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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왕도를 말하다 | 조선의 권위에 도전한 인본주의자 허균 

군왕이 담화를 통해 그의 처형을 반길 정도로 왕조에 위협적인 이단아… 유·불·선에 통달하고 ‘홍길동’으로 백성의 마음 사로잡아 

박종평 역사비평가, 이순신 연구가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영화배우 류승룡(오른쪽)이 극중 허균 역을 맡았다. / 사진·중앙포토

“천지 사이의 한 괴물(天地間一怪物也)이다. (중 략) 그의 죄명(罪名)은 오늘날 신하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이다. (중 략) 이런 죄명을 진 사람은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가 일생 동안 해온 일을 보면 모든 악(惡)을 다 갖추고 있다(萬惡俱備).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더러운 행동을 보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요망한 참언(讖言)을 만드는 것이 그의 주된 기술이다.”[<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윤4월 29일]

“하늘이 낸 괴물(天生一怪物)이다. (중략)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에나 있었겠지만 이토록 아주 심하게 나라를 교란시키고 발호한 역적은 없었다. 이미 스스로 지은 죄이니 형벌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먼저 관작을 삭탈하고 엄히 국문해 실정을 알아내고, 빨리 상형(常刑)을 보여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시원하게 하소서.”[<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 년) 8월 22일]

이 전례 없는 악평, “천지 사이의 한 괴물”, “하늘이 낸 괴물”의 주인공은 <홍길동전>을 쓴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 1569 ~ 1618)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괴물 비난을 받은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괴물 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태종 때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인 어리(於里)가 있다. 그러나 ‘천지 사이의 괴물’과 같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허균이 유일하다.

오늘날의 ‘혁명적 지식인’ 평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문장력과 품행에 대한 평가가 중심이었다. 허균의 다음 세대 인물이었던 이민구(李敏求, 1589 ~1670)는 “재주는 펄펄 날렸고 총명함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바 아니다”고 했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허균의 시(詩) ‘사부고(四部稿)’는 선비들에게 널리 전해지고 있다. 구성과 격조는 그다지 고상하지 않지만 재주와 정감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곳이 있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안정복(安鼎福, 1721~1791)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한 인물”로 평가했다.

명나라 외교 전문가였던 허균이었고, 또 명나라 지식인들에게 우리나라 시를 소개했던 까닭에 명나라 지식인 사이에서도 허균의 문장력에 대한 평가는 대단했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간행한 <조선 시선(朝選詩選)>에서는 “허균과 그의 두 형, 허성(許筬, 1548~1612)과 허봉(許篈, 1551∼1588)은 문장으로 해동(海東)을 울린다, 그들 중 허균이 더 영민 하여 무슨 글이나 한 번 보기만 하면 잊지 않고 모두 외워 말했다”고 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 최고의 문인 중의 한 명으로 꼽혔고, 1601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허균을 통해 허균의 누이 난설헌(蘭雪軒, 1563 ~1589)의 <난설헌집>을 중국에서 간행했던 주지번(朱之蕃). 그는 허 균에게 관직을 물은 뒤, “이 사람은 명나라에서 태 어났어도 중요한 관직에 있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허균의 문장과 시는 조선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신흠(申欽, 1566~1628)의 말이 가장 정리가 잘된 평가다. “허균은 고서(古書)를 널리 외우고 유학·도교·불교 등에 관계된 책들도 막힘 없이 외웠다. 누구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호리(狐狸, 여우나 살쾡이) 혹은 사서(蛇鼠, 뱀과 쥐)의 정령(精靈)이 아닌지 모르겠다.”




허균이 1613년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쓴 편지.
“당신들은 법에 따라 살라, 나는 내 길 간다”

탁월한 시인이며 문장가라는 평가와 달리 그의 행동은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 빈번히 기록된 것처럼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었다. “경박하다”, “행실이 가볍고 망령되어 물의를 일으켰다”와 같은 것들이다. 심지어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을 당하고 난 뒤, 광해군은 반교문(頒敎文,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금이 반포하던 일종의 대국민 담화문)에서 “역적의 괴수 허균은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으며, 인륜의 도덕을 더럽히고 음탕함을 좇아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다했다. 기강을 업신여기고 상례를 버리고 스스로 공자의 도를 끊었다”라고 극언하며 처형을 기뻐하기도 했다.

