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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중국 인권운동가 천광청의 외로운 성전(聖戰) - “70%의 중국인 법 밖에서 고통받아” 

언론의 자유, 노동 3권 보장과 같은 인권운동이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나라 … “중국은 잘사는 도시와 헐벗은 농촌으로 쪼개졌으며 경제성장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워싱턴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시각장애자용 자판기를 이용해 글을 쓰는 천광청. 그는 트위터 문자를 소리로 바꿔 보통 속도의 3배로 돌려 듣는다.
이 글의 주인공은 천광청(陳光誠)이다. 2012년 봄, 시각장애인으로 베이징(北京)을 탈출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1971년생 중국 인권운동가다. 무려 3년 동안 잊혀졌던 인물이지만, 최근 발간된 저서를 통해 다시 등장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인간 승리의 증거라 소개한, <맨발의 변호사(The Barefoot Lawyer)>가 책의 타이틀이다. ‘자유와 정의의 투사, 중국인 시각장애인(A Blind Man’s Fight for Justice and Freedom in China)’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미국에 이어 전 세계 7개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한국은 그 영역 밖이다.

<뉴욕타임스> 신간 소식을 접한 직후 천광청 주변인물들에게 인터뷰 신청을 했다. 테러 공포에 떠는 천광청과 직접 연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판사, 중국 탈출 후 연구원으로 머물렀던 뉴욕대학 관계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결과는 묵묵부답. 나중에 알게 됐지만, 천광청은 미국 지식 사회에서조차 껄끄러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압력이 배경에 있다. 천광청을 도울 경우 유형무형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뉴욕대학은 상하이(上海)에 대학 분점을 차리면서 천광청을 캠퍼스 밖으로 쫓아냈다. 지난 3월 16일 하버드대학 총장이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기 직전 천광청의 하버드 강연도 갑자기 중단된다. 천광청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조차 필자의 인터뷰 요청을 아예 무시한다. 시각장애인 천광청은, ‘돈의 화신’ 중국과의 시(關係)를 고려하는 사람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다.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환영받고 추앙받지만, 돈에 관련될 경우 기피인물로 전락한다.

필자가 천광청 인터뷰를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자주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한국이란 나라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3년 전 천광청이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한국·일본·타이완 같은 민주주의 국가의 경험과 지도가 중국에 필요하다.” 뉴욕의 한 강연에서 했던 말로, 중국 인권운동가가 한국 민주주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이미 흑백사진 속의 기억으로 넘어간 듯하지만, 한때 한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친 나라다. 삼권분립, 언론자유, 노동3권 보장과 같은 기본적 인권을 위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2015년 한국은 과거 민주투사들의 고결하고 순수하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386, 486세대로 대표되던 수많은 민주투사는 ‘그 나물에 그 밥’의 낡은 정치꾼으로 변해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국제경쟁력을 가진’ 제대로 된 그날의 영웅을 발견하기 어렵다. 북한의 인권도 정쟁 차원으로 격하된 지 오래다. 간도에서 이뤄지는 탈북자에 대한 탄압도 중국과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고려해 유야무야 넘어간다.

한국 민주주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중국


▎천광청의 신간 <맨발의 변호사>. 전 세계 8개국에 번역될 예정이다.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발표된 것이 1959년이다. 인터넷도 없던 그 시대에, 멀고도 먼 헝가리의 민주주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고, 가녀린 소녀의 죽음에 슬퍼했던 나라가 한국이다. 그 결과 한국은 민주주의 자주국으로, 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문명 대국이 됐다. 그러나, 수많은 피를 통해 인류 최고, 최상의 가치와 원칙을 획득한 나라지만, 정작 자신이 창조해낸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감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너무 당연하기에 잊은 것일까? 아프리카·중동·중국·북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反)민주주의 행태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는 추세다. 금전·생존 우선주의 가치관과 외교만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월간중앙> 기고문에서 밝혔듯이, 3월 말 한국인의 리콴유(李光耀) 싱가폴 전 총리에 대한 추모 열기는 한국인의 ‘표류하는’ 심리를 잘 대변한, 좋은 증거에 해당된다. 88세까지 상왕(上王)으로 군림한, 아시아 최고의 독재자 중 한 명이 리콴유다. 민주주의 한국의 자존심은 내팽개친 채, 부자나라 독재자와의 추억에 잠기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 대통령은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그 같은 행위에 최선봉에 서 있다. 가치도 원칙도 없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논리다. 뉴욕에서 던진 천광청의 발언은 잊었던 한국인의 정열과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천광청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추억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에 슬퍼했던 한국인의 고결한 의식을 중국 인권운동가를 통해 다시 발견해내자는 것이 이 인터뷰에 매달린 가장 큰 이유다.

