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진다면 

최근 인기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는 매회 서로 다른 등장인물이 다음의 대사를 독백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이 질문의 정답은 뭘까?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공식 포스터. / 사진:넷플릭스 공식 사이트
이 질문은 아일랜드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의 주장에서 따와 조금 고친 것이라고 한다. 버클리는 극단적 경험론, 즉 실체 혹은 존재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실체/존재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 철학에 따르면 아무도 없는 숲에서 큰 나무가 쓰러질 때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극단적 경험론자들은 세상에 물질적인 것은 없고, 오직 정신적인 사건과 그것을 지각하는 사고방식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물질이 많기에 극단적 경험론은 틀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넷플릭스가 2024년 8월에 공개한 대한민국의 미스터리/스릴러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제작자들에게 극단적 경험론을 펼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쓰러진 나무’는 ‘발생한 어떤 사건’의 은유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 사건과 관련된 극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 사건을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 속 관련자들을 생각해보자는 메시지가 읽히는 수작이다. 이런 메시지가 읽히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맥락에서 볼 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졌다면 쿵 소리는 난 것이다.

다른 상황, 다른 맥락의 드라마에서는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나의 아저씨]는 대조적 상황과 대사를 보여준다. [나의 아저씨]는 2018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로,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극찬했다. 이 드라마에서 A가 어떤 일로 상처받았음을 B가 알았다. A는 고(故) 이선균이 분했던 아저씨 박동훈이었다. 박동훈은 가수 아이유(이지은)가 분했던 B에게 모르는 척하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내뱉는다.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 쓰러지는 나무에 박동훈의 상처를 비유하면, 박동훈은 그 숲속에 아무도 없길 바란 셈이다. [나의 아저씨]의 맥락에서 볼 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면 쿵 소리는 나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 제작자들은 ‘어른’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통해 박동훈이 기막힌 상황에 달관한 듯한 분위기를 연결한다.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갤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갤 거라고.” 세상에는 자신만 아는 상처를 사람들에게 알려서 위로받고 싶은 이가 더 많겠지만 자신에게조차 그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나를 버리면 내 안의 어둠은 갤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버려서 마음속 슬픔을 지울 수 있다는 제안은 효과가 있을 거고, 그래서 모종의 지혜일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주인공도 처음에는 그런 전략을 취했다. 애써 무시하고, 본 것 같았지만, 보지 않은 척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마음을 다잡았다. 주인공의 이런 태도를 뒷받침하는 듯한 노래가 이 드라마의 벽두부터 들린다. “당신이 옆에 없어서 사랑이 없어. 당신의 사랑이 이 오래된 동네를 밝혔어. 이제 당신은 떠났고 태양도 더는 빛나지 않아. 당신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게 변하고 있어.” 1974년에 발매된 바비 블랜드의 앨범 [Dreamer] 중 첫 번째 트랙에 수록된 곡 “Ain’t No Love In The Heart Of The City”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이의 심적 경험이 물질적 실체로서의 태양의 빛조차 압도한다. 누구나 다 안다. 작사가가 매우 시적인 가사 속에서 많이 오버했다는 것을.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는 드라마의 메시지와 별개로, 상술한 질문과 관련해서 생각할 거리가 있다. 파워 블로거이자 언론인인 민노씨는 위 질문을 과학적 논쟁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며(슬로우뉴스, 죄와 벌, 그 상처의 가청 범위: 본격 부동산 스릴러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2024) 가능한 논쟁을 제시한다. 논쟁의 한 축에는 소리가 났다는 주장이 있고, 다른 한 축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소리가 났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소리는 어떤 물체의 운동으로 인해 공기 중에 생기는 진동이다.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서 나무 주위의 공기가 진동했을 테니) 소리는 났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소리는 가청기관이 있는 생물에 상대적으로 의존하는 개념이다. (숲속에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어떤 사람도 없었으니)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리가 났다는 주장을 본질주의(객관주의)로 명명할 수 있다. 이것은, 소리는 객관적 실체로서 그 자체로 존재하며 어떤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주장은 구성주의로 명명할 수 있다. 이것은, 소리는 객관적 실체인 공기의 진동을 소리로 받아들이는 귀와 뇌를 가진 생명이 귀와 뇌를 사용해 무언가 들리는 어떤 것으로 구성해간다는 견해다(민노씨, 위의 글). 필자가 보기에 이 두 주장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숲속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귀와 뇌를 포함한 청각기관을 가진 동물이 없기는 어렵다. 작은 개구리조차 귀와 뇌가 있으니 나무가 쓰러지면서 발생하는 공기의 진동을 어떤 식으로든 들을 것이다(어떤 개구리는 고막이 없고 대신 혀를 고막으로 이용해 소리를 듣는다). 개구리나 고양이나 새가 뭔가를 듣는 것은 분명하다. 나무가 쓰러질 때 그 생명들에게 소리는 났다. 동물들의 귀와 뇌에서 일어나는 - 고막이 진동하고 뇌 속 청각피질이 발화하는 것 같은 - 물리적 사건들을 확인한 과학자들에게는 그 사건들이 동물들이 소리를 들었다는 증거다. 그 사건들의 결과로 동물들이 의식하는 혹은 심적으로 표상하는 것이 ‘콩’ 소리인지 ‘컹’ 소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그 동물들이 어떻게 듣는지, 인간처럼 ‘쿵’으로 듣는지, ‘콩’이나 ‘컹’ 등 소리 비슷한 거로 듣는지는 현재의 과학자들도 모른다.

