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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 ‘남북분쟁 제1전선’ 연평도는 안녕하십니까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포격사건 이후 마을은 옷 갈아입고 연대급으로 격상된 부대는 견고하게 요새화…실향민 할머니에게 이산가족상봉 소식 묻자 “코앞에서 고향 땅 바라보면 됐지”

▎야간감시작전에 투입된 연평부대 해병대원들이 해안철책을 따라 순찰하고 있다.




▎낮에만 출입이 허용되는 연평도 북쪽 해안 갯벌에서 섬 주민들이 북한 땅을 등지고 굴을 따고 있다.
북녘으로부터 훈풍이 불어온다. 이산가족이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남을 갖게 됐고, 남북 고위당국자가 만나 손을 맞잡았다. 육지에서 불어온 따뜻한 바람은 분쟁의 섬 연평도 바다까지 미친다. 연례적인 한미연합훈련의 규모가 예년에 비해 축소됐다. 북한도 자극적인 비난을 삼가는 모양새다. 그래도 ‘전선(戰線)’의 냉기가 연평도 해안을 감돈다. 2000년대 들어서 연평의 바다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화약고였다. 육지의 봄바람을 느끼면서도 총부리를 거둘 수 없는 곳, 연평도를 다녀왔다.

연평(延坪)은 본래 평화로운 섬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나지막한 산이 남쪽의 산아래 들판을 두 팔로 감싼다. 너른 들판은 산이 그랬듯 바다를 둥그런 제 품에 끌어안는다. ‘들판을 끌어들이고 바다를 품은 섬’이 바로 연평도다.

연평 주민들의 심성도 이 섬을 빼닮았다. 주민들은 외지인을 배척하지 않는다. 섬을 찾아온 이들에게 방 한 칸 내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게 이곳 주민들의 정서다. 썰물 때 갯벌에 나가 갓 따온 굴을 조물조물 무쳐 꽃게장과 함께 내놓으면서도 “반찬이 시원찮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다.

연평의 풍요로움은 조기떼를 끌어들이고 꽃게무리를 품에 모았다. 한때 전국 3대 조기어장으로 꼽혔다. 지금도 서해안에서 잡히는 꽃게 중 연평 꽃게를 으뜸으로 친다. 작은 섬의 인구가 1만 명을 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의 열 배다. 3~4월 조기철(조기파시)에는 수천 척의 어선이 연평 앞바다에 몰렸다. 뱃사람의 콧노래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그래서 연평의 바다는 ‘평화를 끌어들이는(延平)’ 바다였다. 적어도 남북한의 첫 서해상 군사적 충돌이 있었던 15년 전까지는 말이다. 두 번의 해전(1999년·2002년)과 포격전(2010년)은 평화의 섬을 남북 분쟁의 최전선으로 둔갑시켰다. 2월 6일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연평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2010년 11월과 이듬해 11월에 이어 세 번째 방문이다.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분쟁의 중심에 있는 연평도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육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훈훈했지만 연평 앞바다는 한미연합훈련을 앞두고 다시 긴장감이 서리고 있었다. 육지의 훈풍이 이 섬까지 닿을 수 있을까. 바람이 잦아든 바다는 평화로웠다.

기분 좋은 일렁임이 익숙해질 무렵 소연평도 앞바다에 당도했다. 연평도는 크게 본섬인 대연평과 소연평으로 나뉜다. 대연평도는 선착장이 있는 당섬과 다리로 연결돼 있다. 3년 전 주민들은 이곳 당섬에서 포탄에 불바다가 된 끔찍한 광경을 넋 놓고 지켜봐야 했다.

본섬에 들어서면 주도로인 연평대로를 따라 마을이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섬 전체 면적은 6.9㎢로 여의도(2.9㎢)의 두 배가 넘는다. 비교적 큰 섬인데 가구수는 1천 가구 안팎이다. 섬 남동쪽 해안가에만 민가가 모여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야산으로 곳곳에 군부대가 있다.


▎연평도 망향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개머리해안. 왼쪽에 보이는 섬부터 NLL 이북의 북한 영해다.
행정구역상 마을의 중심인 중부리와 동쪽 어귀인 새마을리로 나뉜다. 중부리는 방 두 칸짜리 작은 단층 주택들이 어깨를 맞대고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바닷바람을 막으려는 이 섬의 오랜 삶의 방식이 나은 구조다. 그런데 북한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런 마을 구조가 오히려 피해를 키웠다.

포화의 상처 위에 새 옷 입힌 중부리 마을

당시 북한의 포격은 군부대뿐만 아니라 민가가 밀집해 있는 중부리에 집중됐다. 주택 30여 채가 포격으로 직접 피해를 입었고 240여 채가 폭발 충격에 금이 가거나 불에 탔다. 지붕이 내려앉고 소실된 집들이 즐비했던 당시 중앙로는 잘 만든 영화 촬영장보다 비현실적이었다. 집을 잃은 주민들은 1년 가까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임시가옥에서 난민생활을 해야 했다.

