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끗희끗 잔설이 눈에 띄는 어느 초봄. ‘코리아 라이스 위스키’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본류를 찾아 떠난 특별한 여정.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 끝에 도착한 스마트브루어리. 충북 청주에 있는 지역 특산주 양조장으로 지난해 본관 뒤 확장된 부지에 증류소를 신축했다. |
|
충주의 남한강 변에는 신립 장군의 최후로 유명한 탄금대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남한강과 합류한 작은 사행천이 하나 있는데,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탄금대까지 이어진 이 강은 그 물이 달다고 하여 감천 혹은 달천으로 불린다. 초봄의 서늘한 향기가 콧등을 스치는 어느 봄날, 나는 한국 위스키 혹은 한국 소주의 본류를 찾아가는 특별한 여정으로 이 구불구불한 달천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간 적이 있다. 아직도 희끗희끗 잔설이 눈에 띄는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니 달천의 미앤더(meander)가 막 시작되는 속리산 초입에 도착했다. 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멀리 언덕 아래에 목적지인 증류소가 눈에 띄었다. 지난겨울의 흔적이 선명한 언덕 아래엔 달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작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지난 몇 년간 꽤 화제였던 증류식 소주인 마한을 생산하는 스마트브루어리 증류소이다.생각보다는 아담한 크기의 증류소라 생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증류소가 아니었다. 막 들어선 실내엔 건물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회의실만 덜렁 있었다. 은은한 전통주와 증류주 특유의 알싸한 알코올 향이 풍기는 것을 보니 분명히 증류소가 맞기는 한데, 어디서도 증류 설비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그저 전시장과 강의실로 사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나중에 이 증류소의 창업자인 오세용 대표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에서 초기 몇 년간 증류주를 생산했다고 한다. 작년에 이 건물의 뒤쪽에 증류소를 크게 신축하고 생산설비를 모두 이전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뒷문을 열고 나와도 증류소가 보이지 않는다. 뒷마당 한가운데엔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한껏 가지를 벌리고 우뚝 서 있을 뿐이다. 마치 여느 시골 동네 초입에 들어설 때 반겨주는 마을 수호신처럼 잘생기고 큰 나무였다.
스마트브루어리에 들어서다
▎본관 뒷마당 한가운데에는 가지를 한껏 벌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
|
창업자인 오 대표는 사업을 시작하기 몇 년 전, 이왕 시작하는 증류주 사업을 고향인 청주 근처에서 하려고 증류소를 지을 땅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좀 쓸 만한 땅이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공장을 지을 수 없었다. 보호구역이 아닌 곳은 대한민국 여느 지방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난개발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도무지 증류소의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곳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다가 발견한 땅이 바로 이곳이었고 마침 건물이 신축 중이었다고 한다. 우연찮게 알게 된 이 땅의 주인은 마침 오 대표의 고등학교 후배였고, 그 인연으로 원래는 다른 용도로 짓고 있던 이 건물을 임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에 증류소를 확장하게 되면서 그 뒤쪽 땅까지 모두 그 후배에게 매입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고교 동문의 힘, 더구나 비평준화 지역의 고교 동문의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아무튼 그렇게 확장된 부지의 뒷마당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먼저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더 위쪽을 보니 이제야 커다란 창고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에서 살아온 내 공간 감각으로는 도저히 같은 공간이라 느껴지지 않을 법한 거리여서 나는 꿈에도 이 건물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앞의 자그마한 본관 건물과는 도무지 비례가 맞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큰 건물이 뜬금없이 덩그러니 언덕 위에 서 있는 셈이다. 내가 듣기엔 분명히 직원 없이 대표 혼자서 모든 생산과 운영, 판매를 하는 작은 증류소라고 했는데, 그러기엔 터무니없이 큰 건물이다. 그제서야 왜 이곳의 이름이 ‘스마트브루어리’인지 느낌이 왔다. 글로벌 반도체 회사의 사장 출신인 그가 만든 이 공간은 증류주 생산에 관한 한 그 자신만의 논리와 기술로 온전히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만의 스마트한 공장인 셈이다.
