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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만난 명문가 사람들 l 영문학자 나영균] 고모 나혜석의 추억… 그 쓸쓸한 DNA 스민 듯 

“한집안 다섯 여자 梨大 영문과 출신… 시대 앞선 아버지 지적 분위기 그립다” 

서울의 경복궁 옆 신교동 거리에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떨어져 뒹군다. 은행나무 잎을 밟으며 영문학자 나영균 선생의 집 앞을 지난다. 근대를 풍미했던 역사적 인물들이 숱하게 이 길을 걸어 저 집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새삼 오고 가는 세월을 바라보는 감회가 새롭다. 올해 일흔일곱인 나영균 선생은 이 집에서 60년 넘게 살고 있다. “건축학을 전공한 박수경 씨가 지은 집을 아버지가 1942년에 사셨는데 이사 오기 전에 대대적으로 수리했어요. 그때 수리를 맡은 이가 자유당 때 국무총리를 지낸 이기붕 씨였대요.부인인 박마리아 씨가 어머니와 개성 호수돈여고 동창이었거든요. 어찌나 튼튼하게 기초를 했는지 6·25 때 포탄이 떨어졌는데도 끄떡없었지요. …일제 강점기에는 미국 유학생을 도무지 알아주지 않았거든요. 거의 밑바닥 생활을 한 거나 다름없는데 이기붕 씨도 미국유학을 했으니 일거리가 없어 공사 감독 같은 일도 맡아 했던 모양이에요.” 집안으로 들어서면 이야기는 더 많아진다. 집은 낡았으나 나무냄새 은은하고, 오랜 세월 쌓인 가족사가 유현(幽玄)한 향취로 감돈다. 왕가에서 흘러나온, 대원군과 조 대비가 쓰던 자개장들이 있고, 손자가 어릴 때 그린 그림과 동생인 화가 나희균의 그림과 본인의 붓글씨가 군데군데 걸렸다. 문간에 있는 8조 방은 여간첩으로 알려진 김수임이 미군들과 춤을 추던 곳이고, 복도 안에 깊숙이 숨은 방은 고모 나혜석이 집에 오면 아버지를 피해 숨어 있던 방이다. 춘원 이광수는 집 앞 계단길을 걸어 인왕산을 등산한 뒤 하산길에 꼭 집에 들러 아버지 나경석과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는 했다. “해방이 되자 미군이 서울로 들어와 지프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막다른 골목인 우리집 앞까지 오는 일도 많았어요. 하루는 미군 장교가 우리집 대문을 두드려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더니 마침 집에 와 있던 혜석 고모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어요. 고모는 “이 집에 피아노가 있느냐? 있으면 하룻밤 피아노와 피아노방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고 통역해 줬어요. 온통 망가진 모습의 고모가 그런 어학 능력을 갖춘 것을 알고 놀랐던 것이 기억나요.” 그 후 미군장교들은 피아노방에서 하루 저녁 노래하고 춤추는 파티를 벌였다. 그때 장교들과 즐겁게 춤을 추던 한국여인이 바로 이화여전 출신의 김수임이었고, 소녀 나영균은 문 뒤에 서서 처음 보는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나영균(羅英均) 1929년 1월1일 서울 출생 1949년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 1975년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 1960~1994년 2월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1992~1995년 현대소설학회장 1993년 6월 ~1995년 5월 한국영어영문학회장 現 이화여대 명예교수, 1994년 2월 국민훈장 모란장 저서 : <댈러웨이부인>(역, 정음사 1962) <헨리5세>(역, 정음사 1964) <콘라드 연구>(이대출판사 1978)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황소자리 2004) 등 다수
“이 앞 효자동 거리에 이강국이라는 문패가 붙은 한옥이 있었거든요. 김수임이 이강국을 만나러 이 동네를 지나다 우리집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에요.” 나영균이 고모 나혜석을 처음 본 것은 만주 봉천에서 서울로 온 지 얼마 안 된 1941년쯤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동네 아이들이 떼를 지어 어떤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입을 벌린 채 덜덜 떠는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할머니가 아버지의 친동생이라는 걸 알고는 더욱 놀랐지요. 고모가 그렇게 찾아오면 어머니는 우선 고모를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속옷을 갈아입혔어요. 그리고는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골방에 숨겼지요. 