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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평 LG 사이언스파크 대표-최고의 기술, 최초의 장르 

 

노유선 기자
지난 2021년 LG 사이언스파크 수장이 된 박일평 대표는 파나소닉과 삼성전자, 하만, LG전자 등을 거친 ‘기술통’이다. 박 대표는 “세계 최고의 기술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기술 ‘장르’에 도전해야 한다”며 “LG 계열사의 시너지와 혁신 문화, 혁신 환경이 융합된다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 혁신의 최전선에 있는 LG 사이언스파크를 찾았다.

▎박일평 LG 사이언스파크 대표는 “실패를 오히려 축하하는 혁신 문화가 LG 사이언스파크에도 뿌리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요 5개국(한국, 미국, EU, 일본, 중국)의 기술 수준을 평가한 결과 한국이 중국에 뒤처진다는 분석이 나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핵심 기술 136개를 선정해 2년마다 5개국의 기술 수준과 격차를 평가한다. 올 초 과기정통부가 내놓은 ‘2022년도 기술수준평가 결과’에 따르면 미국, EU, 일본, 중국, 한국 순으로 기술 수준이 높았다. 중국이 한국을 제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의 기술 역량을 최전선에서 책임지는 LG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10월 17일 서울 마곡에서 박일평(61) LG 사이언스파크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미국 뉴욕공과대학 컴퓨터공학과 교수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인텔리전트 컴퓨팅 랩장(長), 하만 CTO(최고기술책임자), LG전자 CTO(사장) 등을 역임한 ‘기술통’이다. 그는 “자동차와 TV, 로켓 등을 개별적인 기술 ‘장르’라고 부른다”며 “한국은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지만 세계 최초의 장르를 내놓은 적은 없다”고 답했다. 더는 패스트 팔로워에 머물지 말고 세상에 없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 2018년 세계 최초의 장르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곳이 ‘LG 사이언스파크’다. LG그룹의 R&D(연구개발) 허브를 표방하는 이곳에서 LG그룹의 전자, 통신, 화학 계열의 8개사가 머리를 맞대고 신기술과 신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2021년부터 LG 사이언스파크를 이끌고 있는 박 대표는 이곳을 “매우 유니크한 혁신의 장”이라며 “국내 최대 R&D 단지이기도 하지만 여러 분야가 경계를 허물고 융복합적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 취임 5주년을 맞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그룹의 신성장동력이자 미래 먹거리로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한 LG 사이언스파크의 임무와 ABC 외 추진 중인 신사업 등을 박 대표에게 물었다.

전략 방향 ABC와 플러스 알파


▎박일평 LG 사이언스파크 대표는 “최고의 인재들이 오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 대표는 취임 후 LG 사이언스파크의 연례행사로 마련한 ‘슈퍼스타트데이’와 ‘LG 스파크’ 등이 가장 보람 있다고 했다. 슈퍼스타트데이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 50여 곳이 각자의 기술을 선보이는 자리다. 박 대표는 “많은 스타트업이 LG 사이언스파크를 테스트베드로 삼아 기술검증(PoC)을 거쳐 업그레이드한다”며 “LG 구성원 2만5000여 명이 스타트업 생태계 강화에 기여하는 중”이라고 강조했다. LG 스파크는 LG 구성원과 산학 인재, 외부 파트너사, 스타트업, 소상공인, 지역 주민 등이 참여하는 문화·혁신·예술 축제다.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인 ‘그랜드 퀘스트(Grand Quest)’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위원들이 난제를 해결하고 게임체인저로 성장하기 위해 기획됐다. 지난 8월 진행된 ‘LG 스파크 2024’에서는 ‘물을 사용하지 않는 세탁기’를 논의해 화제였다.

‘물 없는 세탁기’ 등 독특한 아이디어가 오갔다.

이 외에도 ‘당뇨·비만 관리를 위한 채혈 없는 혈당 측정기술’ 등 난제를 두고 토론이 진행됐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계열사 한 곳이 단독으로 소화할 수 없다. 여러 계열사가 협업해 융복합 R&D 시너지를 내야만 한다. 현재 LG전자에서 고민 중인 물 없는 세탁기는 친환경 세탁기로 각광받을 전망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물 없는 환경에 적합한 신개념 세제다. LG화학 등 여러 계열사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물 없는 세탁기는 물을 절약하고 세탁 폐수를 배출하지 않으며 이산화탄소 발생량도 줄여 미래의 혁신적인 제품이 될 것이다.

LG의 전략 방향 ABC는 순항 중인가.

LG그룹의 신성장동력인 ABC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이 가장 큰 화두이다. LG AI연구원이 개발한 초거대 AI 모델과 딥러닝 모델 등은 이미 LG의 많은 계열사에 확산돼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면역 치료제와 암 치료제를 비롯한 세포 치료제 기술을 기반으로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클린테크 분야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바이오 소재를 활용한 친환경 플라스틱과 건식 공법을 적용한 차세대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 친환경 냉난방 기술 ‘히트펌프’ 등이 대표적이다.

ABC 외 미래 먹거리로는 무엇이 있는가.

새로운 미래성장동력을 촉진·발굴하는 활동인 NBT(Next Big Thing)도 LG의 혁신성에 기여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마련된 R&D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하는 일과 아직 착수하지 않은 신사업을 찾는 작업이다. 최근엔 하늘을 나는 택시인 UAM(도심항공교통)과 애그리-푸드테크, 탈중앙화 시스템인 웹3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특히 한동안 전 세계적으로 화제였던 웹3는 물론 거품도 껴 있지만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향후 웹3 시대가 오면 오늘날 활용되는 많은 인프라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이때 LG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어떤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탐색 중이다.

