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정여울의 ‘자기 치유의 인문학’ | 참을 수 없는 타인의 무례함 

에티켓이 사라져가는 사회, 타인과 나 사이의 가장 아름다운 거리 찾기 무한한 존중과 배려가 개인과 사회의 운명 바꾼다 

◎ 정여울의 ‘자기 치유의 인문학’

예는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다. 남을 높이는 것은 실은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에피소드 하나. 한 청년이 버스 안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팡, 퐁, 틱, 쿠앙, 엄청난 데시벨을 자랑하는 기계음이 버스 전체를 시끄럽게 울립니다. 승객들은 얼굴을 찌푸리지요. 하나 둘씩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휴대폰의 소음을 줄이지 않는 청년을 한 번씩 의미심장하게 노려봅니다. 그 정도로 눈치를 주면 소리를 좀 줄여주겠지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득 담아서 말이지요.

하지만 청년은 지금 다른 세계에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의 즐거움을 조금 포기할 수도 있는, ‘사회성’이라 불리는 아주 소박한 규범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 타인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그의 세계에서는 지금 오직 ‘게임과 나’만이 존재합니다. 타인은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앞에서 어쩔 수 없이 투명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청년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넌지시 한마디하는 어른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청년은 분명히 겸연쩍어 하며 그 어른의 조언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은 누구도 그 청년을 쉬 건드리지 못합니다. 혹시나 더 큰 봉변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만인의, 만인을 향한 무한 공포의 사회.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지도 못하고, 예의를 권하지도 못하는 이중속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원인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치게 두려워합니다. 말을 걸어보지도 못한 채 일단 접촉 자체를 자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아, 미안합니다!’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무례를 사과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어떤 예측 불가능한 타인을 만나 내 조그만 권리를 박탈 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절’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예의의 형식조차 실종된 비매너들이 일상화된 사회의 진짜 문제는 타인을 향한 존중이 실종된다는 것이다. 해외 공익광고의 한 장면.
에피소드 둘. 사람들이 흔히 가는 음식점입니다. 온갖 맛깔스러운 한식을 소담스럽게 파는 집이라 가족단위의 손님이 많네요. 그런데 어떤 테이블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합니다. 대여섯 살쯤 되는 큰 아이는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사방팔방 뛰어다닙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아이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맛이 없다고, 심심하다고 떼를 쓰는 소리가 아주 커다랗게 울려 퍼집니다. 수십 명이 넘는 손님은 하나 둘씩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남의 테이블까지 오가면서 이리저리 숟가락통을 치고 화장지가 든 박스를 엎어버리기도 합니다. 작은 아이는 끊임없이 자지러지게 울어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묵묵히 밥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젓가락질을 하고 싶지만 아이가 쿵쿵거리는 소리,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는 작은 아이를 달래지도, 큰 아이를 제지하지도 않습니다. 대여섯 살쯤 되었다면 어느 정도 말귀는 알아들을 텐데요. 서너 살짜리 아이도 ‘조용히 하라’는 말은 알아듣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부모가 전혀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기가 막히기 시작합니다.

조심스럽게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흘겨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부모에게 ‘저기요’라고 말을 걸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저 사람들 왜 저래?’ 하면서 작은 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들은 있지만, 누구도 그 부모에게 항의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침묵과 ‘아무렇지 않음’이 사람들의 기를 질리게 한 탓이지요. 제 아이는 소중하고 그 엄청난 소음과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견뎌야 하는 타인의 안녕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인지요.

에피소드 셋. A씨는 새 아파트로 이사온 지 이제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새 집으로 이사온 기쁨도 잠시,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위층의 소음이 A씨의 밤잠을 설치게 했습니다. 위층에서는 밤낮없이 부부가 싸우는 소리, 아이들에게 윽박지르는 소리, 심지어 아이들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탁기나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도 밤 아홉 시가 넘어 들릴 때도 많습니다.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뛰어다닐 때는 거대한 빗자루라도 찾아 쿵쿵 위층 마루를 향해 두들겨주고 싶지만, A씨는 타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입니다. 뉴스를 보니 층간소음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이 나 살인사건으로까지 번졌다는 소식까지 들립니다. 매일 싸우는 부부의 악다구니를 듣고 있자니, 그 사람들 잘못 건드렸다가는 혼자 사는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겠다 싶습니다.