아버지는 고모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화를 냈고, 그래서 마주치면 벼락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고모를 숨길 수밖에 없었거든요.” 당시 화가 나혜석은 집안의 수치였다. 그러나 오늘날 혜석은 나경석보다 더한 명성을 얻어 나씨 집안의 자랑이 됐으니 세상의 잣대가 새삼 무상하다. 1920년대 이미 고모부 김우영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세계일주를 했으며 파리에 머물러 그림공부를 했던 고모였다. 신교동 집에는 나혜석의 원고가 50cm 넘게 쌓여 있었고, 그림도 여러 점 있었다. <나부>라는 제목의 누드는 어머니가 벽에 걸면 창피하다고 다락에 숨겨뒀다. 그러나 6·25 때 피난에서 돌아오니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생각할수록 아까워요. 그때 내가 철이 좀 들었더라면 집에 온 고모와 이야기를 했을 텐데…. 턱과 손을 떠는 고모가 무섭기만 해서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마지못해 그 일만 하고는 달아났으니….” 나영균의 아버지 나경석은 수원에서 태어나 봉담면 분천리에서 자랐다. 분천은 80여 호의 자그마한 마을로 수원 나씨 집성촌이었다. 증조부 나영완은 호조참판을 지냈고, 셋째아들인 조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냈다. 수원에서 분천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갈 만큼 부자라 동네 사람들은 이 집을 나부잣집 혹은 참판댁이라고 불렀다. 고모인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에 대한 추억 조부는 맏아들을 큰집으로 양자 보내고 둘째 경석을 외아들로 키웠다. 여자 형제로는 손윗누이 계석과 누이동생 혜석·지석이 있었다. 조부는 아들 경석을 일본으로, 혜석과 지석은 서울 진명학교로 각각 유학보냈다. 당시 일본유학은 대부분 문과 아니면 법과였으나 나경석이 택한 것은 공과였다. 적성의 문제도 있었지만 나라가 발전하려면 공업기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영균은 나중에 집안 이야기를 책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으로 펴내면서 아버지가 유학갔던 일본의 학교들을 찾아다녔다. 맨 처음 아버지가 입학했던 정측영어학원(이곳은 이광수·최남선·신익희·장덕수가 모두 거쳐간 학교였다)과 도쿄(東京)공업대학의 교무과에 들러 학생 명단과 앨범을 뒤져보기도 했다. “이때 아버지는 일본문화를 따라가야 한다는 초조감과 나라를 위해 뭐든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모양이에요. 아버지의 독서는 문학·철학·종교·정치·고고학·역사를 가리지 않아 광범하고 산만했어요. 열한두 살 때부터 나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의미도 모르면서 여러 책을 골라 읽었어요. 무의식중에 아버지의 지적 수준을 따라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거지요.” 사회주의는 20세기 초 서구로부터 도입된 새로운 사상이었다. 많은 젊은이가 이상적 이념으로 그것을 신봉했고 나경석도 일본에서 오스기 사카에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에 몰두한다. 그가 나중에 벌인 물산장려운동이나 소비조합운동도 노동자 계급이 주동이 되어 자본주의 제도를 타파하고 노동조합을 단위로 한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사회주의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학지광(學之光)>에 빈번히 시국담과 신변잡기를 기고했다. <학지광>은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만들었던 잡지로 이광수·장덕수·최승만·최승구·최린·최남선과 나중에 오빠를 따라 유학온 나혜석이 번갈아 글을 쓰고 있었다. 나경석은 딸에게는 유학이 필요 없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진명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동생 혜석을 도쿄로 데리고 갔다. 나경석은 동생의 친구인 허영숙에게도 일본유학을 권했다. 그는 형제 중에서 재기발랄한 혜석을 가장 사랑했다. 혜석은 일본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고, 시원한 눈매에 깨끗한 용모로 유학생 사이에서 큰 인기였다. 같은 시기 춘원도 도쿄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나경석은 그를 천재라고 부르며 찬양했다. 