그랬던 마을이 3년이 지난 지금 말끔히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부서진 집들을 허물고 흰색, 갈색, 붉은색 벽돌로 모양을 낸 단층 주택들이 네모 반듯하게 들어섰다. 다방과 오래된 음식점, 족히 50년은 됐음직한 낡은 가옥이 어지럽게 맞붙어 있던 중앙로는 ‘조기문화탐방로’라는 새 이름표를 달고 있다. 벽에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그린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거리의 분위기를 더 밝게 띄워주는 듯했다. 400여m쯤 되는 거리에 조기를 잡아 번성했던 옛 연평도의 모습을 담은 글과 사진, 그림이 어우러졌다.

조기탐방로 어귀에 맞물려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잿빛 패널로 높은 담장을 두른 2층짜리 현대식 건물이 나타난다. 담장을 돌아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에 폐허가 된 민가 3채가 나타난다. 연평리 174·175·176번지. 이 섬에서 유일하게 옛 지번 주소를 간직한 곳이다.

북한군이 쏜 포탄에 맞아 가장 심하게 부서진 민가를 포격 당시 그대로 보존해 건립한 안보전시관이다. 담장을 높이고 입구를 안쪽으로 내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이곳을 지나는 주민들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고 했다. 포격사건 이후 주민들 중 상당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다.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모든 게 피폭 당시 그대로다. 멈춰버린 벽시계, 검게 그을린 가재도구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금이 간 벽체는 새로 덧댄 철골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있다. 집주인이 사용했을 프로판가스통은 포탄의 강철 파편이 비산하면서 관통한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채 마당 한켠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슴이 턱 막혔다. 가공되지 않은 참혹함은 포탄의 파편만큼이나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전시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먹먹함이 극에 달했다. 한쪽 벽에는 어른 머리보다 큰 구멍이 뚫린 녹색 콘크리트 건물 구조물 일부가 붙어 있었다. 그날 포탄에 맞아 구멍 뚫린 면사무소 창고 건물의 옥상을 떼어다 전시한 것이다. 포탄에 맞아 산화한 해병대 서정우 하사와 문광우 일병의 군복과 모자가 유리벽 안에 전시돼 있었다. 저 옷에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2층에는 포격전의 상황을 시간별로 기록한 영상물과 증언들이 전시되고 있다. 빔프로젝터를 통해 왼쪽 벽에는 포격 당일 우리 군의 대응을, 오른쪽 벽에는 같은 시각 북한군의 대응을 재구성한 영상이 동시에 투사된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실감을 더했다. 홀로그램을 이용해 연평부대 7포병중대의 대응을 재현한 디오라마와 포격 전후 상황·주민들의 연평도 재건 의지를 담은 3D 입체 영상관까지 둘러보고 나면 이 비극이 단지 섬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전자 방명록에는 앳된 청소년들의 아기자기한 글이 가득했다. 이곳을 방문했던 아이들에겐 실감나는 전쟁 체험의 추억쯤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 차례 교전 치른 아픔은 고스란히 남아

중심가를 벗어나 서쪽 해안가로 향했다. 절벽 위에 북한땅이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연평도에는 3개의 전망대가 있다. 이 중 두 곳은 민간에 개방돼 있다. 동쪽 봉우리의 전망대는 망향비가 서있다. 실향민이 많은 연평 주민들은 명절에 이곳에서 북녘을 향해 합동 제사를 지낸다. 서쪽 절벽에 있는 전망대는 이 섬의 애환이 가장 깊이 서려 있다.

조기잡이가 성황을 이루던 때 이곳에서 아낙들과 아이들은 금빛 조기를 가득 싣고 돌아오는 배를 마중했다. 조기 조업이 끊긴 뒤에는 조기전망대라 불리는 누각이 들어섰다. 선사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연평도의 유구한 역사와 전국 3대 조기어장의 명성을 떨쳤던 시대를 추억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에는 돌아오지 않을 기억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2년 전 이 전망대에 또 하나의 기억이 새겨졌다. 연평을 향한 총탄을 몸으로 막아 지켜낸 용사들에 대한 기억을 담은 추모공원이다. 연평해전의 주역인 25용사들의 혼은 이곳에서 용치(龍齒)로 부활했다. 용치는 적의 해안 상륙과 진군을 막는 방어시설이다. 공원 중앙에 서쪽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치켜 세운 25개의 용치는 두려움을 몰랐던 용사들의 늠름한 기상을 닮았다.

