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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이진수 시인의 충남 청양(靑陽) - 칠갑산 자락에 깃들어 사는 ‘어머니들’과 회복(回復)의 땅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후해 살기 좋고 쉬어 가기 좋은 곳… 최익현·민종식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 바친 의병의 고장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clickj@joongang.co.kr〉
청양 땅에 사는 어머니들, 칠갑산 자락에 깃들어 사는 어머니들은 거의 모두가 흙바닥에 손발을 심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기계 힘을 좀 더 빌리게 되었을 뿐 흙을 가꾸는 것은 여전히 맨손이고 맨발이다.

청양은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후하다. 도시에 나가 살다가 지친 아들과 딸이 돌아와 쉴 수 있는 청양은 모두의 고향이 되기에 모자라지 않는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 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숱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국민가요 ‘칠갑산’이다. 노래에만 있는 산인 줄 아는 사람도 있지만, 칠갑산은 실제 존재하는 산이다. 충남의 중앙에 위치한 청양의 대표적 명산이다. 이 노래를 만든 작곡가 조운파(71) 선생은 칠갑산이 냇물(지천) 건너로 보이는 부여군 은산면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았다. 칠갑산이 있는 쪽이나 없는 쪽이나 행정구역이 다르고 냇물이 사이를 갈라 흐를 뿐 한 동네처럼 애경사를 돌보며 구순하게 지내던 땅이다.

“어린 시절 내 정서 속에서 칠갑산은 전부나 다름 없었다. 고향집에서 보이는 산이 청양의 칠갑산뿐이었으니까.” 선생의 회상처럼 70여 년 전의 이 지방 산촌에는 밭뙈기 한쪽 겨우 부쳐먹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민초들로 가득했다. 특히 어머니들의 지난한 삶은 어린자식들의 가슴에 뽑아낼 수 없는 연민과 꿈을 동시에 심곤 했다. 조운파 선생의 ‘칠갑산’ 탄생 이야기를 가까이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가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는〈청양신문〉의 기자가 2010년 그를 취재한 것이다.



국민가요 ‘칠갑산’의 탄생지

1977년의 일이다. 말이 등단시인이지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선생은 추석을 맞아 고향은산에 내려온다. 당시는 교통이 좋지 않아 서울에서 은산까지 오려면 공주·청양을 거쳐 무려 7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추석을 쇠고 다시 버스로 서울에 가는데 부슬비가 내렸다. 차 안에는 청양 5일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농사 이야기부터 가난 때문에 서울로 돈 벌러 보낸 자식 걱정, 딸아이 시집 보낼 비용 등 수많은 얘기가 버스를 채웠다. 문득 차창 밖을 보는데 칠갑산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 가난 속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10여 년간 극진히 모시며 농사일에 매달려 계신 어머니가 차창에 얼비쳤다. 집안 건사에 직업도 없는 자식 걱정까지, 땀 냄새 눈물 냄새에 베적삼 마를 날이 없었다.”

그는 또한 그 시절 가난한살림 때문에 식구 수를 줄이려고 형편이 좀 나은 집에 민며느리로 딸을 보내야 했던 동네사람을 떠올린다. “옛날에는 워낙 가난해서 어린 딸을 부잣집에 민며느리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사실은 집안일 하고 농사일하는 일꾼이었지. 어린 시절 남편이 일찍 죽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굶기를 밥 먹듯 살아가는 이웃이 있었어. 어느 부잣집에서 ‘딸을 민며느리로 주면 밭뙈기 한쪽 떼어 주겠다’고 하는 말에 ‘고생스러워도 배는 곯지 않겠다’ 싶어 어린 딸을 시집보낸 일이 있었지.”

조운파 선생의 ‘칠갑산’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흔아홉 골짜기 칠갑산 자락에서 지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이 그를 거쳐 시가 되고노래가 되고 위안이 된 것이다. 어린 딸을 민며느리 보낸 대가로 밭 한 뙈기를 받고, 그 밭에 콩을 심어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보듬어야 했으니 ‘포기마다 눈물’을 심는 것 말고 친정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홀어머니를 두고 민며느리로 떠나는 어린 딸의 심정은 또 오죽했겠는가.






칠갑산 도립공원 내 천장호 출렁다리. 길이가 207m나 되는 청양의 랜드마크다.
칠갑산에 깃들어 사는 어머니들

“칠갑산은 땅을, 콩은 강인한 우리의 민족성을 상징한다. 콩은 가물지만 않으면 산비탈에서도 잘 자란다. 콩을 심을 땐 한 구덩이에 세 알씩 집어넣는데 하나는 땅속의 벌레들이 먹을 거, 또 하나는 새가 먹을 거, 그리고 또 하나는 자라서 사람이 먹을 거….”