여동생도 춘원을 알게 됐음은 물론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라는 책에 보면 춘원이 고모에게 청혼했으나 아버지가 반대해 성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춘원이 기혼자였다는 것이 이유라고 하나 아버지 또한 조혼으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후일 중혼한 점으로 보면 그 얘기는 신빙성이 없고 두 사람 사이에 그만한 감정의 고양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춘원은 혜석의 친구로 여자의전에 다니던 허영숙과 소문난 연애 끝에 결혼하고, 혜석은 최승구라는 게이오(慶應)대학 학생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요절하고 만다. 혜석이 춘원과 결혼했다면? 춘원 또한 젊은 날 북으로 끌려갔으니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개인의 운명은 시대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나라 잃은 지식인 청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불운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그 시대 인간들의 행동과 생각을 만들어 갔고, 그들 인간이 또한 역사를 만들어 간 것이다. 후일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신혼여행지를 일찍 죽은 옛 애인 최승구의 무덤으로 해야 한다는 파격적 제안을 한다. 김우영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최승구의 묘지 참배는 물론 비석까지 세워 주는 관대함을 보인다. 나혜석이 결혼하면서 내세운 세 가지 조건은 당시 사회를 뒤흔드는 관심사였고, 신문잡지는 다투어 나혜석 부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느라 바빴다. 나중에 조카 나영균도 결혼할 때 남편에게 비슷한 제안을 한다. “살림살이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게 해 주시오. 시댁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오.” “나씨 집안 여자들의 내림이군요” 했더니 나영균 선생은 “그러네요” 하고 웃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빠는 중앙학교에서 화학과 물리를, 여동생은 정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 그러나 몇 년 후 3·1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나경석은 인쇄된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주 지린(吉林)으로 가지고 가 연해주 일대의 교포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는다. 그러면서 총기 10정을 숨겨 돌아오다 일경에 발각돼 체포된다. “어려서 아버지가 총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다 붙들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담담하고 간단했어요. 형무소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과장하지도 않고, 그런 행동을 자랑하는 기색도 없었고….” 총기 지참 탓으로 나경석은 죄목이 사상범 아닌 살인강도범으로 기록된다. 나혜석도 이화학당 기숙사 지하실에서 3월1일에 할 일을 논의하다 검거돼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받는다.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나경석은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으로 두루 일경에 쫓기는 몸이 돼 만주로 피난한다. 사실상은 친구인 송진우·김성수가 중역으로 있던 <동아일보> 러시아 특파원 노릇을 했다. 본국에 시베리아 동포의 생활상을 전하는 글을 써 송고하고 처지를 한탄하는 칼럼을 썼다. ‘시베리아 동포의 살아갈 길’이라는, 노동자·농민의 단결을 주장하는 글을 연재도 했다. 그러다 총독부가 자신의 신상서류 일체를 소각했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로 돌아온다. 열정적인 그는 귀국할 때 ‘해삼위 학생음악단’을 조직해 교포학생 여남은 명을 데리고 왔다. 서울에서 벌인 음악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러시아풍의 민요와 춤이 한국에서 공연되기는 아마 그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다시 나영균의 말. “이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배숙경)를 만나지요. 