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프리즘 >> 반소(泮疏)와 공관(空館) 

임금님도 두려워한 유생들의 동맹휴학 

신명호 부경대 교수 [smh@pknu.ac.kr]
식당·기숙사 비우고… 그래도 안 되면 아예 환향 대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동맹휴학 얘기도 나온다. 반값 등록금이 화두다. 조선시대에도 동맹휴학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조정이나 임금이 잘못 나간다 싶으면 일제히 강의실을 비웠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가장 강력한 의사표시 중 하나는 학습권의 포기다. 조선시대 유학생의 동맹휴학 장면을 따라가본다.
세종 26년(1444) 12월, 세종대왕의 8대군 중 다섯째인 광평대군이 2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더욱 참혹하게도 광평대군에게는 태어난 지 5개월 된 자식이 있었다. 이런 핏덩이와 남겨진 미망인 신씨의 비통함과 절망감이 어떠했겠는가? 신씨는 큰돈을 시주해 견성암(見性庵)이라는 절을 지었다.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고, 또 핏덩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젊은 아들을 잃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역시 비통과 절망에 빠졌다. 광평대군이 죽기 전, 세종대왕은 아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모든 지식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강보에 쌓인 핏덩이 같은 손자는 세종대왕을 더더욱 슬프게 했다. 세종대왕은 그 손자에게 ‘수복(壽福)’이라는 자(字)를 지어줌으로써 아버지 몫까지 오래오래 복되게 살기를 기원했다.

※ 해당 기사는 유료콘텐트로 [ 온라인 유료회원 ] 서비스를 통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107호 (2011.07.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