다른 선비들의 기록인 <하담록(荷潭錄)>에서는 “허균은 어릴 때에 도참(圖讖)의 책을 써서 세상을 불안하게 했다. 문장은 일세에 홀로 우뚝하였지만 경박스럽기가 짝이 없었다”고 했다. <일사기문(逸史記聞)>에서도 “행실이 괴이해서 부모의 상을 입고도 기생과 놀아나고 참선과 예불에는 빠지지 아니했기에 듣고 보는 이들이 모두 놀랐다”고 비난했다. 안정복도 문장은 높이 평가했지만, 행동에 대해서는 “행실 을 단속함이 없고 어린아이처럼 경박하고 분별이 없어 음란하였고 욕망에 따라 음을 탐했다”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조선 시대에 허균을 혹독하게 비난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허균의 역모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1607년 삼척부사에 임명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뒤 쓴 ‘진 주고(眞珠藁)’에서 스스로 말했던, “예교(禮敎)로 어떻게 나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을까. 삶의 부침(浮沈)은 오직 정(情)에 맡길 뿐. 당신들은 당신들의 법 (法)에 따라 살라.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禮敎寧拘 放, 浮沈只任情, 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이라는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자유분방함과 불교와 도교 등 까지 공부했던 폭넓은 탐구심 때문이다.

근대에 와서 허균의 평가는 조선시대의 평가와 180도 바뀐다. 근대적 혁명적 지식인으로 본다. 철학자 박종홍은 “형식화된 도덕의 탈을 쓴 세도가들의 폭정 밑에 백성들의 인간성이 유전(流轉)되고 있음에 분노를 느낀 인물”로 평가했다. 박종홍은 “언제나 억울한 서민의 편에 서서 인간성의 의의를 밝히려 하였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인물”로 그의 인물 됨됨이를 묘사했다.




조선의 문인이자 허균의 누나였던 허난설헌 동상. 허균과 정신적으로 긴밀하게 소통했다. / 사 진·중 앙 포토
죽음에서 지혜를 얻은 인물

한걸음 더 나아가 국문학자 정주동은 허균의 시대 가 “서구에서는 중세기의 절대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한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 이뤄지던 때”라고 진단했다. 허균을 “조선의 절대의 권위 앞에 용감히 도전한 인간주의자”라고 덧붙인다.

허균의 시대, 16~17세기는 서구에서는 르네상스가 꽃필 무렵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기성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대격동이 일어났던 때였다. 문명의 중심이었던 명나라가 지는 해로 전락하고, 변방의 야만인인 여진족이 청나라 를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은 혼란기를 극복하고 통일했고, 팽창욕을 채우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했고, 좌절했던 때 이기도 하다.

조선은 창업 200년 시점으로 세종 때의 르네상스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지고, 부정과 부패, 극단의 대결로 국가의 존망이 바람 앞의 촛불이 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기득권 세력은 권력을 위해 아메바가 분열하듯 갈라져 싸움에 몰두했다. 권력층을 제외하고 국가도 백성도 모두 백척간두에 섰다.

허균은 사회의 구조적 폐해가 극심하고 백성의 통곡소리가 가득했던 그 시기에 태어났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정의감으로 지켜봤던 그였기에 “매양으리으리한 집을 지날 때면 반드시 침을 뱉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천한 사람을 더 사랑했다. 허균의 백성 사랑과 자유분방함 이 결국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不和)해야 했고, 특권층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던 원인이다.

그런 삶을 살게 된 원인은 자유분방함 탓도 있지만, 환경이 작용한 것도 크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근친들의 죽음이 잇달았다. 12세에는 동인(東人)의 영수였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이 세상을 등졌다. 20세에는 가장 의지하고 스승처럼 따랐던 둘째 형 봉이 관직을 버리고 유랑하다가 금강산에서 요절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 시대 삼당 시인(三唐詩人)의 한 명으로 꼽힌 이달(李達, 1539~1618)의 문 하에서 동문수학하며 정신적으로 가장 긴밀하게 소통했던 누이 난설헌도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요절했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24세에는 조선 역사에서 전례 없던 초대형 비극인 임진왜란이 일어 났고, 피란길에서 아내와 맏아들을 잃는 불행도 겪었다.

그가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것은 형 봉의 영향도 있지만, 그와 같은 반복되는 죽음을 목격하면서부터 유교는 말할 수 없으나 불교는 말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사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태도, 즉 부귀영화의 덧없음도 깨우쳤기에 그는 현실의 관습 과 각종 신분차별에도 분노할 수 있었던 듯하다.