A씨의 모토는 ‘남에게 피해주는 짓을 하지 말자’ 인지라, 그는 아래층에 행여 자신의 발소리가 들릴까 봐 걸어갈 때도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스폰지형 귀마개를 끼고 자보기도 하고, 고가의 소음방지용 헤드폰을 사서 음악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는 윗집 아이들이 침대에서 뛰어내리기 놀이라도 하는지 하도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 텔레비전 볼륨을 좀 높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채 10분도 되지 않아 아래층에서 ‘세대간 통화’를 걸어와 조용히 좀 하라고 성화입니다. 혼자 사는 A씨는 이제 위층도 무섭고 아래층도 무섭습니다. 이사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사 가고 싶은 생각만 듭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에티켓이 사라져간다


지난해 10월 23일 고양 어울림누리 극장에서 청소년들이 공연예절 지키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현대인은 바로 이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든 세 편의 에피소드는 한국사회에서 음식점이나 전철이나 버스를 타본 사람이라면,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법한 아주 평범한 사례들이지요. 문제는 이런 사례들이 너무도 평범해져 더 이상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의 자유를 시도 때도 없이 침범하면서도 그 침해 당한 자유에 대해 전혀 항의하지 못하는 세계 말이지요. 편의성과 효율성을 위해 생산한 모든 기계가 정작 인간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가벼운 에티켓을 지키느냐 여부가 아니라 타인을 향한 존중의 태도가 점점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속도에 치중하는 삶, 경쟁에 목숨 거는 삶을 중시하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삶,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을 잃어갑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에티켓이나 매너의 종류는 전근대사회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매너란 문명화의 척도이고, 교양의 척도이며,무엇보다도 계급의 척도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더 많은 낯선 사람과 교제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사와 이메일, 악수 등의 ‘타인과의 접촉’을 경험합니다. 명함과 악수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뿐이지요. 어떤 상황에서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각기 다른 직책을 지닌 사람들 앞에서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전화나 이메일을 사용할 때 상대방에게 어떤 예의를 지켜야 하는지, 코스 요리 앞에서 어떤 식사 예절을 지켜야 하는지,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에서 어떤 예절을 지켜야 하는지, 극장이나 공연장, 경기장에서 어떤 매너를 지켜야 하는지, 면접시험에서는 어떤 매너를 보여 주어야 하는지, 프리젠테이션이나 자기소개를 할 때는 어떤 예의를 지켜야 하는지…. 이 모든 매너의 종류를 이토록 다양하게 습득해야 하고, 형식으로서의 예의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폭증했던 시기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상황 별 매너’나 ‘신분에 맞는 에티켓’을 강조하는 매뉴얼은 많아졌지만, ‘내용으로서의 예의’,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진정한 예의는 점점 실종되어갑니다. 현대사회가 다변화됨에 따라 예절의 형식과 종류는 폭증했지만 오히려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마음 깊은 곳의 예의를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적인 예절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서의 예의는 그 옛날부터 상극이었던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예절이 있는 곳에는 ‘지켜야 할 체면’이 있을 뿐 타인의 마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매너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야만의 반대말’로서의 문명, 그 상징으로서의 매너가 계급사회의 산물임을 지적합니다. 모두가 손으로 음식을 먹었던 시절, 식사예절이란 말은 필요가 없었지요. 그러나 귀족의 식탁, 상류층의 식탁이 다른 계급의 식탁과 스스로를 구별 짓기 하는 순간, 테이블 매너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매너라는 것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것은 형식과 겉치레를 중시하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셈입니다.