6명의 전사자는 영원히 바래지 않는 은빛으로, 이들을 둘러싼 나머지 부상자는 서서히 검붉게 녹이 슬며 산화하는 금속으로 표현했다. 연평 주민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조선시대 명장 임경업 장군의 사당, 한국전쟁 때 목숨을 바쳐 섬을 지켰던 6용사 충혼탑과 더불어 25용사의 추모공원은 연평도를 지키는 수호 성지로 자리매김할 터다.

섬을 둘러보던 중 곳곳에서 나부끼는 붉은 깃발이 눈에 띈다. 해병 연평부대 관계자는 “북한군이 쏜 포탄이 떨어진 곳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붉은 색은 해병을 상징하는 색이다. 두 번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해병의 의지를 깃발에 담았다고 했다.

고 서정우 하사가 산화한 곳에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서 하사는 휴가를 나가려다 포격이 시작되자 급히 부대에 복귀하다가 포탄에 맞아 산화했다. 서 하사가 산화하는 순간 그의 모자에서 떨어져나간 모표(해병대 휘장)는 근처 소나무에 날아가 박혀버렸다. 서 하사의 이 모표는 포격이 있은 지 1년 뒤에야 발견됐다. 부대 관계자는 “서 하사의 모표는 불멸의 해병대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NLL 최북단인 연평도 동쪽 해상에 떠 있는 해군 전진기지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전력 증강하고 방어시설 개선해 요새화

두 차례의 해상전투와 포격전을 겪으며 연평은 3년 전과 분명 달라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섬 전체의 요새화다. 연평도는 북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해안포기지가 있는 무도와는 12㎞, 강령반도 개머리해안과 13㎞ 떨어져 있다. 북한의 군항인 해주항으로부터 남하를 막는 최전방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 입지만으로도 북한에는 상당히 위협적이다. 군 관계자의 말을 빌리자면 ‘적의 폐부를 겨누고 있는 칼날의 끝’이다.

본래 연평도는 전쟁 발발 시 북한 해군의 남하를 방어하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정전 이후 우리 정부가 민간인의 연평도 정착을 지원한 것도 이 점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군과 민간인이 혼재한 섬 한복판을 직접 공격하는 무리수는 두지않으리란 낙관론이 정전협정 후 반 세기를 지배했었다. 그동안 이곳을 지키는 전력과 방어시설은 낡고 가치를 잃어갔다. 하지만 3년 전 사건을 겪은 뒤로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병영과 민가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졌다.


▎야간 감시작전을 마친 해병대원들이 해 뜰 무렵 당섬 해안도로를 따라 부대로 복귀하고 있다.
마을을 지나 오솔길로 들어서면 군부대가 나오고, 군부대를 지나면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나타난다. 2년 전 방문했을 때 보지 못했던 시설이 부쩍 늘었다. 두꺼운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부대 막사를 보강하는 공사도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모래포대를 마치 경주의 고분군처럼 쌓아 올렸던 오래된 자주포 진지들도 콘크리트 벙커 형태로 새로 지었다. 북쪽의 산등성을 방패삼아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새로 지은 자주포 진지들이 눈에 띄었다.

연평도에 주둔한 해병대 연평부대는 북한의 기습포격 이후 인원과 장비가 늘었다. 해병대 병력 1200여 명이 증원됐고 1개 중대였던 K-9자주포 부대는 3개 중대로 증강됐다. 130㎜ 다연장로켓과 지대공미사일, 최신 대포병 탐지레이더, 코브라 공격헬기가 배치됐다. 포격사건 이후 국방부는 서북도서 방위사령부를 창설했다. 포병의 기본 대응원칙을 ‘선조치 후보고’ 체계로 간소화했다.

주민 대피시설도 개량됐다. 교전이 발생해 뱃길이 끊길 경우 대피소는 주민들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다. 예전의 대피소는 콘크리트 반지하 벙커에 흙더미를 얹은 형태였다. 대부분 전기가 끊겨 촛불에 의지해야 했고, 발목까지 물이 차 있는가 하면 철문은 녹이 슬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다. 단 하루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새로 지은 대피시설은 화생방 공격까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2012년에 신축한 1호 대피소는 연평면사무소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다. 두꺼운 방호벽 안쪽에 육중한 철문이 달려 있는데 그 두께가 어른 손으로 한 뼘에 이른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철문이 있는 이중구조여서 어지간한 공격에도 끄떡없어 보인다. 내부는 반원형 구조의 강당 형태로 되어 있고 바닥은 푹신한 매트를 깔았다.

대피소안에는 샤워장과 응급의료시설, 식당 등이 있다. 난방장치와 공기 정화설비, 비상발전기, 위성전화 등 통신장비가 모두 갖춰져 있다. 일정기간 기거할 수 있도록 비상식량과 피복도 마련돼 있다. 이곳은 한꺼번에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포격사건 이후 7곳을 새로 증설했다.