조운파 선생의 칠갑산에는 어머니들이 세상을 대하는 삶의 자세가 또한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필자의 어머니도 밭을 매는 어머니다. 논두렁 깎는 어머니다. 오래 전의 일이다. 전날 평소 주량보다 많이마신 술 때문에 새벽에 잠이 깼다. 물 한 잔 마시고 창 밖을 보니 텃밭 한가운데 어머니가 쭈그려 앉아 풀을 매고 계셨다. 4월 초순이었지만 추위가 남아 있었다. 화가가 그림으로 자신을 기록하듯 어머니의 모습을 글로 옮겼다.



새벽이 일찍 왔다/ 아직 몇 이랑은 남은 아침/ 군데군데 박힌 어둠 걷어내며/ 어머니 마늘밭을 매신다/ 때이른 눈발 속에/ 마늘쪽과 함께 묻었던 날들/ 근처에 돋아난 잡풀이며 근심이/ 호미 끝에 걸리고 거기/ 뒤숭숭했던 간밤의 꿈자리도/ 뽑아내면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자식들의 세간을/ 간추려 북을 돋우신다/ 고될수록 한 걸음 더 다가앉는/ 어머니의 호미질을 보는 나는/ 세상 넓은 마늘밭에서 땅속으로/ 여무는 무엇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호미 끝을 열고 들어가면/ 마늘밭을 매는 일이 또한/ 세상 한구석을 밝히는 일인데/ 어느새 마지막 랑에 앉으신/ 어머니의 호미 끝에서는/ 잎에 불을 켠 마늘줄기들/ 환하게 일어선다.

-졸시 ‘어머니의 마늘밭’ 전문



청양 땅에 사는 어머니들, 칠갑산 자락에 깃들어 사는 어머니들은 거의 모두가 이렇게 흙바닥에 손발을 심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기계 힘을 좀 더 빌리게 되었을 뿐 흙을 가꾸는 것은 여전히 맨손이고 맨발이다. 어느 날엔가 어머니와 말다툼을 했다. 논두렁에 풀이 많이 자랐는데 어머니는 낫으로 베어내겠다 하고, 나는 제초제로 손쉽게 해결하려 했다.

또 말을 다툽니다 엄니는 엄니대로 일꾼 사서라도 논두렁을 낫질하겠다 하시고 나는 나대로 제초제를 쓰겠다고 고집입니다 큰물이라두 져봐라 푸샛것들 아니먼 논두렁이 뭘 잡구 버팅기겄냐 하지만 논두렁 기는 일이 땅강아지 같이만 여겨지는 나는 땡볕에 병이라도 얻으면 어쩔 거냐고 힘도 돈도 덜 드는데 왜 그러냐고 부린 퉁명을 내쳐 부립니다 야야 말을 들어라 내 말은 그게 아니구 게딱지가 안 있냐 등딱지에 구멍이 나면 그 게가 온전헌 게냐 아닌 게냐 한해 농사에 서너 번씩 논두렁 깎는 게 맨등에 보리 꺼럭 지는 것보다 싫은 나는 또 금방 헛귀가 먹어 그예 광문 열고 들어가 농약통 지고 나옵니다 야가 시방 말귀가 까막귀로세 그러믄 야야 너는 네 터럭에도 제초제나 칠 일이지 뭣 났다구 면도는 허구 그러누 논두렁 함부로 봤다간 논 잡아먹기 십상일 테니께 두고 봐라 이눔아, 아마도 그럴 겁니다 엄니는 엄니대로 일생을 오체투지 논두렁 깎듯 사실 테고 나는 나대로 되나 안 되나 건드렁 건드렁 제초제 치듯 살 겁니다 여기서 별반 달라질 것도 없을 겁니다.

땅을 대하는 태도의 옳음은 이처럼 어르신들에게 있다. 요즘 사람들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절박함과 경외감으로 삶 전체를 땅에다 바치고 있다. 위 시처럼 ‘논두렁 하나 깎을 때도’ 평생의 경험과 지혜를 밑바탕에 깔아야 하는 것은 미래의 땅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청양구기자는 하수오, 인삼과 함께 3대 정력초로 불리며 어머니들의 가족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로 자리하고 있다.
장수를 가져다주는 약재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여러 방법 가운데 구기자라는 약재를 쓰는 법이 있다. 구기자는 장복할 경우 뼈가 튼튼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100세 이상 장수하면서 눈이 밝아지고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오래전부터 허리 아픈 데, 허약체질, 어지럼증, 두통, 당뇨병, 만성 소모성 질병, 폐결핵, 빈혈, 성기능 감퇴 등에 보약으로 쓰여왔다.

청양지역에서 재배되는 구기자는 한국 전체 생산량의 70%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 구기자에 관한 일화에서도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 일화는 중국 노나라에서 출발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청양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고, 거기에 더해 조선 태조와 관계된 이야기도 전한다. 내용은 이렇다.