천광청을 만난 곳은 워싱턴 근처에 위치한 가톨릭대학이다(www.cua.edu). 이름에서 보듯, 종교를 기반으로 한 대학으로 특히 인권운동에 주목하는 곳이다. 천광청이 뉴욕 대학에서 쫓겨난 뒤 받아준 곳이기도 하다. 현재 교수급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인권운동을 펴고 있다.

필자는 주변에 시각장애인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 처음으로 접한 시각장애인이 천광청이다. 전화를 통해 가톨릭대학에 갔지만, 천광청이 알려준 장소는 가톨릭대학 전체를 알리는 주소다. 같은 주소 안에 위치한 빌딩만도 50개가 넘는다. 빌딩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천광청은 가톨릭대학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한다. 평소 다니던 길만 알고 있을 뿐, 다른 빌딩에는 간 적도 본 적도 없다. 모든 빌딩을 전부 돌아다닌 뒤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초여름으로 접어든 뜨거운 날씨 속에서의 첫 만남이다.

천광청의 손발 노릇을 하는 부인, 유안 웨이징(袁偉靜)과 함께 연구실 앞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을 껴안으며 뜨겁게 포옹했다. “당신을 만나게 돼 너무도 큰 영광이다.” 뭔지 모르지만, 만나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감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장님’을 상대로 한 중국이란 나라의 횡포가 천광청 부부의 해맑은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와 닿았다. 천광청의 손은 필자가 악수해본 사람 가운데 가장 두텁게 느껴진다. 손톱이 갈라져 있고, 상처와 흉터투성이다. 중국에서 얼마나 잔인한 일이 벌어졌는지, 손 하나만 봐도 충분히 알 듯하다.

18세에 초등학교 입학한 만학도


▎천광청의 <맨발의 변호사> 서문은 달라이 라마가 썼다. 천광청은 달라이 라마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말한다.
천광청의 인권운동 경력은 다른 중국의 인권운동가와 구별되는, 특이한 과정의 결과다. 천광청은 스스로가 인권운동에 매진하기로 작정한 인물이 아니다. 도시 출신도 아닌, 외딴 시골의 교육 사각지대 출신 장애인이다. 독재국가 중국이 만들어낸 척박한 환경에서 탄생된, 천광청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한 인권운동가다. 천광청은 18세 되던 때 초등학교 1학년 과정에 들어선 만학도다.

어릴 때 병을 앓으면서 시력을 잃는다. 라디오를 통한 정보가 천광청이 아는 세계의 전부다. 18세부터 시작한 학교생활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공부에 소홀했는지 절감했다고 말한다. 10년 만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끝내고, 28세 되던 1998년 난징(南京) 대학 중국의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당시 400달러가 없어 그만둘 상황이었지만, 대학 측의 배려로 공부를 시작한다. 2001년 대학 졸업 때까지 의학공부 외에 장애인보호 관련 법 공부도 열심히 한다. 이후 공부를 끝낸 뒤 고향에 내려가 병원 안마사로 일한다.

“제가 20세 되던 때 아버지가 저에게 책을 하나 건네줬습니다. 아버지는 공산당 학교에서 선생으로 재직한 분입니다.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건네준 책은 ‘장애인 보호법’에 관한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의 권리 같은 것을 담은 법률서입니다.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책의 내용을 기억했습니다. 라디오의 법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인 보호법이 어떤 것인지도 자세히 알게 됐습니다.

제가 활동에 나선 것은 1996년입니다. 저와 같은 장애인들의 경우 세금 감면 혜택이 있지만, 저의 고향인 산둥성(山東省) 이난 (沂南)에서는 무시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손자가 마비증세로 고생하는 장애인 노인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세금 감면은 물론, 거꾸로 정부로부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탄원서를 만들어 장애인 세금 감면과 지원 관련법을 지켜달라고 베이징 중앙정부에 호소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천광청은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지 않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으로서의 장애인 보호법을 ‘조목조목’ 알고 있었을 뿐이다. “1996년 베이징 탄원은 장애인 보호법이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려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된 것입니다. 법을 잘 모르는 동네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주다가, 제가 알고 있던 법지식을 전해줬을 뿐입니다. 작정하고 인권운동가로서 나선 것이 아닙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들 앞에 섰을 뿐입니다.”