기존에 있던 대피소 18곳도 철문과 방호벽을 새로 설치하고 통신·난방시설을 갖추는 등 리모델링을 했다. 연평면사무소 관계자는 “규모가 큰 대피소들은 평소 주민 행사장이나 외부에서 오는 단체관광객의 숙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뭍에서 보는 연평은 가는 줄 위에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아슬아슬하다. 작은 바람만 불어도 바닥에 곤두박질 칠 듯 위태로워 보인다. 남북 간에 긴장이 높아지면 으레 이 섬을 떠올린다. 그런데 정작 섬사람들은 초연하다. 육지의 평화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북한에 대한 적개심도 생각만큼 깊지 않은 듯하다.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전쟁을 맞아 연평도로 피란 왔다는 김현미(80) 할머니는 이산가족 상봉행사 신청을 왜 안 했느냐는 물음에 “코앞에서 고향 땅 바라보면 됐지”라고 답했다. 할머니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연평도 주민들은 대부분 실향민이거나 실향민 2세들이다.

고향이 황해도인 주민이 70%나 된다. 그래서 연평도 사람들은 말끝에 ‘-했댔어’라고 붙이는 황해도 사투리를 많이 쓴다. 해주땅에서 배타고 시집을 왔거나 피란을 온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평면사무소에 물어보니 그동안 이산가족상봉 행사 참가를 신청한 주민은 없었다고 한다. 면사무소의 한 직원은 “이곳 주민들의 가슴에는 북녘 고향에 대한 향수와 북한군에 대한 증오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고 했다.

3년 전 북한의 포격을 받고도 마치 남의 일인 양 분노를 속으로 삼켰던 주민들의 모습을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의 터전인 연평도가 포화에 잿더미로 변한 것만큼이나 부모 형제의 터전인 고향 땅이 포화로 뒤덮이는 것도 가슴을 옥죄는 고통일 것이다.

그래도 주민들은 이곳에 주둔한 해병대의 든든한 조력자다. 주민들은 젊은 군인들을 자식처럼 스스럼이 없이 대하고 군인들은 고향의 어머니 할머니를 대하듯 극진히 모신다. 때때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이는 훈련 때문에 대포 소리가 섬을 울려도 주민들 중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연평부대 관계자는 “우리가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건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배려 덕분”이라고 했다. 반대로 주민들은 섬을 지키는 군인들을 대견스럽게 여긴다. 김정희(50) 씨는 “젊은 청년들이 외진 곳에 와서 목숨을 걸고 이 땅을 지켜주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말했다.

섬에 머문 3일 동안 마침 연평부대는 훈련 중이었다. M48전차부대가 섬 곳곳에 있는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굉음을 내며 쉴 새 없이 오갔다. 5분대기조를 실은 트럭은 훈련상황이 발생한 지점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포병들이 벙커에서 나온 자주포의 포신을 이리저리 돌리며 기동 점검을 하느라 분주하다. 연평부대의 협조를 얻어 해안초소 감시작전을 동행했다. 부대원들은 해 질 무렵과 해 뜰 무렵 두 번 전원감시작전에 투입된다. 북녘에서 불어오는 삭풍이 두꺼운 방한복을 파고 들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북풍은 반나절 만에 입술을 트게 할 만큼 매서웠다.

초소의 쌍안경에 비친 북한의 해안은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열영상장비를 통해 밤에도 북한군의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된다. 해안 경계초소에서 북쪽을 응시하는 초병의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 같다.

“화력이 더 강해진 지금은 도발 엄두내지 못할 것”

멀리 동쪽 바다에 떠있는 해군의 전진기지에는 참수리 고속정들이 쉴새 없이 오가며 해상 경계를 벌이고 있다. 날이 어둑해지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20㎜ 벌컨포가 토해낸 예광탄 수십 발이 검은 바다 위에서 붉은 빛을 밝히고 수그러들었다. 포격사건 이후 북한은 개머리 해안포 기지와 최남단 무도 해안포 기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40㎞가량 떨어져 있는 북한 태탄비행장에는 전투기와 헬기 등 40여 대의 공군전력이 배치됐다. 남북의 군비경쟁이 가장 치열한 전선, 열화의 섬이 된 것이다.

무분별한 군비 경쟁은 작은 충돌에도 더 큰 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세 차례에 걸친 교전으로 서로에 대한 복수심과 앙금이 깊은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우려를 군 관계자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억지력은 오히려 도발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군 관계자는 “지난 교전에서 적들은 작은 도발에 뒤따르는 대가가 얼마나 큰지 깊이 깨달았을 것”이라며 “그때보다 더 강한 화력을 지닌 이제는 섣불리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 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최전선의 안보태세야 말로 저들을 평화와 협력의 길로 나오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견인차가 될 것이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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