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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 돈키호테③ 길, 로고스의 향연! - 웅변의 고매함과 속담의 질펀함이 맞서다 

말은 에너지이며 파동, 한번 태어나면 결코 사라지지 않아… 근대와 탈근대를 동시에 넘나드는 ‘기발한’ 말의 파노라마 

언어는 권력이자 용법이고, 배치의 산물이다. 그것이 놓여 있는 조건에 따라 광기가 되기도 하고 지혜가 되기도 한다. 바보짓이 되기도 하고, 고매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돈키호테>가 뿜어내는 다중성의 원천도 여기에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세르반테스 하우스 앞에 세워진 돈키호테(오른쪽)와 산초의 동상.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는 웅변의 대가로, 산초는 속담의 달인으로 그려진다.

유년기엔 카라반(집단으로 움직이는 여행단)을 따라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청년기엔 레판토 해전에서 팔을 잃어 ‘외팔이’가 되었다. 귀환하는 길엔 해적에게 잡혀가 알제리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중년엔 세금징수원이 되어 또 전국을 누비다 감옥에 갔다. 유랑과 전쟁, 포로와 감옥. 이것이 세르반테스 인생을 장식하는 키워드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셈이다. 그래서 불행했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분명 역마살에 고생살이 뻗친 건 맞다. 또 학교, 직업, 결혼의 코스를 밟는 중산층의 궤도에서 한참 벗어난 행로인 것도 맞다. 그렇다고 그게 불행의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중산층의 권태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니까.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처럼, 궤도에서 이탈하면 가난과 불운을 수시로 겪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반전이 있다. 인생도처유반전!

먼저 그는 길 위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웠다. 라틴어와 수학, 별을 보고 시간을 헤아리는 법, 철학과 문학 등등. 길이 곧 대학이요 강의실이었다. 더 중요한 건 화술이다. 온갖 이야기를 주워듣는 귀동냥과 그걸 자신의 스타일대로 쏟아낼 수 있는 입담을 터득한 것이다. 알제리로 팔려가서도 그 지역의 통치자인 하산 파샤의 측근이 되어 특급대우를 받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말솜씨였다. 세금 징수원임에도 지역의 서민들과 깊이 교감할 수 있었던 것, 종교재판을 받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된 것 역시 다름아닌 그의 말이었다. 그 말들이 실개천처럼 흘러들어 50대 후반 감옥의 한 독방에서 <돈키호테>라는 도도한 강을 이루었다. 그렇다! 반전의 포인트는 역시 ‘말’이다. 이 말에는 행동과 덕이 수반된다. 그래서 로고스다. 로고스란 ‘말과 진리’, ‘말과 지성’의 직접적 일치를 뜻하는 낱말이다.

<돈키호테>는 소위 정통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와 번역자, 작중 화자가 수시로 교차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토리 라인도 ‘기승전결’의 스텝을 밟지 않는다. 또 ‘소설은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라는 루카치의 정의대로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갖은 고난을 거친 다음 성숙한 존재에 이른다는 성장소설의 유형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중간중간 이야기들이 마구 끼어든다. 1권에선 ‘미친 에로스의 화신’들과 ‘막장남녀’들의 이야기가, 2권에선 각종 연극, 인형극, 가면극이 수시로 끼어든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리좀(덩이줄기)’을 연상시킬 정도로 얽히고 설킨다. 그래서 돈키호테에 대한 평가 역시 다중적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최초의 ‘근대적’ 작품이라 평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선구로 추앙받기도 한다. 근대와 탈근대를 동시에 넘나드는 아주 ‘기발한’ 작품이 된 것이다.