관직 생활도 그런 까닭으로 순탄할 리 없다. 6번의 파직과 3번의 유배, 42일간의 의금부 감옥살이, 마지막 능지처참형을 겪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조용히 서생(書生)의 자리에서 살았다면, 당대의 문장가와 시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생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에서 세상을 바꾸려 했고,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했다. 그 자신이 쓴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처럼 변혁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분방함이 갖는 단점을 철저히 극복하지 못해 결국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원본. 서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소설이다. / 사진·중앙포토
이순신의 멘토 류성룡을 스승으로 모시다

심지어 이중 역적이란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광해군에 의해 역적이 되었고, 인조 때는 광해군 시절에 인목대비를 폐한 일로 인조에게도 역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의 이름은 회피의 대상이 되었고, 그가 쓴 다른 사람들의 비문에서도 그의 이름은 지워져야 했다.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복권되지도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시신도 누구 하나 수습하지 않아 버려졌고, 20세기 초에야 가묘(假墓)를 얻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소설이지만, 허균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나 다름 없다.<홍길동전>의 저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근거는 허균보다 15세 아래인 이 식 (李 植, 1584~1647)의 <택당 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에 전한다. “허균은 <수호전>을 모방해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그 무리인 서양갑(徐羊甲, ?~1613)·심우영(沈友 英, ?~1613) 등이 그대로 실행하여 세상을 소란하게 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서얼(庶孼) 출신 도둑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소설이다. 시대나 계층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꾸었던 이상향을 그린 유토피아 소설이다. 게다가 우리 한반도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해외국가 건설을 꿈꾼 소설이다.

대부분의 국문학자는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을 연산군 6년(1500년)에서 7년 초까지 가평·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명화적 홍길동(洪吉同), 명종 때의 양주 백정 임꺽정(林.正), 임진왜란 때 반란을 일으킨 왕실 서자 출신이몽학(李夢鶴)이 합성된 인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원균이 이순신을 해왕(海王), 즉 바다의 왕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실제로 이순신이 한산도를 거점으로 활약했던 점을 보면 홍길동에게서 이순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홍길동의 유토피아 율도국(栗島國)과 한산도도 비슷하다. 또한 허균은 이순신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고, 이순신과 같은 동네(서울 건천동) 출신이기도 하다. 이순신의 멘토였던 류성룡(柳成龍)을 허균도 스승으로 모셨다.

<홍길동전>의 배경이 되는 허균의 사상은 그의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민론>에서 그는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존재(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民之可畏, 有甚於水火虎豹)”라고 하면서,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이 그들이다. 항민은 현실에 안주하고 얽매이며, 시키는 일만 하며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원민은 늘 한없이 빼앗기면서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원망만 하는 사람들이다. 항민과 원민은 허균의 눈에, 또 지배세력의 눈에 두려운 사람들이 못 된다. 그러나 허균은 호민에 주목한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고서, 천지 사이를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그가 역사상의 사례로 든 호민은 중국 진(秦)의 멸망을 불러온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한(漢)의 멸망을 초래한 황건적(黃巾賊), 당(唐)의 붕괴를 가져온 황소(黃巢)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견훤(甄萱)과 궁예(弓裔)를 꼽았다. 낡고 부패한 나라의 종말은 이들 호민의 봉기가 그 발단이라고 본 것이다.




조선의 문인이자 허균의 누나였던 허난설헌 동상. 허균과 정신적으로 긴밀하게 소통했다. / 사진·중앙포토
한반도 최초의 해외국가 건설론

허균은 조선 땅이 좁고 험준해 백성 수도 적고, 또 백성들이 나약하고 착해 호민이 없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과다한 세금과 관리들의 부패, 국고의 빈곤으로 인해 조선에서도 결국에는 “불행스럽게 견훤과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라며 호민의 발생을 우려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호민의 봉기를 원했고, 홍길동은 그가 깨우고 만들고 싶었던 호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홍길동은 정2품인 판서(判書) 아버지를 두었지만,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기에 서얼에다가 노비 신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인이 평생 서러운 바는 대감의 정기(精氣)로 당당한 남자가 되었으나, 아비가 낳아주고 어미가 길러준 은혜가 깊음에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라고 울부짖었고, 결국 불합리한 제도를 바꾸기 위해 도둑이 되었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호소했고, 그의 호소를 전파하기 위해 <홍길동전>을 지었던 것이다.

홍길동이 바다로 진출해 창업한 율도국은 단순한 이야깃거리, 혹은 풍부한 상상력의 소치 그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바다는 소외된 금단의 영역이었다. 비록 신라 시대에 해상왕 장보고(張保 ., ?~846)가 있었고, 고려의 창업자 왕건(王建, 877~943)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예외일 뿐이었다. 그런데 허균은 소설이지만, 바다로 진출해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전례 없는 상상을 했다. 허균의 시대에도 분명히 바다를 건너온 일본군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했지만, 허균처럼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다.