요즘엔 로보틱스와 우주항공산업이 활황인데.

LG의 사업포트폴리오에는 우주항공 관련 분야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하리란 전망은 알기 때문에 탐색 수준에서 살펴보고 있다. 로보틱스 분야는 상당히 진전했다. 경남 창원에 있는 LG 스마트 팩토리 ‘LG 스마트파크’는 AGV(무인운반차량, Automated Guided Vehicles)와 공중 물류 시스템, AI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 등을 기반으로 다품종 맞춤 생산 자동화에 성공했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화학 등 계열사 8곳의 시너지는 어떠한가.

LG그룹은 시너지를 발판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창업 초반 화장품을 만든 이후 화장품을 담기 위한 용기를 개발했다. 이때 플라스틱을 도입하면서 화학 사업을 시작했다. 또 국내 최초로 진공 라디오를 선보일 때는 플라스틱으로 형체를 만들고 전자 사업을 본격화했다. 기업의 역사 전반에 협업에 따른 시너지가 녹아 있다. 앞으로도 각 계열사의 역량과 첨단 기술이 융복합되면서 더 혁신적인 제품이 탄생하리라 본다. 이러한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LG 사이언스파크가 있는 것이다.

LG 기술협의회 의장으로도 활약 중이다.

2020년부터 LG그룹의 기술협의회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매달 각 계열사의 CTO와 연구소장들이 모여 그룹의 R&D 포트폴리오를 공유·논의한다. 미래 신기술·신사업을 위한 R&D에도 ‘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야 계열사 간 중복되는 아이템을 발견하고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 또 그룹 외부에도 기술네트워크 협의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중이다. 글로벌한 역량을 갖춘 리더들과 뜻을 모아 ‘이노베이션 카운슬(Innovation Council)’을 구성했다. 국내외 리더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머리를 맞대 기술 현안을 논의하는 장이다. 최근에는 휴머노이드 로보틱스를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했다.

실패를 오히려 축하하는 혁신 문화

박 대표는 지난 4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전기차 학술대회·전시회’에서 기조연설을 맡았다. 앞서 글로벌 1위 전장(자동차 전자장비)·음향 장비 전문기업 하만에서 CTO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날 그는 “전기차 분야에서 LG는 배터리와 파워트레인, 충전기, 객실 솔루션, 콘텐트 플랫폼 등 다양한 역량을 보유했다”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능을 모두 결합해 토털 전기차 솔루션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토털 솔루션이 LG의 강점으로 보인다.

전기차뿐 아니라 TV 등 가전제품 분야에서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합친 토털 솔루션에 방점이 찍혀 있다. 만약 고객이 타사 디바이스(스마트TV 등)를 사용 중일 경우 LG전자의 소프트웨어를 접목할 수 있도록 ‘웹OS(webOS)’라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개발했다. 또 제품의 주요 기능을 무료로 업그레이드하는 ‘업가전(UP 가전)’을 마련했다. 업가전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해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가전제품 라인이다.

이 외에도 LG가 타사와 구분되는 강점은 고객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고객 인사이트가 깊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태생부터 융복합 시너지로 성장해온 LG그룹은 다양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고객 접점이 많다. LG는 여러 영역에서 고객 데이터를 확보·분석해 양질의 데이터를 마련하고 통합적인 고객 인사이트를 구축했다. 이로써 선제적으로 고객 니즈를 파악해 제품과 서비스를 개선할 수 있다.

LG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지난 10월 13일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의 화성 탐사선 스타십(Starship)이 우주를 향해 발사된 후 7분 만에 다시 발사 지점으로 돌아왔다. 알다시피 스페이스X는 지난해부터 네 차례 스타십의 지구궤도 시험 비행을 시도했지만 로켓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다섯 번째 시도 만에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실패했을 때 스페이스X 직원들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본 적 있나. 그들의 표정에서 실패한 사람의 절망감과 실망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이번 시도에서 얻은 데이터 덕분에 다음 번 시도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서로를 축하했다. 실패를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도전을 독려하는 분위기를 보며 ‘우리가 본받을 게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가운데 이러한 혁신 문화가 갖춰져 있다면 기술 수준에서 앞설 수밖에 없다. LG도 더 빠르고 치열하게 도전하는 등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

LG 사이언스파크의 목표는 무엇인가.

최고의 인재들이 오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자 가장 혁신적인 연구단지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혁신이란 인재가 많다고 이뤄지지는 않는다. 혁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인재들이 활약할 수 있다. LG 사이언스파크에 혁신 환경과 혁신 문화가 녹아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힘쓸 것이다. 혹자는 ‘열과 성을 다해 직원을 교육했는데 그 직원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약간 달리하면 된다.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로 직원이 회사에 남아 있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이지 않겠나.

내년에는 어떤 분야에 주력할 계획인가.

현재 LG 사이언스파크에는 22개 연구동이 들어서 있다. 내년에 2단계 공사가 마무리되면 4개 동이 추가된다. 공간이 늘어났으니 새로운 인력이 수천 명 정도 들어올 것이다. 비로소 LG 사이언스파크라는 캠퍼스가 완성되는 셈이다. 이런 시기인 만큼 현재 추진 중인 프로젝트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길 바란다. 이를 위해 실무 현장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각 분야 연구위원들의 교류를 활성화하도록 기술분과를 설치할 계획이다. 교류를 체계화하면 임팩트 있는 혁신 기술과 수많은 게임체인저가 탄생하리라 전망한다.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김상선 기자

202411호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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