식탁은 때때로 헐렁한 식탁보로 덮였지만, 어떤 때에는 식탁보도 없고, 그 위에는 별로 많이 얹혀져 있지 않다. 술잔들, 소금통, 나이프, 스푼이 전부이며,이따금 빵조각이나 네모난 접시가 보인다. 왕과 왕비에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손으로 먹는다. 상류층에는 좀 더 품위 있는 예법이 있다. 즉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누는 거의 없었다. 대개 손님들이 손을 내밀면, 시동이 그 위로 물을 부었다. 물에서는 종종 동백이나 로즈메리 향기가 났다. 상류사회에서는 두손을 그릇 속에 집어넣지 않는다. 가장 고상한 태도는 한 손으로 세 손가락만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별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손가락에는 기름이 묻는다. ‘기름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빨거나 옷으로 닦는 것은 예의 바르지 않다’라고 에라스무스는 말한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 과정>(박미애 옮김, 한길사,2004)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식탁 위의 수많은 포크와 나이프를 보고 사용하는 순서를 몰라 당황하는 줄리아 로버츠(가운데)의 모습은 계급사회의 산물인 귀족의 식탁 예절을 조롱한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예절이 ‘야만’에 대비되는 ‘문명’의 증거로서 발전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인류가 ‘귀족형 예절’을 만들어 계급차별을 감행하고, 나아가 부르주아가 그 귀족들의 예절을 모방함으로써 귀족의 삶을 동경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 귀족형 예절을 유머러스하게 조롱하는 영화가 바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프리티 우먼> 같은 영화입니다. 온갖 샐러드와 포크로 가득한 호화로운 테이블 앞에서 어떤 포크와 나이프를 어떤 순서로 써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는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 그런 그녀의 귀여운 무지가 오히려 인수·합병을 논의 하는 심각한 비즈니스 상황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려주는 흥미로운 모습들이 이 영화에서 그려집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더욱 각박하게 만드는 요소는 이렇게 문명화 과정에서 섬세하게 조련된 ‘지나친 예의 차리기’가 아니라, 예의의 형식만 차리고, 때로는 그 형식조차 실종된 ‘비매너’들이 계급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상화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는 스스로를 낮춰 사람을 존경하는 것


예의는 신분과 나이와 지위를 떠나 사람 자체의 모든 것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기술이다. 공익광고의 한 장면.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오지요. “정중함도 예가 지나치면 고통이 되고, 신중함도 예가 지나치면 비겁함이 된다” 남의 지나친 예의를 걱정해야 하는 이런 행복한(?) 상황은 이제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강한 자들 앞에서 지나치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아첨쟁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과잉 예절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빛나는 것도,아무리 출중한 것도, 타인에 대한 존중의 예가 없다면 그 재능과 비범함이 돋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야비하고 영악해 보이기 일쑤입니다. “용맹에 예가 없으면 난폭하게 되며, 정직한 것에 예가 없으면 잔혹하게 된다.” 이 멋진 말도 <논어>에 나오는 것이지요.

예절을 연구하고 강조하는 수많은 말이 있지만, 공자만큼 예절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한 이는 없는것 같습니다. 임방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하지요. “장하다 그 물음이여. 예는 사치함보다 차라리 검소함이 낫고, 상례는 형식보다 진심으로 애도해야 한다.” 화려한 형식보다 소박함과 검소함을 택하고, 복잡한 겉치레보다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공자는 일찍부터 강조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진심이겠지요.

나의 안녕에만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부를 걱정하고 타인의 존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매너나 에티켓보다 중요한, 존재에 대한 기본적 예의이겠지요. <예기>는 예의 근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는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다.” 예는 그런 것이지요. 나를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을 높임으로써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도 예의가 필요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 자식 사이에도, 가장 친한 친구사이에도, 서로를 향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친밀함과 익숙함을 핑계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망각하곤 합니다. 가정이야말로 가장 상습적인 감정 폭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끔찍한 공간이 될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예의를 강조하느라, 윗사람도 아랫사람에 대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이나 신분에 따라 ‘존댓말’은 천차만별로 발달해 있지만, 아랫사람의 기분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윗사람의 멋진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요.

