반 이하가 될 것은 확실하니 이를 보충하느라 구단 프런트가 무척 바빴을 것이다.
오키나와 최고의 특산물, 아와모리
▎위스키를 수입하는 수입사 사장인 지인과 함께 방문한 오키나와 위스키 페스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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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의 현청 소재지는 오키나와시가 아니라 과거 류큐국의 수도가 있었던 나하시이다.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72년까지 미군이 주둔하며 전략적으로 일본에서 분리하여 류큐국으로 다시 독립시키려 했다. 마치 미국의 신탁통치령처럼 취급되어 일본인들도 여권을 가지고 방문해야 했던, 사실상 외국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덕을 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고, 각종 사건 사고로 인하여 해방군으로 인식했던 미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며 오키나와는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귀속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오키나와에서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일본 경제발전의 덕을 좀 볼 것으로 기대했지만 여전히 일본 최하위의 재정 자립도를 보여주는 오키나와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나하시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모이는 중심가가 있다. 인터내셔널 스트리트, 즉 고쿠사이도리(국제거리)로 불리는 이곳은 다양한 먹거리와 관광기념품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오키나와 특산품인 눈같이 희고 부드러운 설염(雪鹽)이나 우미부도(바다 포도), 시콰사 감귤,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에서 유래된 갖가지 스팸 굿즈 등을 구경하며 삼매경에 빠지다 보면 결국 한나절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기 일쑤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오키나와 특산물은 당연히 아와모리인데, 내가 국제거리에서 본 것 중 가장 신기한 것이 하브주라는 뱀술이다. 처음엔 그 이름만으로 무슨 허브가 들어간 술이겠거니 했는데 오키나와 특산 반시뱀이란 살모사가 들어 있는 아와모리의 일종이고, 신기한 제품이라 국제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하브주를 만날 수 있다. 하브주는 대개 이런 류의 다른 술과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좋다고 소개되어 많이 팔린다고 한다. 효능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에 관한 국제협약’에 따라 이를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니 꼭 필요한 분들은 차라리 드시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혐오하는 술이긴 하지만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니 굳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것이니 싫으면 그저 나만 마시지 않으면 된다. 참고로 병 속에 뱀이 들어 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병입할 때, 뱀을 넣지 않는 하브주도 있으니 꼭 필요한 분들은 이것을 추천한다.
보통 아와모리 소주라고 부르지만 이는 사실 틀린 이름이다. 왜냐하면 아와모리는 소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아와모리주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마치 버번위스키, 역전 앞처럼 동의어 반복이기 때문에 아와모리는 그저 아와모리로 불러야 한다. 오키나와, 즉 과거의 류큐 왕국은 일본 본토보다도 타이완이 더 가까운 나라이다. 따라서 아와모리의 주재료는 일본 소주의 주재료로 쓰이는 쌀, 고구마, 보리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흔한 장립종 인디카 쌀이다. 흔히 안남미로 불리우는 이 쌀로 태국, 타이완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도 비슷한 증류주를 만든다. 일본소주협회에서는 아와모리도 일본 소주의 카테고리로 편입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하지만 아와모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오키나와 사람들은 아와모리는 그냥 아와모리일 뿐, 소주가 아니라며 그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지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아와모리 소주’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창업자부터 7대에 걸쳐 대대로 아와모리를 만들고 있는 스자키 증류소의 아와모리 증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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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모리가 아닌 일본의 다른 소주들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희석식과 전통 증류식 등 두 가지로 나뉜다. 재미있는 것은 희석식 소주가 일본 정부의 등록 순서상 앞에 있어서 이를 갑류 소주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전통 증류식 소주의 이름은 을류 소주가 되어버렸다. 도수도 훨씬 높고 단식 증류를 하여 생산비도 훨씬 많이 드는 을류 소주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이름이 아닌가? 특히 같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도 갑과 을이란 개념을 잘 인지하고 있듯이, 그들도 ‘을소주’라니 마뜩잖다. 그래서 ‘을소주’는 이후 강력히 대응해 ‘본격소주’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어냈다. 마트나 주류숍 매대에 본격소주가 있다면 믿고 선택해도 좋다. 그리고 나름 시원한 을의 복수이니 세상의 모든 을이여, 단결하라. 이루어낼 것이다!