길은 미미하나 말은 창대할지니

그 원동력이 말, 곧 로고스다. <돈키호테>는 여행 자체보다 말이 더 풍성한 텍스트다. 1권에선 몬띠엘 평원에서 객줏집을 전전하다 닭장 수레에 실려 왔고,2권에선 바르셀로나까지 가긴 했지만, <열하일기>나<서유기> <동방견문록> 등 다른 여행기의 여정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하여, 이 여행의 특이성은 모험과 거리에 있다기보다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말들에 있다. 돈키호테를 비롯하여 산초, 학사 산손 등등 기타 다른 인물도 정말 말이 많다. 사건 자체보다 말과 말이 넘쳐나는 여행기다. ‘길은 미미하나 말은 창대하도다!’라는 경지인 것. 무릇 인간이란 ‘로고스적’ 존재임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애초 연재를 2회로 마치려 했다가 한 회를 연장하게 된 것도 이 ‘말의 향연’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돈키호테는 웅변의 대가요, 산초는 속담의 달인이다. 돈키호테의 웅변은 기사도 소설에 근거하고, 산초의 속담은 ‘인정물태(人情物態)’가 그 원천이다. 전자는 근거가 확연하고, 후자는 유래를 추적하기 어렵다. 전자는 동일성의 세계고, 후자는 차이의 파노라마다. 전자는 고매하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고, 후자는 속되지만 씹을수록 맛이 생생하다.

먼저 돈키호테. “나는 하늘의 뜻으로, 이 무쇠의시대에 황금의 시대를, 말하자면 황금세기를 부활시키려고 태어난 사람이니라. 내 앞에는 모든 위험과 위대한 공적과 용감한 행적이 기다릴 뿐이다. 나는, 다시 말하지만, 원탁의 기사 시대를 부활시킬 것이며, 프랑스의 열두 기사, 세계에 이름난 아홉 기사를 능가하는 기사가 되리라…. 내가 태어난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하고 신기하고 훌륭한 무공을 세워 지난 세기에 찬란했던 그들의 행적과 영광을 어둠 속에 잠들게 하겠노라.”(1권, 260쪽) 눈으로만 보기는 좀 아깝다. 직접 낭송을 해보면 돈키호테의 멘탈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산초. 역시 낭송을 해야 맛이 산다. “제가 총독이라면, 총독은 사또보다 높으니까, 용용 죽겠지, 다들 와서 보라고들 하세요! 아니면 와서 욕질하고 비방하라고 하세요. ‘양털 구하러 왔다가 자기 털 깎이고 돌아’갈 테니까요. ‘꿀을 만들어놓으면 파리가 빨아먹을’ 테고, ‘사람은 가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우리 할매가 말하곤 했지요. 그래서 재산 많고 부동산 많은 사람에게는 복수하지 말라더군요.”(2권,508쪽)이렇듯, 둘은 ‘말의 길’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기사도적 웅변에는 현장이 부재하고 완결된 이상만이 존재한다. 낱말들이 치밀하게 배열되고 고도의 수사학이 전체를 통괄한다. 그러나 현장이 없다. 현장과의 충돌이 없는 이상, 그것은 제자리를 맴돈다.

돈키호테는 이 동어반복의 쳇바퀴에 갇혀 있다. 어떤 상황, 어떤 대상을 만나도 그의 화법은 바뀌지 않는다. 기사도의 이상이 대상과 현장을 다 먹어치우기때문이다. 해서, 그의 웅변을 들으면 아무리 무식한 이들도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가 ‘미친 놈’이라는 걸.산초는 그 반대다. 속담은 질펀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상응하는 경험과 일상이 있다. 그러나 그 상황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없다. 그러기엔 지식과개념이 너무 부족하다. “산초가 점잔을 빼거나 박사처럼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 끝말은 거의 항상 소박성이라는 산 위에서 무식성의 심연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산초가 가장 멋있고 기억력이 좋아 보일 때는 상황에 딱 들어맞건 맞지 않건 간에 속담을 끌어올 때”(2권, 157쪽)였다. 한마디로 적응력은 최고다. 하지만 늘 단발성에 그친다. 해서 언제나 우왕좌왕이다.

