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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우가 만난 예술계 파워리더(37) 이애리 한국화가 

작품에 담은 다행다복(多幸多福) 

정소나 기자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순간, 익숙하지만 낯선 감각을 선사한다. 이애리 작가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꽈리를 소재로 장지 위에 자신만의 이야기부터 많은 사람의 행운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까지 꾹꾹 담아내고 있다.

▎이애리 작가는 꽈리를 소재 삼아 한국화의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화는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제한된 재료들을 사용해 단조롭고 반복적인 작업을 긴 시간에 걸쳐 완성해나가는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정승우 이사장이 만난 이달의 아티스트 이애리 작가는 한국화의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동양화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꽈리 작가’로 알려진 이 작가는 독일 갤러리 클로즈(Galerie Klose) 전속 작가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며 국내외에서 큰 호응과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장지 위에 한국화 재료만 사용해 얇고 가는 선으로 모양과 크기가 다양한 꽈리의 변주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필로 그은 부드럽고 흐트러짐 없는 수많은 선은 쉼 없이 이어지며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애리 작가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건국대, 연세대, 목원대, 협성대, 숙명여대 등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지금은 숙명여대 미술대학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 안양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일본, 중국, 베트남, 서울 등지에서 초대 개인전 78회를 열었으며 단체전 800여 회에 참여했다. 아트두바이, 아트마이애미, 홍콩아트센트럴, KIAF, 아트부산, 화랑미술제 등 수많은 국내외 대표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제33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심사위원선정 특별예술가상, 제10회 한국미술정예작가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및 입선 2회 등 다수의 수상과 심사 경력이 있다. 저서로는 2015년에 출간한 "지금 한국의 화가를 만나다"가 있으며, 매거진 Q에 매달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는 ‘The Story’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조명, 스탠드, 소파 등과 컬래버레이션해 독창적인 실용예술을 선보였다.
한국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선화예술고등학교에서 다양한 미술을 배우던 중 하얀 화선지에 수묵이 번지는 모습을 보며 마치 마음을 치유해주는 듯한 신비한 경험을 했다. 향긋한 먹 향과 붓의 섬세함에 매료되어 한국화를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다.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거치며 한국화의 전통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와 변화로 확장성을 도모했다.

한국의 ‘쿠사마 야요이’라고 불리는데.

현대미술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와 비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물방울무늬 호박 오브제를 시그니처로 다양한 표현과 뛰어난 마케팅을 펼쳐나가는 모습은 롤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다. 나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가 그를 넘어서는 작가가 되고 싶다.

작품마다 꽈리가 등장한다. 꽈리가 무엇인가.

꽈리는 성공과 사랑, 부와 다복을 상징하는 행운의 심볼이다. 꽈리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흰색 꽃이 피고 지면서 작은 주머니 모양의 열매가 생긴다. 초록색 열매는 서서히 주황색으로 변해 시각적으로 아름답다. 예로부터 꽈리의 모습과 연관하여 다양한 상징적인 의미가 전해진다. 먼저 복주머니를 닮아 부와 복을 상징하고, 초롱불을 닮은 등초롱 모양으로 어둠을 밝힌다는 의미로 길상과 성공을 상징한다. 씨앗을 감싸고 있는 꽈리 형상이 마치 아기를 품은 엄마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사랑, 다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꽈리의 꽃과 열매, 잎, 뿌리 모두 현재 약재로 활용될 만큼 인간에게 아주 유익한 식물이다.

꽈리 작업 이전부터 둥근 열매나 씨앗을 소재로 작업했는데, 어느 날 눈에 들어온 주황색 꽈리는 새롭고 신선했다. 꽈리에 담긴 좋은 기운을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하고 싶었다.


▎시그니처인 주묵뿐 아니라 녹색의 전통 안료를 사용한 작업으로 더욱 풍부한 색채와 미감을 담은 ‘Good Luck in 꽈리’ 시리즈.
작품 제목인 ‘Good Luck’처럼 ‘운’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사실 처음에는 꽈리의 예쁜 모습에 반했다. 뒤늦게 알게 된 다양한 의미에 공감하며 많은 이야기를 표현하게 되었다. 나 또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꽈리를 그리면서 거짓말처럼 좋은 일들이 생기고 위안이 됐다.

꽈리 작품 덕분에 좋은 일들이 생겼다는 미담이 전해지면서 행복해하는 분이 많아졌다. 꽈리가 소소한 작은 열매가 아니라 오감을 충족하는 행운의 상징이 된 것이다. 꽈리를 통해 좋은 기운이 생기고, 보는 이들이 공감하는 꽈리 도상은 삶의 순환이 대자연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작은 열매에서 큰 우주를 보는 것이다.

주로 장지에 주묵, 수성안료, 구아슈로 작업한다. 재료별 특징이 궁금하다.

한국화의 주재료를 기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한다. 그중 주재료인 주묵은 주홍색을 띠는 천연 안료로, 순도 높은 주사 원석을 분쇄한 가루에 아교를 혼합한 것이다. 돌의 색에 따라 밝은 주황, 짙은 주홍색으로 구분되며, 색이 투명하고 발색도 좋다.

수성안료는 채묵액, 채액이라고 하며, 천연 광물과 석채를 액상화해 채색의 꽈리를 그릴 때 사용한다.