사실 인간 개체가 저마다 어떻게 듣는지도 과학자들은 모른다. 우리가 보통 관습적으로 ‘쿵’이라는 의성어를 쓰지만, 나무가 쓰러질 때 우리가 듣는 소리를 ‘쿵’이라는 의성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쿵’이라는 의성어를 쓴다. ‘쿵’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용어일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른 의성어를 쓸 것이다. 닭 울음소리를 한국에서는 ‘꼬끼오’로 표현하고 미국에서는 ‘쿠카두들드’로 표현하는 것처럼.

사람은 물론 개구리나 새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들은 들을까? 나무에는 귀와 뇌가 없다. 나무에 클래식을, 특히 바흐의 음악을 들려주면 나무가 좋아하고 잘 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든 식물학자가 그런 이야기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귀와 뇌가 없는 식물이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기억한다는 연구는 있다. 이탈리아 식물학자 만쿠소와 작가인 비올라에 따르면 식물의 뿌리는 진동에 따라 음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지 멀어질지를 결정한다(스테파노 만쿠소 & 알렉산드라 비올라, 매혹하는 식물의 뇌, 행성비, 2016). 숲은 나무들로 가득한 곳이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어떤 나무가 쓰러질 때 다른 나무들은 그 진동을 그들 방식대로 지각할 것이다. 나무들의 그 지각이 ‘쿵’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이상을 고려하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라는 질문에서 정답은 하나다. 쿵 소리는 안 났다. ‘쿵’이라는 의성어 자체가 인간을 전제로 한 것이니 인간이 없다면 ‘쿵’ 소리는 안 난 것이다. 고양이나 새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콩’ 혹은 ‘킁’ 소리는 났을 것이다. 귀가 없는 식물들만 있었다면 ‘쿵’ 소리는 물론 ‘콩’ 혹은 ‘킁’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식물들 고유의 어떤 지각과 반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인간에게 ‘쿵’ 소리인 것이 고양이나 새에게는 ‘킁’ 소리라면,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알아내야 한다. ‘쿵’과 ‘킁’은 서로 다른 동물의 마음 현상이고, 마음 현상을 다루는 학문은 심리학, 특히 현상학이다. 마음 현상을 낳은 그 동물의 뇌 상태도 연구해야 한다. 하나의 나무가 숲속에서 쓰러질 때 종이 다른 동물들은 다르게 듣는다. 이 차이를 현상학과 뇌과학으로 연구하면 될 것이다. 논쟁이 나올 여지가 없어 보인다. 논쟁은 같은 학문 분야에서 일어나는 것이 좋다. 현 상황에서, 현상학자와 물리학자는 논쟁하기 어렵다. 현상학은 공기의 진동이나 신경세포의 발화와 같은 물리적 사건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사건에 관심을 덜 두고, 그런 사건들이 초래/유발한 마음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연구한다. ‘쿵’이라는 단어가 쓰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초대받은 이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현상학자다.

인간도, 고양이도, 식물도, 그 어떤 생명체도 없었을 시기에 우주가 크게 폭발한 적이 있다. 물리학자들이 ‘빅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빅뱅 당시에 분명 어떤 물질들의 엄청난 진동이 있었다. 그 진동이 낸 무언가는 ‘콩’도 아니고 ‘쿵’도 아닐 것이다. 그 진동을 ‘콩’이나 ‘쿵’으로 들으려면 그렇게 듣게 하는 기제를 가진 청각기관과 그 기관을 장착한 생명이 있어야 하겠지만, 빅뱅 당시에 그런 생명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라는 질문을 “어떤 생명도 없는 우주공간에서 물질의 진동이 일어났다. 쿵이든 컹이든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쿵이나 컹과 같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가 정답이다.

그런데 빅뱅 당시는 물론이고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137억 년 동안 우주에는 생명보다 물질이 훨씬 많았을 것이고, 그 물질들은 나무가 쓰러지듯이 늘 어떤 에너지를 발생시켜 전달해왔다. 137억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재나 레빈과 같은 물리학자들은 빅뱅 당시의 ‘소리’를 찾아 나섰다. 재나 레빈은 우주가 사운드트랙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찾아낸 빅뱅이라는 진동의 흔적이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변환된다면 우리는 아무도 없었던 우주 초기에 발생했던 어떤 진동이 내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혹시, 그것은 ‘쿵’이 아니라 ‘퉁’이 아닐까? ‘텅’일까? ‘지지직’일까? 아니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소리일까?

※ 김진호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410호 (202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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