내부로 들어서니 오늘은 증류를 하지 않아 아주 가까이에서 발효조와 증류기 등 모든 생산설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모든 설비가 단정하고 깨끗하게 관리된 것을 보니 굳이 설명을 다 듣지 않더라도 어떻게 술이 만들어지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본 듯 생생하게 모든 것이 연상되었다. 특히 한 개에 무려 150만원을 주고 포르투갈에서 수입했다는 오크통을 자랑하는 증류소 대표의 사자후가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동시에 증류 사업이 얼마나 자본집약적인 산업인지를 느끼며 그 경쟁의 신산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오크통이 빼곡히 쌓여 있다. |
|
증류소의 북쪽 외벽 바깥쪽에는 커다란 수영장이 하나 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의 멋진 집들에 있을 법한 꽤 큰 수영장이다. 아직은 물을 채워놓지 않았지만, 한여름에 달천을 바라보며 수영하다가 이곳의 하이볼이라도 한잔 마신다면 그 또한 즐거울 것 같다. 수영장과 증류소 사이의 경계벽엔 뜬금없이 재미있는 벽화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벽화는 마치 동화처럼 부드러운 터치로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술과 그 원료인 지역 특산품들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자칫 건조할 수 있는 증류소 환경에 확실한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뭔가 유머가 더해졌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도 농담 한마디의 여유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전에 스코틀랜드에 갔을 때 스프링뱅크 증류소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도 다른 스코틀랜드 증류소처럼 몰트를 훈연하기 위해 피트를 증류소 건물 밖에 가득 쌓아두고 있다. 그날 나도 증류소 투어를 하며 이곳을 지나갔는데, 그 피트 무더기에 사람 손이 몇 개 삐죽 솟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손 모형이었지만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이런 위트도 삶에 여유가 있어야 나오는 것이니 이제는 먹고살 만해진 우리나라도 여러 분야에서 이렇게 불쑥 유머 하나로 삶의 여유를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문명의 시작이자 중심, 증류주
▎강렬한 맛과 향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 마한 소주. |
|
“문명은 증류에서부터 시작된다(Civilization Begins with Distillation).” 내가 좋아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글귀이다. 원래 모든 술(시작은 발효주일 것이다.)은 먹고 남는 잉여 농산물이 있어야 생산이 가능한 문화상품이다.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문화이고 그 문화의 시작점은 바로 술이 아닌가? 하물며 이를 다시 증류해서 만든 증류주는 당연히 고도화된 문명의 시작이고 중심일 것이다.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은 삼한이다. 78개 소국으로 구성된 삼한 중 가장 큰 강역을 가진 마한은 그중 54개국을 거느리고 낙랑군과 대방군과도 교류해온 삼한의 중심이었다. 각기 12개 소국을 거느린 진한과 변한도 마한에서 갈라져 나갔으니 마한은 삼한, 즉 한반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바로 이 마한의 중심인 청주에서 출발한 이곳의 대표 상품은 마한 소주이다. 이 소주 자체도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를 오크통에서 숙성한 마한 오크는 처음 마셨을 때의 강렬한 맛과 향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더욱이 알코올 46도와 52도의 힘까지 곁들여졌으니, 왜 마한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그의 의도를 알 것 같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 코리아 라이스 위스키를 만들어가는 길은 그래서 험난한 시작이다. 국내법으로는 소주일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안착하게 하는 것은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될 수 없지만, 또 그 한 사람이 없다면 되지 않을 일이다. 지난해 찾았던 일본 신도증류소의 데자뷔가 떠오른다. 그들은 분명 소주이지만 소주가 아니고, 분명 위스키이지만 위스키가 아닌, 그 두 가지 모두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비애를 새로운 카테고리로 만들어 극복했다. 마한도 같은 길을 밟아나갈 것이다. 진심으로 마한 오크가 더 나은 길을 가게 되기를 바란다. 전통 누룩, 증류 방식, 발효 시간 등에 대한 집착 없이 창의적인 ‘Out of Box’ 사고로 접근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마한은 분명 사랑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이 멈추는 순간 평가는 냉정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현재진행형인 마한의 도전을 멀리서 응원하며 함께하는 그의 딸과 힘을 합쳐 대를 이어 한국의 훌륭한 위스키 가문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전국에서 모인 다양한 전통 증류주. |
|
아직 소년 같은 오 대표의 꿈은 소박하다. 조만간 우리 손으로 키운 보리로 만든 국산 맥아로 진짜 코리안 위스키와 쌀 위스키를 모두 만들어보는 것. 그 이전에는 지금의 마한 쌀 위스키에 세계의 다양한 증류주 원액을 더하여 세상 모든 원액의 조합으로 맛의 스펙트럼을 극대화해보는 것이다. 또한 오크통에 집착한 마니아답게 가장 가까운 그의 꿈은 한국 증류주만을 위한 쿠퍼리지를 만들어 오크통을 함께 생산하고 나누어 쓰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도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로는 품질이 미치지 않음에도 애국심에 호소하는 식의 판매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다양한 한국 위스키를 기대하는 마니아로서 그의 꿈을 응원하며 기분 좋게 그 꿈에 푹 빠져드는 하루가 되었다. 달콤한 물이라는 증류소 앞 달천의 물로 이름처럼 달고 향기로운 코리아 라이스 위스키를 기대해본다.

▎증류소 창업자인 오세용 대표가 직접 창업 스토리부터 증류소 이곳저곳을 소개해주었다. 전통주 업계에서는 생소한 인물인 오 대표는 삼성전자 부사장과 SK하이닉스 사장을 거친 반도체 업계 전문가이기도 하다. |
|
어느 초봄 주말의 오후에 아직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아들과 함께 왕복 여섯 시간을 달려 한국 라이스 위스키의 시작을 만나보았다.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한 여섯 시간의 드라이브도 멋졌지만, 나보다도 아들이 더 많이 느끼고 배운 것 같아 조금 더 행복해졌다. 점심으로 선택한 청주의 명물 버섯전골은 좋았지만, 돌아가는 운전 때문에 술 한잔을 못 해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오늘은 그 버섯전골의 맛을 떠올리며 아껴둔 마한 오크 52도로 거장의 향기를 느껴보련다.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위스키, 스틸 영>의 저자로 포브스와 동아일보에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 ‘박병진의 광화문살롱’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 살롱’의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현재 요리, 여행 사람들의 이야기를 펴내는 출판사 ‘북스 레브쿠헨’ 대표와 어린이 창의력 플랫폼인 ‘테일트리 코리아’의 대표이사로서 유쾌한 N잡러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