통찰은 원리와 현장의 매끄러운 흐름


앞선 돈키호테와 뒤따르는 산초의 실루엣. 돈키호테는 방랑을 할수록 미치광이로 이름을 날리고, 산초는 방랑과 모험에 참여할수록 바보로 낙인 찍힌다.
사실 우리가 구사하는 화법들 역시 이 ‘사이’를 부유한다. 이상에 착목하면 현실이 증발돼버리고, 반대로 현장을 틀어쥐고자 하면 시야가 한없이 협소해진다. 결국 통찰이란 원리와 현장, 이상과 현실 사이의 매끄러운 흐름을 의미한다. 원리를 현실에 활용하고, 현장의 역동성이 원칙을 유연하게 흔들어주는식으로…. 물론 이것은 고도의 줄타기다. 긴장과 생동감을 동시에 요구하는! 진리에의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로고스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 실전을 방불하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말은 에너지고 파동이다. 한번 태어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변이할 뿐! 생장수장하면서 때론 어울리고 때론 맞선다. 돈키호테의 웅변과 산초의 속담 역시 그러하다. 1권에선 전자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권에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후자가 전자를 ‘찜쪄먹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산초가 하도 속담을 가지고 ‘개똥철학’을 떠들어대니까 돈키호테가 “자네 그 연설 끝났나? 산초?”, “이러다 내가 죽기 전에 제발 그 입 좀 막아야겠다”(2권, 259쪽)고 애원할 지경이다.

하지만 산초는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소인이 말을 하고자 할 때는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맞선다. 돈키호테는 절규한다. “이런 육시랄, 6만 악마가 와서 제발 좀 너와 너의 그 알량한 속담을 가져가라고 해라! 그놈의 속담을 한 시간 동안이나 줄줄이 주워섬기면서 그 하나하나로 그야말로 내게 물고문을 하고 있구나. 언젠가 자네 그 속담들 때문에 교수형을 받을 테니 명심하게. 그놈의 속담 때문에 자네 부하들이 자네의 정권을 빼앗거나 아니면, 그들 사이에도 민중봉기 같은 게 일어나고 말 걸세.” 속담 때문에 교수형을 당하고 민중봉기가 일어난다고? 이것은 일종의 전도된 유물론 아닌가?

언어가 물적 토대를 갈아엎는다고 하는! 여기에 대한 산초의 대꾸. “지금 바로 여기에 광주리의 배처럼 딱 들어맞는 속담이 한 네 개 떠오릅니다만 말을 안 해야지요.” 헐~ 쌈박하게 한방 ‘멕였다’. 헌데, 그에 대한 돈키호테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어떤 네 가지 속담이 생각났는지 궁금하구먼. 나도 기억력이 좋아서 내 나름대로 좋은 속담 하나를 떠올려보려 하지만 아무 속담도 생각이 나지 않거든.”(2권, 508쪽) 저주를 퍼부을 때는 언제고 그 속담들이 궁금하다니, 이쯤 되면 그도 이미 속담에 미혹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어지는 산초의 속담 퍼레이드. “‘두 사랑니 사이에는 네 엄지손가락을 넣지 말라’, ‘우리 집에서 나가, 그리고 내 아내와 무슨 할 말이 있어, 라는 말에는 대답이 있을 수 없다.’ ‘돌에 물통을 부딪치거나 물통에 돌을 찧거나 물통만 깨진다.’ ‘죽은 사람이 목 잘려죽은 사람 보고 놀랐다’.” 게임 끝! 산초의 판정승!

이거야말로 옥신각신의 전형이다. 이 싸움에서 보다시피 돈키호테가 자꾸 밀리기 시작한다. 자기도 모르게 속담이 자꾸만 튀어나오는 것이다. 속담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속담을 써가며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것. 산초가 이 허점을 놓칠 리 없다. “제 생각엔요,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고, 나리께서 꼭 그런 분 같아요. 냄비가 가마솥에게 ‘저리 비켜 이 까만 눈깔아’ 그랬다지요? 제게 속담 하지 말라고 나무라시면서도 나리께서야말로 속담을 둘씩 둘씩 끼워넣고 계시잖아요.”


언어의 실행과 용법에 주목한 철학자 질 들뢰즈 (1925∼1995). 들뢰즈와 같은 언어의 화행론자들은 돈키호테의 말 속에서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기괴해지는 ‘논리의 과잉’을 간파한다.
돈키호테의 변명. “이봐, 산초,난 속담을 사리에 맞게 끌어오잖아. 그래서 속담을 끌어대면 손가락의 반지처럼 딱 맞잖아. 그런데 자네는 속담을 도나 개나 머리채로 질질 끌고 온단 말이야.”(2권, 792쪽) 왠지 좀 옹색하다. 그 화려한 웅변술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꼭 맞을진 모르겠지만, 이럴 때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다. “꽃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유용하며, 양귀비는 미치게 하고, 잡초는 범람한다!”