어머니는 호수돈여고를 졸업하고 개성 정화여학교에서 가르치다 할아버지가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인사동에 있는 동아부인상회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대요. 상점 지배인이 <상록수>를 쓴 소설가 심훈의 형이어서 어머니는 거기 자주 들르는 용모 수려하고 성품이 온화한 심훈 선생에게 호감을 가졌었나봐요.” 소녀 나영균은 어머니가 가끔 심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 상점은 지식인의 출입이 잦은 곳이었다. 시베리아에서 갓 돌아온 나경석은 거기서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미적 센스가 빼어난 한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다. 그들은 곧 결혼하지만 결혼 후 남편은 시베리아로 돌아가고 아내는 도쿄로 유학을 떠나 일본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한다. 남편에게는 조혼한 본처가 있어서 시댁에서 이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나영균은 1929년 만주 봉천에서 태어난다. 당시 아버지 나경석은 봉천에서 고무공장을 하고 있었다. 주로 노동자를 위한 고무장화와 ‘지카다비’라고 불리는 작업화를 만들었다. 처음 나경석은 봉천에서 만천공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무렵 일본유학을 갔던 어머니가 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와 살림을 합하고 언니 현균이 태어난다. 현균은 총명하고 어여뻤으나 어려서 장결핵으로 죽는다. “나는 미간이 넓고 퉁퉁해 멍청해 보이는 아이였으나 언니 현균은 이름 그대로 현(賢)을 구현해 놓은 아이였다는데….” 자상하고 멋쟁이였던 어머니 자랑스러워 만천공사는 너른 만주벌판을 개간하는 사업을 했다. 동양척식회사에서 고액의 융자를 얻어 만주의 광활한 유휴지를 개간해 땅 없는 농민에게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영남과 평안도의 농가 20여 가구를 이주시켜 토지를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한 아버지는 이번에는 삼창고무공장으로 업종을 바꾼다. 비록 혁명은 포기했으나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 도움을 주는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실천적 지식인의 행로였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우리 교포 직공이 60~70명이나 됐다. “아버지의 공장은 장삿속으로 하는 돈벌이 장소 같지 않았어요. 10대의 남녀 직공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이사로 있던 직업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고, 그들이 모두 교복을 입고 있어 공장이 마치 학교 같았거든요.” 고무공장에는 최승만이 지배인으로 있었다. 그는 도쿄 시절 나혜석의 애인이었던 최승구의 종형이었다. 3·1운동에도 가담하고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중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하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그려넣은 사건으로 직장을 쫓겨난 이였다. 아버지는 알게 모르게 애국운동을 하다 곤경에 빠진 이들을 수시로 도왔다. 만주의 추위는 혹독했다. 겨울이면 도로가 두께 30cm의 얼음으로 뒤덮였다. 목욕시설이 없어 공중탕에 갔는데 갈 때마다 어린 영균은 백계 러시아인과 일본 게이샤들을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지켜봤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영하 25도의 날씨에도 반소매 여름 원피스 위에 모피 외투만 입었고 게이샤들은 허리에 수도 없이 동여맨 끈을 풀어냈어요.” 영균과 동생 희균은 일본인이 많이 살던 말끔한 신시가지에 있는 가모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만주에는 동사자들이 많았다. 학교 가는 길에 청소부가 갈퀴로 끌어올리는 동사자를 매일같이 봤다. 얼어 죽은 사람은 웬일인지 모두 발가벗은 채였고 갈퀴로 끌어올리면 댕그렁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사회주의자 아내답지 않은 멋쟁이였다. 스웨터를 짜더라도 노란 바탕에 웅크린 검은 고양이가 가슴판 가득 그려지는 식이었고 임기응변의 재치가 있어 젓갈이 없어도 연어를 사다 끓여 맛있는 김칫국물을 만들어 격찬을 받았다. “개성의 부잣집 따님이던 어머니는 우리를 가끔 바이칼이라고 하는 러시아 과자점에 데리고 가 아이스크림과 빵을 사주셨어요. 그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나는 평생 다시 먹어보지 못했죠. 