7대를 이어온 스자키 증류소
▎심심한 돼지고기와 생선을 위주로 만들어 고도주인 아와모리와 위스키에 곁들이기에 제격인 오키나와 전통 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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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에서 유래한 시가(詩歌)가 류카이다. 우리의 전통 시조처럼 짧지만, 마치 판소리처럼 샤미센 반주에 맞추어 가사와 운율을 즐기는 단가이다. 작년에 우연히 류카라는 이름의 싱글 몰트위스키를 맛볼 기회가 생겼다. 분명 오키나와 위스키라고 쓰여 있는데도 셰리향과 다크초콜릿을 씹는 듯한 맛과 질감이 느껴지는 준수한 맛의 위스키라 깜짝 놀랐다. 그때 이 위스키를 수입하는 수입사 사장인 지인이 이왕이면 곧 있을 오키나와 위스키 페스티벌에 함께 참석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길래 두말 않고 냉큼 동의했다.얼마 후 나는 인천에서 나하로 가는 아침 첫 비행기에 올라 난생처음 가보는 오키나와의 바다와 사람, 위스키를 상상하고 있었다. 곧바로 오키나와 하버 뷰 호텔의 행사장에 도착하니, 얼마 전 가나자와 위스키 페스타에서 본 낯익은 얼굴도 몇몇 보여 한결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나는 일본어를 거의 못 해 행사장에서는 같이 간 일본 유학파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둘러보았지만, 최근 일본 위스키 산업에 들어온 젊은 세대들은 영어도 잘하는 편이라 큰 어려움 없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좋은 위스키가 있다면 굳이 말이 필요 없기에 우리는 모두 위스키란 공통어로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계속된 시음으로 파장이 가까워지는 늦은 오후가 되면 그야말로 우리의 언어는 모두 위스키가 된다.이튿날 업계 관계자인 지인 덕분에 바로 그 류카 위스키를 만드는 스자키 증류소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나하에서 북쪽으로 1시간쯤 떨어진 오키나와시에 있는 신자토 주조의 증류소이다. 신자토(新里)는 대대로 아와모리를 만들어온 창업자의 성(姓)인데 오키나와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이다. 지금 사장은 7대 사장(7代目, 나나다이메)인데, 6대 사장이었던 형의 아들들이 같이 일하고 있다. 언젠가 이들이 삼촌의 뒤를 이어 8대 사장이 될 것이다. 가족기업이 많은 일본에서도 산다이메(3代目) 혹은 욘다이메 (4代目) 정도는 흔히 보이지만, 7대까지 내려오는 기업은 그리 흔치 않다. 하지만 최근 인구통계학적으로도 확연히 줄어가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 그들이 주류(酒類) 소비시장으로 진입하는 비율도 과거보다 떨어졌다. 설혹 이 시장에 들어오더라도 아와모리를 비롯한 전통주를 선호하지 않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만들려면 그들도 변신을 해야 했다. 그래서 신자토에서도 위스키 생산을 결정하고 아와모리를 만드는 증류소 내에 이탈리아에서 도입한 구리 증류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오랫동안 증류주인 아와모리를 만들어온 경험으로 첫 제품부터 완성도 높은 위스키를 내놓았기에 나는 계속해서 그다음 제품에도 큰 기대를 가져본다.
증류소를 둘러본 후 7대 사장의 초대로 스자키 주조의 사무실에서 몇 가지 신제품 위스키를 시음했는데, 그중 싱글 캐스크 제품들은 숙성 기간이 짧은데도 완성도가 매우 뛰어났다. 에인절스 셰어가 높아 고숙성을 못하니 위스키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아열대기후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캐스크의 조합으로 맛을 연출해낸 데는 역시 지나온 역사가 큰 힘이 된 듯하다. 내가 그들의 오래된 가족사에 관심을 보이니, 지금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미래의 사장이 보여줄 것이 있다며 일과를 마친 후 인근에 있는 초기 생산 공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공장터 바로 옆에 살림집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선대 사장의 부인, 즉 그의 어머니가 아직 살고 있는 집이다.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집의 외관과 꾸밈새를 스쳐 지나가며 말 없이도 그의 자부심을 살짝 엿볼 수 있어 근본 있는 가족기업임을 실감했다. 또 7대를 내려오는 가족기업의 힘을 느꼈다. 이날 저녁을 대접받았는데 자사 제품을 모두 갖춘, 근처의 오키나와 음식점으로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 하이볼부터 시작해서 아와모리와 위스키까지, 신자토의 전 제품에 대해 버티컬 테이스팅을 하면서 각각에 어울리는 다양한 오키나와 음식을 같이 맛볼 수 있었다. 일본 본토의 달고 자극적인 화려한 음식과 달리, 이곳은 나름대로 조금 멋을 부렸지만 그저 수수한 외양의 심심한 돼지고기와 생선을 위주로 한 음식들이라 내게는 외려 잘 맞았다. 특히 고도주인 아와모리와 위스키에 곁들이기엔 육류 위주의 이곳 음식이 잘 맞았다.
▎스자키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오키나와 싱글 몰트위스키인 류카 위스키가 오크통에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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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 일본 위스키는 공급자 시장이라, 공급을 부탁하러 온 우리는 굳이 갑을로 따지자면 을일 텐데도 이렇게 최고의 환대를 해주어 무척 감사했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덕목을 넘어서서 이제는 갑과 을이 모두 함께하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며 오키나와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요즘 좀 뒤처져 있는 LG트윈스 야구단도 더는 구단의 프런트에서 아와모리의 무한 등비급수를 계산하지 않도록 애써주기를 바란다. 다른 구단들도 좀 더 우승의 집념을 불태우기 위해서 이참에 미리 각 구단의 컬러에 맞는 우승 축하주를 준비하면 어떨까? 그중에서도 소주와 맥주 브랜드 둘 다 가지고 있는 롯데는 좀 고민이 크겠지만, 다른 구단들도 이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주면 좋겠다. 한국 프로야구 파이팅!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