웅변술보다 명쾌한 산초의 철학

이렇게 얽히고 설키다 보니 산초의 화법도 차츰 달라진다. 그에게서 사려 깊은 지혜와 철학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돈키호테의 웅변술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기사도의 이상은 흉내 내기가 쉽지 않다. 또 산초의 철학은 웅변술보다는 훨씬 깊이 있고 명쾌하다. 그럼 어떻게? 길 위를 떠돌면서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언어들이 깨어난 것이 아닐지. 1권 마지막에 산초가 고향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방랑기사의 하인 노릇을 한다는 건 고달픈 일이라고, 담요말이를 당하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한다고. 하지만 “사건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참 멋진 대사다. 그의 말대로 ‘길 위의 사건들’이 그의 속담에 지혜를 불어넣은 것이 아닐지. 다음의 대화를 음미해보라.

산초_ 제가 총독이었을 때도 즐거웠지만 발로 걸어가는 기사 하인인 지금도 슬프지는 않네요. 보통 운명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자는 변덕 많고 술 취한 여자인데다, 특히 무엇보다 눈이 멀었대요. 그래서 자기가하는 짓도 못 보고 누구를 넘어뜨렸는지, 누구를 일으켜 세웠는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돈키호테_ 대단한 철학자가 되었네 그려, 산초. 아주 사려 깊은 말이야. 누가 자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지 모르겠구먼. 내가 자네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운수나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는 걸세.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창조자라고, 내가 내 운명을 만든 사람이지.”(2권, 777)

이 정도면 둘은 주인과 시종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는 도반이라 할 만하다. 말과 말, 말과 사건들의 어울림과 맞섬, 그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삶이 탄생한다. 하여, 길은 로고스의 향연이다.

하나는 광인, 다른 하나는 바보. 돈키호테는 방랑을 할수록 방랑기사가 아니라 미치광이로 이름을 날리고, 산초는 그 방랑과 모험에 참여할수록 바보, 멍청이로 낙인 찍힌다. 헌데, 보다시피 둘 다 화법으로만 보면 참 멀쩡하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훌륭하기까지 하다. 돈키호테처럼 고상한 연설을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산초처럼 속담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이가 또 얼마나 있을까. 이런 ‘언어의달인’들이 어쩌다 희대의 미치광이와 둘도 없는 ‘멍청이’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세르반테스의 언어철학이 빛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언어란 무엇인가? 기호인가? 용법인가? 전자를 기호학, 후자를 화행론이라 한다. 소쉬르가 전자를 대표한다면, 후자를 대표하는 이가 비트켄슈타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천의 고원> 4장 ‘언어학의 기본전제들’에서 이 두 개의 관점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 전자가 언어를 정보와 기호로 파악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언어의 실행과 용법에 주목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입장은 당연히 후자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들은 모든 언어는 명령어라고 본다. “문법 규칙은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권력의 표지이다.”

전자의 입장에 따르면 돈키호테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문법적 관계에서만 보면 돈키호테의 웅변은 완벽하다. 주어와 서술어가 일탈한 적도 없고, 기승전결의 논리적 구조도 완벽하다. 그런데 그는 미쳤다! 아니, 그런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광기의 증거다. 미치지 않고서는 대체 누가 그런 화법을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기호론의 무능력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말은 기호와 정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용법이고 명령이다. 하여, 루카치의 말처럼, 돈키호테의 말과 행위는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영웅적이면 영웅적일수록 ‘그로테스크하게’ 작용한다. 그에 조응하는 현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논리의 과잉이다. 그래서 그는 ‘정신이 말짱한 미치광이’, 곧 총명한 미치광이다.

총명한 ‘미치광이’, 숭고한 ‘멍청이’

웅변이 과잉논리라면, 속담은 논리의 지독한 결핍이다. 오로지 상황논리만 있는 것이 속담의 세계다. 헌데, 상황은 무상하게 변한다. 해서, 그 상황을 대책없이 좇아가노라면 변덕이 죽 끓듯 하게 된다. 앞뒤가 안 맞는 거야 당연한 노릇이고. 그럴 때 바보가 된다. 돈키호테의 시종이 된 것만 해도 그렇다. 그가 보기에도 돈키호테의 상태는 ‘미친기’가 역력하다. 그럼에도 그를 따라 나선 것은 계약조건이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을 세우면 섬을 하사받을 것이고, 그러면 그 섬의 총독을 시켜준다는 돈키호테의 제안에 완전히 혹한다. 도무지 현실가능성이 없음에도 한번 욕망이 일어나자 그걸 제어할 ‘컨트롤타워’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엔 그걸 합리화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낸다. “제가 저 자신의 맥을 짚어보니 아직도 왕국을 지배하고 섬을 통치할 만한 건강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2권, 79쪽)