팔찌 같은 과자와 큐피드 모양의 캔디도 있었는데….” 당시 일본 여자들은 일본옷을, 한국 여자들은 한복을 입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어머니는 러시아 여자가 하는 양복집에서 양복을 맞추어 입었다. 대담하게 단발을 하고 본격적인 양복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즐겨 신어 어디서나 눈에 띄는 멋쟁이였다. 어머니가 가봉하러 가는 데 따라가면 러시아 여인이 핀을 입에 가득 물고 어머니를 이리저리 돌려세웠다. 그럴 때 어린 영균은 어머니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의 멋은 다분히 아버지의 여성미에 대한 감각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놓아둔 채 다른 여자들과 몰려다녔대요. 나중에 숙명여학교의 교장이 된 문남식, 좌절한 화가 김명순, 장안의 유명하던 기생 강명화도 금강산에 동행했고 음악가 윤심덕과도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어요. 윤심덕은 아버지와 여행할 일이 생기자 같이 죽자고 하더래요. 아버지가 조금도 죽을 생각이 없다고 하자 넥타이를 잡고 애원하기도 했다는데, 나중에 김우진이라는 극작가와 결국 현해탄에서 정사를 하고 말잖아요.” 영균이 가모소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봄, 그들은 공장을 팔고 서울로 이사한다. 아버지는 큰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국사람이니 중학 교육부터는 한국에서 받아라.” 서울로 돌아올 때 가족은 봉천에서 천연두를 앓아 어머니를 애타게 했던 희균 말고도 남동생 상균과 막내 여동생 정균이 태어나 여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이주한 것은 나의 입학시험이 큰 이유였지만 심상찮은 중·일 관계와 국제정세도 작용했을 거예요. 봄에 이사하고 겨울에 태평양전쟁이 벌어졌거든요.” 대학생 영균, 반탁운동에 동참 영균은 경기고녀에 시험을 친다. 만주에 살다 경기고녀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며 주변에서는 걱정들 했지만 영균은 거뜬히 합격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 봉천에서 먹던 케이크나 초콜릿 같은 것은 구경할 수조차 없고 밥에 보리가 3할 이상 섞였는지 담임 선생님이 매일 조사했다. 교복은 ‘몸뻬’로 바뀌고 풋솜을 두둑이 넣은 솜방석을 방공모로 쓰고 다녀야 했다. 수업은 오전뿐이고, 오후에는 운모 조각을 뾰족한 쇠칼로 떼어내는 일을 했다. 비행기 동체의 재료가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미국의 병력과 자본력은 일본이 상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며 일본의 패전을 확신했지만 학교에서는 일본이 이기는 중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루스벨트나 처칠의 사진을 한 번도 싣지 않았다. 늘 몸에 털이 수북한 짐승으로 그리고, ‘귀축미영(鬼畜美英)’이란 말은 빼지 않았다. 1945년 3월 나영균은 경기고녀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의 별칭, 총독부는 ‘이화’가 이왕가의 배꽃 문양을 상징한다고 해서 전쟁 말기에 그 이름 사용을 금했다)에 입학한다. 일본 위병이 서 있는 교문을 경례를 하고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이화여전은 총독부가 시키는 일을 완전히 비웃으며 패러디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선생님들도 대개 미국 유학생이었다. 해방! 8월15일 일본 왕의 항복방송을 들었다. 독립했다는 기쁨보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의 거물들이 속속 귀국하고, 나영균의 신교동 집에는 송진우·김성수·장덕수 같은 사람들이 모여 하루종일 회의를 하며 한국민주당을 만들었다. 나경석이 그들에게 장소를 제공한 것은 정치 이념이 같아서가 아니라 개인적 친분 때문이었다는 것이 옳다. 나경석은 한민당 대신 한국사회당이라는 당에 가입한다. 청천벽력 같은 신탁통치 문제가 나왔을 때 대학생 영균도 태극기를 들고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신탁통치 결사반대” 구호를 외치며 따라가곤 했다. 효자동 진명학교 근처에 이웃해 살던 춘원이 해방 후 민족 반역자로 잡혀간 일은 그에게 쇼크였다. 영균은 해방 직후 잠시 춘원의 아들 영근과 함께 그에게 영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코넷(Coronet)>이라는 잡지가 교재였다.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1942년 여름에는 두 집 가족이 함께 원산 송도원의 별장을 빌려 여름을 난 적도 있었다. 