예의는 그 사람의 신분과 나이와 지위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모든 것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기술입니다. ‘버릇이 없다’,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보통 손아랫사람이나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많이 쓰지만, 아랫사람에게 마음껏 하대(下待)하는 사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어른들을 묘사하는 형용사는 별로 없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효’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부모도 자식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자식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지요. 무조건 아랫사람에게, 나이 어린 사람에게, 힘 없는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향식 예절을 강조하기 전에, 진정으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나이와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법을 배웁니다. 더 많이 배운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강한 힘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머리 숙이는 법을 배웁니다. 더 효율적인 것,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 더 빠른 것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낯선 이를 냉대하지 말라”

‘성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는 많지만,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기분을 항상 배려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아는 아이들이 모여 만드는 수많은 에고이스트들의 세상, ‘동굴속의 황제들’이 모여 ‘내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조르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까요. 존재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은 어른들에게도 늘 지속되어야 할 평생의 과제입니다.

얼마 전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갔다가 멋진 문장을 만났습니다. “낯선 이를 냉대하지 말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BENOT INHOSPITABLE TO STRANGER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 그 사람이 누구든, 몇 살이든, 어떤 직업이나 계급이든, 낯선 사람을 무조건 환대하라는 것. ‘그들이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라는 사족이 조건부의 친절이라는 혐의를 풍기기는 하지만요.

실제로 그리스 신화에는 초라한 나그네로 변장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가 그들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홀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진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가장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들, 찢어지게 가난한 노인들만 남겨두고 그 도시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장면도 나오지요. 환대라는 것은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우선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따뜻한 배려를 선물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환대의 문화를 원래부터 갖고 있었지요. 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이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조선사람들이 보여준 엄청난 환대였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손님을 맞는 모습, 주인이 아무리 가난해도 손님을 위해서는 가장 아끼는 음식을 내놓는 무한한 배려심에 그들은 놀랐다고 합니다. 이웃 간의 정(情)이 사라져가는 사회,낯선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가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 아이들도 다른 곳에 가면 차가운 냉대를 받을 것이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홀대를 받을 것이며, 인간은 누구나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한 공포인 사회를 만들어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할까요?

타인의 운명마저 바꾸는 힘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사진)은 자신을 인간으로 대접한 신부를 만나 이타적 인간으로 거듭난다. 타인에 대한 존중은 사람의 운명마저 바꾼다.
<레미제라블>에는 사람의 운명까지 바꾸는 경이로운 친절과 환대의 힘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평생 ‘도둑놈’의 낙인이 찍혀 취직도 할 수 없고, 여관방에 투숙조차 할 수 없고, 심지어 음식점에서 먹을 것을 사먹을 수도 없게 된 장발장을 아무런 조건 없이 환대하는 신부님의 모습입니다. 신부님은 장발장을 ‘나의 형제여!’라고 부릅니다. 도둑놈, 쓰레기 같은 놈, 죄수번호 몇 번이라는 식의 가혹한 호칭에 길들여져 있던 장발장은 깜짝 놀랍니다. 자신을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사람을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보았던 것입니다. 신부님은 장발장이 촛대를 훔쳐가서 경찰에게 잡혀온 순간까지도, 장발장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처음 본 장발장을 무한한 환대의 정신으로 감싸줍니다.

저 촛대는 원래 장발장의 것이라고 하얀 거짓말까지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은식기를 내주며 그것도 다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인(聖人)의 친절이라고요? 보통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는 지나치게 과격한 친절이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부님의 그 조건 없는 환대가, 아니 조건 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타인을 향한 무한한 존중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사실입니다. 장발장은 타인에게 괄시받고 핍박받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도울 기회를 끊임없이 엿보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신부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 하면서요. 자신을 처음으로 한 사람의 어엿한 인간으로 존중해준 신부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면서요. 인간을 바꾸는 것은 형벌이나 차별이나 억압이 아닙니다. 인간을 끝내 바꾸는 것은 조건 없는 환대이고, 계산 없는 친절이며, 저울질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201410호 (2014.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