2013년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선보인 갈라 프로그램 <돈키호테>의 한 장면. 어린 시절 발레에 몰두했던 손연재는 공연을 통해 돈키호테 특유의 열정을 발랄하게 표현했다.
가장 어이없는 짓거리가 둘시네아의 마법에 관한 것이다. 2권 서두분에서 산초는 한 시골아가씨를 둘시네아라고 우긴다. 마법에 걸려 저렇게 못생겨졌다며. 돈키호테한테 배운 걸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하도 그럴싸해서 돈키호테조차 속아넘어갔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작부인에게 그걸 고백하자 이제 거꾸로 거기에 걸려든다. 공작부인은 그것까지도 연극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말고 진실로 믿읍시다…. 산초께서도 팔짝팔짝 뛰던 그 여자가 엘토보소의 둘시네아였고 둘시네아 그 사람이며 무엇보다 확실하게 마법에 걸려 있다는 걸 믿으세요.”(2권, 408쪽)

공작부인의 꼬드김과 설득에 꼼짝없이 넘어간다. 자기가 한 속임수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다니. 이게 바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처럼 산초에게는 논리는 제로, 상황은 200%다. 욕망과 상황의 흐름만 있는 현실주의자! 상황은 무상하게 변한다. 그래서 그걸 틀어쥐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돈키호테가 광인이 되고, 산초가 바보가 된 건 화법 자체가 아니라 그 화법이 놓인 배치에서 비롯한다. 광인과 바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 어떤 관계를 만나느냐에 따라 광인이 되고, 바보가 되는 법이다.

식욕과 잠과 말―존재의 삼중주

자, 그럼, 광인과 바보가 맞짱을 뜨면 누가 이길까? 앞에서도 보다시피 후자가 점차 우세해진다. 2부의 중반부에 가면 산초와 돈키호테의 모험담이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데, 이때 산초가 당당하게 주연으로 격상하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산초는 드디어 작은 마을에 총독으로 부임한다. 물론 다 공작부인의 작전이다. 헌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산초는 총독 노릇을 아주 훌륭하게 해낸다. 특히 주민들의 송사를 해결하는 일에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능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구사하는 속담이 바로 그런 현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속담의 야생성이 멋진 리더십으로 탄생하는 순간! 역시 문제는 배치다. 그 시간 돈키호테는 공작의 객실 침대 위에서 기사도적 판타지에 빠져 온갖 ‘뻘짓’–고양이들한테 물어뜯기고 꼬집히고–을 다 하고 있다. 주변 조건의 변화에 따라 산초의 바보짓은 점점 더 능동적인 관계를 열어가는 반면, 돈키호테의 광기는 더더욱 자신을 침몰시키고 있다.

웅변은 완벽하지만 외부로 통하는 루트가 없고, 속담은 지리멸렬하지만 외부를 향해 열려 있다. 이외부성이 웅변과 속담의 승패를 판가름한 듯하다. 그리고 그 외부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척도는 다름아닌 신체다.

말은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관통한다. 그 흐름이 파동을 만들고 에너지로 화한다. 이 파동과 에너지를 통해 타자를 만나고 관계를 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웅변과 속담의 차이는 두 사람의 신체성의 차이 이기도 하다. 다음의 대화를 음미해보시라.

산초_ 왕들의 높은 탑에도 가난한 사람의 초라한 움막에도 죽음의 발은 똑같이 밟고 온다네요. 죽음의 여신께서는 애교보다는 권력이 세고, 싫어하고 메스꺼워하는 게 없어 뭐든지 먹고 뭐든지 하고, 나이나 특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사람으로 자기 배낭만 채우면 된다네요.