그때 아이들은(영균·희균·영근)은 서로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을 아는 체하며 서양요리를 먹고는 했다. 해방 후 아버지는 큰딸 영균을 데리고 외출하기를 즐겼다. 신익희가 누운 병원에 문병을 가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백병원 앞에 있는 신애다방에 자주 갔어요. 거기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앉아 있다 오는 거죠.” 아버지가 특별히 무슨 공부를 하라고 한 기억은 없다. 다만 영어와 한문은 학문의 필수도구이니 꼭 익혀 두라는 당부만은 하셨다. 또 유머를 이해해야 하고 자신에게는 가혹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말씀도 하셨다. 해방 직후에는 커피가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커피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콩을 거뭇하게 볶아 커피처럼 가루 내어 타 마시거나 우유를 양재기에 담아 아랫목에 뒀다 요구르트를 만들어 드시고는 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조국에 대한 책임감이 대단했어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몽매한 백성을 계몽하고 사회를 근대화하는 일이 자기들의 몫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런 생각들을 한 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 개화기의 소중한 보배이고 가치였지요.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어머니는 살림솜씨가 대단했다. 세 자매의 옷을 만들어 입히면 어디에 가나 가장 눈에 띄는 멋쟁이가 됐다. 영균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해 모교의 교수가 되었고, 둘째 희균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해 고모처럼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와 동양화가 안상철과 혼인하고 지금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셋째딸 정균도 큰언니를 따라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다시 도서관학을 공부해 일리노이 대학 도서관에서 평생을 일하다 은퇴했다. 남동생 상균은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가문은 DNA에 화재(畵才)가 있는 모양이다. 나혜석-나희균으로 이어지는 화가 말고 나영균 선생 자신도 틈틈이 그린 글씨와 그림으로 칠순 넘어 개인전을 열었고, 셋째딸 송미의 아들 준우가 서너 살 때 그렸다는 그림은 어린 천재 화가의 빼어난 조형과 색감과 상상력이 천의무봉하게 드러나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모녀 대 이어 영문과 교수 되다 그러나 준우는 열 살이 되어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다. 아픔을 의연하게 견디며 웃는 할머니로서의 나영균 선생, 그의 아름답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본다. 나영균도 자신의 부모와 똑같이 1남 3녀를 뒀다. 슬하의 세 딸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어머니와 이화여대 영문과 동창이다. 뿐만 아니라 둘째딸 전수용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형제가 같은 학교 같은 과 교수가 된 경우는 있어도 모녀가 대를 이어 같은 학교 같은 과 교수가 된 경우는 이들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전수용 교수는 전공도 어머니와 똑같은 ‘조지프 콘라드 소설 연구’라고 한다. 이럴 수가! 희균까지 포함해 한집안의 다섯 여자가 모조리 같은 학교 같은 과라니! 아니 다섯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의 고모, 그러니까 나영균 선생의 시누이인 전옥제도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이다. 나영균 선생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시어머니 되실 분이 어느 날 꿈을 꿨다. 죽은 나무에서 매화꽃이 활짝 피는 꿈이었다. 그렇게 좋은 꿈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제일 큰 소원이 뭔지 자문했다. 인물 잘나고 머리 좋고 학벌 좋은 큰아들, 그 아들에게 걸맞은 나라 안 최고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시어머니는 덮어놓고 이화여대로 달려갔다. 