“옛날 나라의 한 관리가 민정을 살핀 후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던 중 어느 마을에 이르러 고약스런 풍경을 보게 되었다. 나이 젊은 부인이 회초리를 들고 흰 수염이 난 노인을 쫓으며 혼내는 모습이었다. 얼마 안 가 부인에게 잡힌 노인은 무릎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모습을 본 관리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부인을 불러 세운 뒤 호통을 쳤다.

부인은 어찌해서 노인을 때리려 하시오? 삼강오륜도 모르시오? 하지만, 부인의 대답의 관리를 아연실색케 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나의 증손자요. 내가 내 아들의 손자가 말을 안 들어 때리는데 뭐가 잘못이란 것이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 관리는 너무 화가 났다. 이렇게 늙은 노인이 부인의 증손자라니, 나를 우롱하는 것이오, 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그래도 부인은 당신은 믿기 힘들겠지만, 우리 집에는 구기자라는 약재가 있어 평생 먹다 보니 나의 모습은 이렇게 됐는데, 저 증손자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말을 안 듣고 저렇게 늙어버렸으니 어찌 매를 들지 않겠소?

그때서야 관리는 태도를 바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부인의 나이는 얼마나 됐소? 내 나이는 이미 300세요. 그럼 구기자를 어떻게 먹어야 되오? 부인이 대답하기를 구기자는 1월에 뿌리를 캐서 2월에 달여 먹고, 3월에는 줄기를 잘라서 4월에 달여 먹고, 5월에 잎을 따서 6월에 차로 달여 마시고, 7월에는 꽃을 따서 8월에 달여 먹으며, 9월에 과실(열매)을 따서 10월에 먹으면 되오. 자초지종을 알게 된 관리가 집으로 돌아와서 부인이 말한 대로 구기자를 먹어보니 정말 그대로 되었다.”




시원한 물과 녹음이 어우러진 청양 칠갑호는 번잡하지 않은 휴양지다
조선 태조를 치료한 청양구기자

조선 태조와 관계된 일화는 어의가 행한 태조의 병 치료와 더불어 청양군 ‘운곡면’의 지명 유래가 연결된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고 정권을 잡은 지 20여 년이 지났다. 1410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위가 심해 태조의 건강 또한 좋지 못했다. 태조의 병이 악화되자 어의는 전국을 돌며 약초를 구하게 되었다. 어의가 충청도 청양과 예산 경계지역의 한 마을에 다다랐을 때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된다.

그 마을 백성들의 얼굴이 붉은 빛을 띠면서 주름살 하나 없이 탱탱했고, 100세를 넘긴 노인들도 300근 넘는 바위를 거뜬히 들었다. 어린아이들도 힘이 넘쳐 다른 동네 어른 두 배의 일을 너끈히 치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어의는 백성 하나를 붙잡고 비결을 물었다. 그 백성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한 나무를 가리키며 저 빨간 열매를 따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어의는 태조의 기력을 회복할 약재를 찾았다는 기쁨에 같이 갔던 군사들을 시켜 구기자 열매를 모으도록했다. 한양으로 돌아간 어의는 구기자를 달여 태조에게 올렸다. 태조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어의의 정성을 생각하며 구기자 달인 물을 마셨다. 하루 이틀 지나 태조의 기력이 나아지더니 마침내 보름이 지나자 태조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대륙을 호령하던 예전의 기상을 되찾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한 태조는 어의의 노고를 치하한 뒤 직접 청양 땅을 찾아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 마을에 ‘신선이 머물다간 구름계곡’이라는 뜻으로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청양구기자는 지금도 하수오, 인삼과 함께 3대 정력초로 불리며 어머니들의 가족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로 자리하고 있다.

청양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마음으로 찾아와야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청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 어디든 사연 없는 땅이 없겠지만, 청양 역시 역사적인 우여곡절이 많다. 그러면서도 청양 사람들은 묵묵히 지켜왔을 뿐 떠벌리지 않았다. 청양은 조용한 곳이다. 시끄러움을 찾아볼 수 없다. 가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서 가보면 으레 도시 사람들이 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후해 살기 좋고 쉬어 가기 좋은 곳으로 소문난 청양은 일상 탈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심신의 평안을 제공한다. 해발 561m에 지나지 않지만,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지닌 명산 칠갑산은 자연 그대로의 울창한 숲과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넉넉한 품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정산면 등 4개 면에 걸쳐 있는 칠갑산은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봄에는 산철쭉과 벚꽃으로 겉옷을 입고, 여름에는 한국적 천연림이 심신을 바로 잡아주며,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은 천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칠갑산에는 7개의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어 각자의 조건에 맞게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아늑하고 고즈넉한 장곡사 전경.