▎광명국제무역센터의 공공조형물로 재탄생한 ‘Good Luck in 꽈리’.
구아슈(gouache)는 수채 구아슈와 아크릴 구아슈 2가지 종류가 있다. 수채 구아슈는 수채물감에 비해 투명도가 낮고 마르면서 색이 진해진다는 특징이 있다. 아크릴 구아슈는 아크릴물감과 구아슈의 특성을 합친 불투명 물감이다. 구아슈는 주로 배경을 칠할 때만 사용한다.

붓 대신 나무젓가락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익숙한 붓 대신 나뭇가지를 이용해 드로잉을 했다. 결과물이 흥미로워 다양한 실험 끝에 나무젓가락 끝부분을 깎아서 주묵을 찍어 가느다란 선으로 꽈리의 선을 표현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 작업 속도가 더뎌지곤 했다. 지금은 만년필이나 그와 비슷한 펜촉을 사용해 안료액을 주입해서 사용한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내 작업에 특화된 도구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조각작품과 생활용품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을 꾀하고 있는데.

오늘날 현대미술은 시각예술과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분야로 확장되어 복합적인 양상을 보인다. 여러 분야가 뒤섞이며 서로 융합되어 종합예술화되고 있다.

나 역시 기본 회화를 중심으로 한국 최초 전기자동차 CEVO와 협업하고 공공조형물, 조각, 가구와 조명, 세라믹 제품 등 다양한 기업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 중이다. 또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장승효 작가와 미디어아트 컬래버를 선보이기도 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와 조각이 공유하는 지점, 즉 3차원적인 것을 지워야 회화의 현대성이 달성된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회화의 본질은 평면에 있다’고 말한 그린버그는 회화의 평면성을 중시하면서 예술은 외부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형식주의 미술론을 주장했다.

회화 속 원근법, 명암 등 3차원적 요소와 극사실적인 구상주의 예술을 비판하며 완벽한 회화의 순수성을 원했다. 평면 위에서 추상적인 작업을 하는 내게는 이러한 이론이 근간이 된다.

하지만 시대적인 특성과 다양성 면에서 보면 편협하고 협소한 관점이 있다. 21세기 현대미술은 미술을 접하는 관람객 개인의 개성과 정서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형식을 중요시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작품으로 표현하면, 대중은 그것을 이해하고 교감하며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순수한 회화의 평면성은 변함없는 진리이고, 형식성과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다양성은 필수인 것 같다.


▎정승우 이사장과 이애리 작가가 한국화의 다양성과 확장성, 세계화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작가로서 특히 보람을 느꼈거나 힘들었던 순간은.

어릴 적 시작해 50대 후반까지 쉬지 않고 회화 작업을 이어왔고 국내외에서 인정받아 보람을 느낀다. 또 28년간 후학을 양성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제자들이 자랑스럽다.

어느 때부터인지 잠도 못 자고 하루 10시간 이상 매일 작업하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심하고 흐트러짐 없는 선의 집합으로 표현하는 작업의 특성상 수행의 길을 가고 있다. 몸은 고되지만 행복하게 작업에 임한다.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시작한 작업은 아니지만, 많은 분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작품을 좋아해주시셔서 고맙다. 나머지 시간도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형식과 내용 면에서 충실한 연구를 이어가겠다.

여러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장처가 있다면.

롯데호텔을 꼽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롯데호텔 제주 로비에 100호 크기의 그림이 걸려 있다. 또 롯데호텔 서울 신관 이그제티브타워 스위트룸에 실크스크린 판화가, 럭셔리 라운지 르 살롱에 원화 2점이 걸려 있다. 호텔에 방문한 사람들이 내 그림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어 보낼 때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지금껏 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쳐왔다. 제자 중에서 요즘 눈여겨보는 후배 작가가 있나.

팝아트 감성의 재미있는 작품으로 젊은 층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제니박 작가가 인상적이다. 또 아직 학부생이지만, 지난해 ‘브리즈 아트페어’에서 최연소 나이로 브리즈 프라이즈상을 수상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한의도 작가의 작품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한국화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한국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도 높아졌다.

이런 시기를 기회 삼아 우리만의 정서와 특징을 잘 살린 한국화가 해외에 더 많이 소개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 2023년 독일의 갤러리 클로즈 전속 작가가 된 후 해외 전시가 많아졌다. 익숙한 한국화 재료를 사용하지만 현대적인 표현 방식으로 차별화해 미국과 독일, 유럽 등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LA 아트쇼, 아트 마이애미, 아트 두바이, 룩셈부르크 아트위크 등 해외 유명 아트페어에서도 주목받으며 솔드아웃을 기록하기도 했다.

오는 5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초대전과 각종 아트페어에 참가해 한국화의 위상을 계속해서 알리려 한다. 한국화의 부흥은 해외뿐 아니라 한국에서 먼저 활발하게 지속돼야 한다.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다변화 속에서 다소 침체되고 소외되었던 한국화가 앞으로 세계를 멋지게 활보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 정승우 -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 동 대학원(법학 석사, 법학 박사) 졸업 후 2011년 공익재단법인 유중문화재단과 복합문화공간인 유중아트센터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504호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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