마침 학도호국단 훈련을 하는 날이어서 800여 명의 학생이 운동장에 나와 있었다. 거기서 딱 찍힌 것이 바로 나영균 학생이었다. “다들 파마 하고 화장하고 다녔는데 나는 화장도 안 하고 단발하고 다녔어요. 비로드 치마와 깨끼 저고리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나만 곤색 치마에 아버지의 흰 와이셔츠를 걸쳐 입고 다녔거든요. 그게 눈에 띄었나봐요.” 효자동까지 따라온 시어머니는 우연히 마주친 척하면서 “영문과라면 윤복제라는 아이를 아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내일 학교 가는 길에 같이 갈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집에 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선보러 온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튿날에는 비가 왔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서 나가 봤더니 전날 따라왔던 부인인데 그 뒤로 직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요. 그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지요.” 세종문화회관 뒤 ‘전인터내셔널’이라는 사무실에 나와 앉아 아직도 책을 읽느라 분주한 남편 전민제 선생을 가리킨다. 청년 전민제는 법관이 되라는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과학의 길을 택했다. 도쿄물리학교에 적을 뒀다가 해방 후 서울대에서 석사를 하고 도쿄대에서 화공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한 공학자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빙초산 공장을 세워 경영하는 중에, 아버지가 이 공장을 보고 사윗감으로 이만하면 됐다고 몹시 흡족해 했다. 신부는 신랑이 하도 잘생겨 바람을 피우면 어쩌나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워낙 강하게 권하는 바람에 김활란 선생이 권하는 미국유학을 뒤로 미룬 채 결혼을 결심한다. 조지프 콘라드 연구로 박사학위 받고 모교 교수로 전민제 사장은 1960년대 건설 한국의 선두에서 대한석유공사를 진두지휘해 만든 주인공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울산에 정유공장을 짓고 창원공업단지도 직접 뛰어들어 건설한 앞서가는 기술자였다. 정유공장은 당시 세계의 석유를 장악하던 미국의 메이저 오일 회사들과 맞서가며 순수 한국 기술자의 힘으로 지었다. ‘전엔지니어링’을 창립하고 신한기공과 이수화학을 맡아 해외 엔지니어링으로 돈도 엄청 벌어들였다. 그러나 전민제 사장의 관심은 돈벌이에 있지 않고 엔지니어를 키워 내는 데 있었다. 직원들에게 ‘회사가 아니라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된 것’은 장인이 봉천에서 열었던 고무공장 때와 같았다. 그 둘은 썩 죽이 맞는 장인과 사위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 개발에 탁월하고 국책사업을 훌륭히 수행해도 정경유착을 거부하면 기업의 생명은 한낱 바람 앞의 등불이던 시대가 있었다. 정치헌금을 거부하는 바람에 여의도에 있던 큰 빌딩을 빼앗기고 평생 몸 바친 기업에서 손을 털고 나와야 했다. 그 후 작은 회사인 전인터내셔널을 창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영균 선생은 결혼 후 캔자스 주립대학으로 유학가 조지프 콘라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이화여대 영문과에서 영·미 소설을 강의하는 한편 숱한 작품을 번역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책에 매달리는 생활이었다. 살림은 당연히 어머니가 맡으셨다. 네 아이를 맡아 키워 주신 분도 어머니였다. “우리 어머니는 육아법이 탁월했어요. 이유식 하나를 만들어도 개월별로 새우젓을 넣다 채소를 쓰시다 고기를 시작하시는 식으로 어찌나 정갈하고 과학적으로 하시는지 나는 따라갈 수조차 없었죠. 우리 형제들이 그랬듯 손주들도 양복·스웨터 다 직접 재봉하고 뜨개질해 입히셨고, 다른 사람들이 기저귀를 네모나게 접어 채울 때 어머니는 삼각형으로 접어 핀으로 딱 꽂아 주셨죠. 아마 일본유학 때 그런 방법을 배우신 것 같아요.” 그 어머니는 94세까지 딸의 살림을 봐주시다 나영균 선생이 정년퇴임하던 이듬해 돌아가셨다. “나는 아이들더러 공부하라는 말 같은 것은 안 했어요. 물론 과외도 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비 오면 학교 가지 말고 집에서 책이나 읽으라고 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자꾸 뭐가 되라고 종주먹을 대면 애들이 못살죠. 