돈키호테_ 사실 자네가 그 촌스러운 말투로 한 죽음이야기는 훌륭한 설교사나 할 수 있는 말이야. 자네에게 말하지만,산초, 자네는 천성이 착하고 사려가 깊어서 손에 설교대 하나만 쥐어주면 멋진 설교를 하며 그 세계를 돌아다닐 수도 있을 거야.

산초_ 잘사는 사람이 설교도 잘하지요. 소인은 다른 신통학은 모르옵니다.

돈키호테_ 그런 학문은 필요하지도 않아. 하느님에 대한 경외가 지혜의 기본인데, 하느님보다 도마뱀을 더 두려워하는 자네가 어찌 그리 아는 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란 말씀이야.

산초_ 남의 두려움이나 용기를 판단하는 문제에는 참견하지 마십시오. 사람마다 이웃의 자식이듯이, 저도 하느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고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리, 우선 이 먹을 것 좀 처리하게 해주시지요.(2권, 261쪽)

그러더니 산초는 자기 냄비를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돈키호테의 식욕까지 돋우었다. 그렇다, 문제는 식욕이다. 지적인 차원에서 보면 돈키호테가 월등하지만, 신체적 차원에서 보자면 산초가 한 수 위다. 돈키호테는 기본적으로 신장이 허약하다. 갑옷 속에 “물개가죽으로 만든 칼띠에 괜찮은 칼을 매달아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신장에 병이 있었기 때문”(2권, 225쪽)이다. 신장은 생식력의 토대다. 신장이 약하면 정력이 떨어지고 화(火)기가 치성해서 소화불량에 불면증에 시달릴 수 있다. 돈키호테의 증세가 딱 그렇다. 50이 넘도록 독신인데다 기본적으로 성욕이 없다.

어떤 여성한테도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둘시네아라는 가공의 이상형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식욕도, 수면욕도 없다. 그에 반해 산초는 신장의 기능이 탁월하다. 그의 유머와 재치도 원천은 거기에 있다. 의역학적으로 볼 때, 신장의 수(水) 기운이 발달하면 대체로 유머러스하다!(연암 박지원이 그런 경우다.) 또 정력이 좋은 만큼 식욕도 왕성하다. 산초에게 식욕보다 더 우선하는 건 없다. 어떤 환상이나 권위도 그걸 대신할 순 없다. 총독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린것도 그 때문이다.

잘 자는 거야 말할 나위도 없다. 산초는 여름에는 낮잠을 네 시간씩 자기도 하고, 밤에는 한 번도 두 번째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두 번째 잠이 없다고? 한번 잠들면 다시 깨는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산초의 잠은 늘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자는 거였기 때문인데 이는 산초가 체격이 좋을 뿐더러 항상 걱정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돈키호테는 걱정이 많아 늘 잠에 들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돈키호테가 잠들지 못하는 영혼이라면, 산초의 몸은 무사태평 그 자체다. 잠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어보시라.

주인에 대한 복종 같은 건 ‘개나 주라’


이탈리아 판화가 귀스타브 도레(1832∼1883) 가 1888년에 출판한 돈키호테 연작 중 <시에라 모레나 산맥에서 돈키호테에게 벌어진 일>.
“제가 잠자는 동안은 두려움도 희망도 수고로움도 영광도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들을 덮는 잠이라는 막을 발명한 자여, 복 받을지어다. 잠은 배고픔을 없애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요, 목마름을 쫓아내는 물이며, 추위를 막아주는 불이며, 열을 가라앉히는 차가움, 끝으로 목동이나 바보나 식자나 다 똑같이 똑같은 저울과 무게로 달아서 무엇이든 살수 있는 일반 공통 화폐니까요.” 이 도도한 설교에 돈키호테는 큰 감명을 받는다. “산초 난 한 번도 자네 말이 지금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네. 이걸로 보면 자네가 가끔 써먹는 속담,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고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진실인 걸 알겠구먼.”