대웅전이 두 곳인 장곡사

70㏊의 울창한 수림 속에 아담하게 들어앉은 칠갑산 자연휴양림은 자연과 교감하면서 쉼을 얻을 수 있는곳이다. 쾌적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만큼 가족들의 단란한 휴양 공간 겸 어린이를 위한 자연학습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잔디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어가족단위나 단체행사에 알맞으며, 조성 막바지에 있는 칠갑호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지천구곡도 빼놓을 수 없는 자연학습장이다.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천렵도 가능하다. 지천구곡은 칠갑산에서 발원해 어을항천·작천·지천·금강천 등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금강으로 흘러든다. 온직리·구치리·개곡리·장곡리·작천리·지천리 등 냇물 양쪽으로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과 협곡이 아름다운 산수경을 자아내며, 물굽이가 유연하고 기암 괴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칠갑산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장곡사는 신라 문선왕(850년) 때 보조선사가 창건했다는 고찰 중의 고찰이다. 국가지정문화재 6점(국보 2점, 보물 4점),도지정문화재 1점을 보유하고 있다. 장곡사의 가장 큰 특징은 대웅전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의 대웅전이 하나인 것과 대별되는 것으로 전국 유일이라고 한다.

정혜사는 칠갑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인적이 드물고 너무나 조용해 수행도량의 풍모를 갖고 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 2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마곡사의 인명선사가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그 뒤 표충 원장이었던 송월선사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 1907년 일본군이 항일투쟁을 벌이던 의병대와 정혜사 승병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보고 한밤중 습격하여 사찰을 불태웠다. 이후 월파스님이 지금의 대웅전을 세우고 삼존불상을 봉안했다. 정혜사에는 오세창 선생이 쓴 ‘정혜사’ 편액이 걸려 있다. 정혜사는 한때 대사찰이었으며 소속 암자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혜림암(중암)·석굴암(상암)·서전암 등이 남아 있다.

정산면 천장호에 있는 출렁다리는 지난 2009년 개통한 청양의 명물이다. 길이 207m, 폭 1.5m, 높이 24m 규모의 현수교로 국내에서 가장 길고 동양에서는 둘째라고 한다. 다리 중간중간에 수면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투명 발판을 설치해 아슬아슬함을 더한다.

청양은 의병의 고장이다. 최익현이 있고, 민종식이 있다. 홍주의병의 주인공인 안씨 3부자와 안항식 의사가 있고, 곳곳마다 3·1만세운동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래서 청양을 ‘회복의 땅’으로 불리기도 한다. 국권과 민생을 위해 바친 목숨의 향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모덕사 전경.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돼 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불법 늑약의 취소와 의병 항일전을 주창했다.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투쟁을 호소했으며, 일제에 대한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촉구했다. 하지만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양의 유학자 민종식이 구성한 의병과 연대, 항일투쟁에 나선다. 이후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항거를 계속하다 숨을 거둔다.

현재 청양에 있는 모덕사는 본래 경기도 포천 출신인 최익현 선생이 이사와 살던 곳(목면 송암리 장구마을)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돼 있다.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06년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 1913년에 공덕사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다. 8·15광복 후 사우를 중수하고 고종의 밀지 내용 중 ‘모경숙덕(慕卿宿德: 그대의 큰 덕을 사모함)’에서 ‘慕’자와 ‘德’자를 따서 모덕사라고 했다. 1982년과 1985년에 유물전시관·장서각 등을 건립하고 고택을 보수했다. 1982년부터 관리사무소를 두고 청양군이 관리하고 있다.


장곡사의 가장 큰 특징은 대웅전이 두 곳이라는 점이다.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으로 나뉘어 있다.
구한말의 의병장인 민종식 선생은 이조참판까지 지냈으나, 1895년 을미사변 후에는 청양 정산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최익현 선생 등과 합류했다. 이후 충남 서부지역인 서천·비인·판교·남포·보평·청양 등을 점령하고,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홍성)까지 점령했다. 일본군과의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뒤에는 공주 등지에서 피신생활을 하며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6년 일진회원의 밀고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또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에 ‘청대사’라고 하는 사당이 있다. 이곳은 홍주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안창식·안병찬·안병림 3부자와 안항식 의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당시 행정구역 체계상 말이 홍주의병이지 실제 이 거의(擧義)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현재의 청양 거주민이었다. 특히나 안씨 일가의 거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가문의 후일을 송두리째 바친 것으로서, 그 숭고함은 만 년이 가도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엄연히 청양에 있고, 그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물려받은 땅을 지키고 있기에 청양은 회복의 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청양은 지금 인구 3만 3천 명이 되지 않는 시골이다. 어찌 보면 떨어진 런닝구를 입고 콩밭을 매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살아 있기에 도시에 나가 살다가 지친 아들과 딸이 돌아와 쉴 수 있는 고향도 있는 것이다. 청양은 모두의 고향이 되기에 모자라지 않는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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