선비가 살아온 삶이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말해 주고, 정신적인 세계가 물질적인 삶보다 어떻게 나은가를 말해 주고 그런 것을 동경하게 만들면….” 점수를 잘 따게 하는데 급급한 근시안적 눈으로 아이들을 닦달하는 요즘 교육법에 그는 회의적이다. 나영균 선생의 1남3녀는 공부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랐다. 큰딸 수현은 이화여대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미시간대학에서 경제지리를 공부했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대를 잇는 대신 미국인과 결혼해 거기 남았다. 둘째 수용도 미시간에서 영문학 박사를 받았다. 쑥스러워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나눈 적 없건만 어머니와 똑같은 콘라드를 전공해 모교에서 가르친다. 셋째딸 송미는 언니들과 같은 학교 영문과 출신이지만 나중에 뉴욕 프렛 인스티튜드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했다. 가슴 아팠던 딸 송미의 투정 “놀랍게도 그 애는 지금 건축설계사무소를 차려놓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씩씩하게 일해요. 사위는 회계사예요.” 송미는 어렸을 적 학부모 참관수업에서 선생님이 “어머니가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할 때 손을 번쩍 들어 공부하는 엄마를 몹시 놀라게 했다. “터울이 있어서 언니들이 송미만 편애한다고 불평했거든요. 그런 애가 엄마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다니…. 송미는 작문시간에 “나중에 시집가면 밖에 안 나가는 엄마가 되겠다”고 써서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어요.” 외아들 성빈은 캔자스 대학에서 공부하고 역시 미국 여자와 결혼해 거기서 사업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은퇴를 맞아 작은딸 수용은 이렇게 썼다. “65세 정년에도 어머니는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이시다. 어머니의 매력은 가끔 어머니를 접하는 분들에게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덧없는 것이 아니라 40년간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자식이나 아버지에게도 항상 생생한 그런 매력이다. 신선한 관찰력과 정신적 긴장과 절제와 삶에 대한 심미적 태도, 그 모든 것에서 우러나는 독특한 향기다. ‘사람관계는 담담하게 하는 것이 좋아.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담담하게. 그리고 네가 하는 일에 열중하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넓고 끝없는 바다를 좋아하셨다. 여름마다 우리를 해수욕장으로 데리고 가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질구레한 일상사나 치졸한 인간사에 얽매이지 않고 넓은 것, 깊은 것, 아름다운 것을 항상 추구하시는 어머니의 기질과 바다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박사 학위 논문도 해양소설가인 조지프 콘라드를 택하신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를 멋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돈을 들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재간과 심미안에서 나온다. 미장원에 가시는 횟수가 1년에 한두 번일 뿐으로 머리 손질은 항상 손수 하시고 몸치장에도 돈을 들이지 않고 10년 전쯤 마련한 옷을 입고 또 입으신다. 재봉에도 솜씨가 있으셔서 옷본도 없이 입던 옷을 놓고 헝겊 위에 쓱쓱 마름질하셔서 민첩하게 옷을 만들고는 하셨다. 내가 심심하다, 지루하다 불평하면 “인생은 재미없는 것도 재미있게 하면 재미있어지는 거야” 하신다. 요리나 아기보기 같은 궂은 일도 어머니의 손이 닿으면 흥미로운 예술로 변한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험담이나 푸념, 자기 자랑 같은 상대를 지겹게 하는 화제를 피하시고 항상 흥미롭고 유익한 화제를 꺼내 명석하게 해학적으로 이야기하신다. 어머니는 정말로 생활의 예술을 실천하며 사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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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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