허균은 당대의 다른 이들과 달리 바다에 관심을 가졌고, 그 바다 너머의 새로운 땅을 상상했다. 그가 훗날 실제로 역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허균은 대륙이 아닌 바다를 통해 그 자신이 꿈꾼 이상향을 상상했다. 바다 출신의 영웅 이순신, 일본 군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는 이른바 ‘해도 진인설(海島 眞人說)’이 유행했다. 즉 섬에서 진인이 출현해 잘못된 세상을 뒤바꾼다는 것이다. 18세기에 나타난 <정감록(鄭鑑錄)>에서도 “오랑캐인지 왜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쳐들어온다고도 했고, 새 나라를 일으킬 진인이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고도 했다.

<홍길동전>이 널리 퍼질수록, 해도 진인설이 확산될수록, 조선인들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계로 비쳤다. 허균의 해외 국가 건설론은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창조의 공간, 극복 대상으로 본 발상의 전환 사례다.

허균은 비단 혁명에만 심취한 게 아니라 현실을 개혁하고자 고뇌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에는 그 시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많다.

<학론(學論)>에서는 지식인이 학문을 하는 이유를 밝힌다. “학문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며, 홀로 제 몸만을 착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사심(私心)이 없이 공심(公心)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의 학자들에 대해 “입으로 조잘대고 귀로 들은 것 만을 주워 모아 겉으로 언동(言動)을 꾸미는 데에 지 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쏘아붙였다. 이는 오늘날의 출세지향적 지식인과 똑같은 모습이다.

<정론(政論)>에서는 임금과 임금을 보좌해주는 신하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했다. “예부터 제왕(帝王) 이 나라를 다스림에 혼자서 정치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보좌하는 신하가 그를 도와 주었다(自古帝王之 爲政也, 非獨自爲政也. 必以輔 相之 臣以助之, 輔 相者得其人).” 그러면서 그는 그 시대 최고의 신하로 이 이(李珥)와 류성룡을 꼽고 그들의 보좌 실패 원인을 최고 권력자인 임금, 선조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임금이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긴다(明以察其下, 信以任其臣)”는 것을 하지 못해, 결국에는 사심이 가득한 다른 신하들의 방해를 받아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율곡의 양병설 VS 허균의 여진 침공설

그는 300년 전에 관료주의의 병폐와 본질을 설파했다. <관론(官論)>에서 중앙 관직의 비대화와 실무 능력이 없는 관료들을 비판하면서 기구 축소와 능력 중심의 인재 배치를 강조했다. 이는 영국의 경영학자 파킨슨(Cyril N. Parkinson)이 현대의 관료사회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파킨슨 법칙’과 똑같다.

“하나의 관청에 한 사람이면 될 것도 모두 두 자리로 만들었거나, 많은 경우에는 13∼14명, 적은 경우에도 7∼8명 아래로는 없었다. 그런 뒤에도 각 관청은 각자의 업무가 많다고 고집한다.” 그 결과로 “권한은 분산되어 통일할 수 없고, 인원 증가에 따른 비용 증가로 예산만 낭비되어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서 변비로고서>와 <관동에서는 난리를 피할 수 없다는 설>은 외교관으로 명나라를 수차례 방문하면서 심각히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관찰한 결과물이다. 그는 이 두 글에서 여진족의 침략을 예측했다.

그의 우려에 대해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처럼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도 요동을 빼앗겨 구원할 힘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침략시 강화도로 혹은 안동으로 피난하면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내가 갈 수 있다면 저들도 갈 수 있다”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조정 신하들에 대해 “고기를 먹는 무리(肉食輩)들의 생각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그의 예측처럼 허균이 사형당한 뒤 9년 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8년 뒤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묘·병자호란은 허균의 주장처럼 여진족의 청나라가 침입했고, 명나라는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으며, 청나라 군대의 이동통로도 허균의 예측과 같았고, 또 순식간에 서울이 점령될 것이라는 것도 맞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율곡의 양병설은 한껏 높이 평가하면서도 허균의 여진 침입 대비론은 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허균은 그 시대에 가장 모난 돌이었지만, 국문학자 김동욱이 말했던 것처럼 허균은 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보다 “성실한 인간”이었고, “자아의식이 강해 자기 신념에 투철했던 인물”이다. 탁월한 식견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읽었던 사람이며, 민생을 고민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다. 허균의 재발견은 우리 시대의 임무이기도 하다. 아직도 허균의 문제의식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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