(2권, 796쪽) 그에 대한 산초의 응답. “하느님 맙소사. 우리 주인나리님! 이제는 저만 속담을 주워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리 입에서도 저보다 더 심하게 둘씩둘씩 속담들이 쏟아집니다요.” 역시 산초의 한판승! 식욕과 잠과 말, 이 삼중주가 존재의 내공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돈키호테는 산초를 절대 능가할 수 없다. 산초는 생존의 기본권을 침범하는 건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위해 매를 삼사백 대쯤 맞으라고 부탁하자 산초는 거침없이 맞선다. “제가 어른의 자리나 왕 자리를 주고 빼앗고 할 자격은 없지요. 다만 제가 살려고 저를 도울 뿐입니다. 제가 저의 주인이니까요.” 그리고는 매질을 하려는 돈키호테를 때려눕히고는 이렇게 외친다. “여기서 죽으리라, 반역자여,/ 도냐 산초의 원수여!”(2권, 706쪽)

이 순간 주인에 대한 복종 같은 건 ‘개나 주라’는 식이다. 와우, 멋지다! 돈키호테가 죽을 때도 그렇다.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용서를 빈다. 자신처럼 미친 놈으로 보이게 하는 일을 시켰다면서. 산초에겐 남들의 시선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구!” “나리, 돌아가지 마세요, 주인 나리. 사람이 태어나 이 세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미친 짓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데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겁니다요. 다른 손이 목숨을 끊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우울 증세로 죽으시다니요.”(2권, 853쪽) 누가 죽인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냥 우울해서 죽다니, 이런‘미친’ 짓이 있나? 이게 산초의 인생관이다. 삶에 대한 무한 긍정! 어떤 고매한 이상과 성취도 이 생의 충만한 흐름 앞에선 ‘개코 같은’ 일일 뿐이다. 최후의 승자는 역시 산초다!

세르반테스에게 바치는 보르헤스의 오마쥬


2005년 5월 파네스 당시 주한 스페인 대사가 기자들에게 <돈키호테> 출간 4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언어는 권력이자 용법이고, 배치의 산물이다. 그것이 놓여 있는 조건에 따라 광기가 되기도 하고 지혜가 되기도 한다. 바보짓이 되기도 하고, 고매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돈키호테>가 뿜어내는 다중성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 이런 설정을 한층 더 과격하게 실험한 작가가 보르헤스다.

20세기 지성사에서 보르헤스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다. 20세기 중후반의 모든 사유에는 그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예컨대, 푸코의 <말과 사물>도 보르헤스의 분류법에서 시작한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황제에 속하는 동물, d)젖을 빠는 돼지, e)인어, f)전설상의 동물, n)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등등” 여기에는 공통의 장소가 없다. 하여, 통사법을 해체하고 통념을 전복시켜버린다. 왠지 돈키호테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가. 웃기면서 당혹스럽다는 점에서. 하긴 그렇다. 같은 스페인 문화권인데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특히 그의 단편집 <픽션들>은 중남미 문학의 걸작에 속한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이 있다.

제목대로 프랑스 작가 삐에르 메나르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그럼 당연히 원작 <돈키호테>의 ‘리메이크’거나 아니면 새로운 시대적 버전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헌데, 둘 다 틀렸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이 대목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부 9장에 있는 내용이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이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그럼 메나르의 작품은?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뭐야? 앞에 나온 거랑 똑같잖아? 그렇다!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고스란히 베낀 것이다.

헌데 저자는 이 작품이야말로 원작에 비해“무한정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극찬을 늘어놓는다. 논거는? 세르반테스는 자기 시대의 언어를 구사한 것이지만, 현대작가인 메나르가 쓴 것은 ‘17세기 스페인의 고어체’라는 것. 동시대에 <돈키호테>를 읽는 것과 전혀 다른 시간 대에 다른 장소에서 <돈키호테>를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논법이다. 그러니 원작과는 다른 아주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헐~ 좀 괴팍한 방식이긴 하지만, 이것이 바로 화행론적 관점이다.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가 놓인 배치에 따라 의미와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 본질이 아니라 관계가 선행한다는 것. <돈키호테>의 사상을 고스란히 재활용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보르헤스의 오마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마쥬를 통해 보르헤스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본과 복사본, 주체와 객체의 경계란 대체 무엇인가? 또 언어와 시대, 언어와 주체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등등. 그 질문들이 살아있는 한, 보르헤스와 더불어 세르반테스 역시 불멸한다. 하여, 저 17세기 초 스페인의 감옥에서 탄생한 돈키호테와 산초의 방랑과 모험, 그 길 위에서 탄생한 ‘로고스의 향연’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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