천광청이 환경운동에 주목한 것은 대학 재학 중이던 2000년이다. 역시 스스로 원해서 나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돕는 과정에서 ‘떠밀려’ 맡게 된 운명이다. 출발점은 고향에 들어선 제지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에 있다.

여성 13만 명 강제 임신중절, 불임시술 폭로


▎워싱턴 국립미술관 고흐 전시관에 선 천광청. 고흐가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시력을 되찾을 경우 가장 먼저 보고 싶다고 했다.
“공장 폐수로 인해 동물들이 병에 걸리고, 마을 주민들도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게 됐습니다. 저에게 찾아와 관련법을 묻더군요. 2000년 가을, 78가구와 함께 베이징에 탄원을 했습니다. 아무런 답이 없어서, 2004년 300가구와 함께 다시 베이징에 탄원을 했습니다.”

당시 천광청은 지방정부가 토지법을 악용했다는 사실도 함께 고발한다. 천광청이 주도한 탄원은 마침내 2005년초 지방정부 법원의 판결로 성공한다. 1996년, 천광청은 이미 중국 전역 장애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장애인 가족 관련 탄원서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후 2005년 제지공장 관련 탄원이 받아들여지면서 일반 농민과 환경운동가들의 대변인으로 다시 한번 더 추앙된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악행과 무능력을 찾아내 고발하는 천광청을 적으로 받아들인다. 2005년 9월, 지방정부는 천광청을 ‘반중국 외세주의자’란 혐의를 씌운다.

장애인 보호법과 환경 보호법에 이어, 여성 보호운동에 뛰어든다. 1가구 1자녀 정책과 관련해 고향 주변 13만 여성이 정부로부터의 폭력과 강제 임신중절, 불임시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광청은 정확한 통계자료를 갖고 베이징의 외신기자클럽을 찾아간다. 그리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참혹한 현실을 외신에 폭로한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유력 외신들은 천광청의 보고서를 기초로 대서특필한다. 천광청은 곧바로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중국공산당은 폭력과 회유로 대한다. 천광청이 외국 자금을 받으며 반(反)중국운동에 나섰다는 자백을 하라는 것이다.

천광청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2006년 8월 중국공산당은 기물 파손과 폭동 선동혐의로 4년 3개월 감옥형을 선고한다. 시각장애인을 폭도로 몰아세운 중국 정부는 전 세계 인권운동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천광청 석방운동은 글로벌 인권차원에서 진행된다. 천광청이 4년 3개월 형을 받았던 2006년말, 시사주간지 <타임>은 천광청을 글로벌 인물 100인으로 선정한다. 천광청은 이후 2010년 3월까지 51개월을 전부 채운 뒤 출감한다.

천광청은 ‘1가구 1자녀’ 정책에 맞서 싸운 선구자인 동시에, 본인 스스로가 1가구 1자녀 정책을 파기한 인물이다. 둘째를 낳은 뒤 어떤 불이익을 당했는지 물어봤다. “딸을 낳은 것이 불법이라면서 벌금을 내라고 하더군요. 2006년 겨울인데, 당시 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다리도 못 펴는 곳에서 25명이 한꺼번에 숙식을 해결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곳이지요. 2만5천 위안(약 300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벌금인데, 수감 중이던 저에게 돈을 내라고 하더군요. 감옥에 있는데 어떻게 지불할 수 있느냐고 말하니까, 공안요원들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더군요. 자식을 원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생명체 본연의 권리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명분으로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그 같은 천리(天理)를 저버린 집단입니다.”

천광청과 부인 유안과의 결혼 전후의 얘기는 필자가 들어본 인간의 정리(情理)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게 와 닿는다. 두 눈을 잃은 남성과 중국에서 가난한 여성과의 결합이다. 유안의 얘기다.

인간의 정리(情理)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만남


▎1. 워싱턴 국립미술관 정문의 동판을 손으로 확인하는 천광청 부부. 천광청의 손은 고문과 노동으로 인해 일반인보다 두 배 정도 두껍다. / 2. 미국의 상징 백악관 앞에 선 천광청 부부. 당분간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2001년, 취직이나 인생 상담에 관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전화를 통해 사정을 얘기하는 방송인데, 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에 400위안(6만원 정도)로 살아가야만 하는 저의 어려운 사정을 라디오를 통해 상담했습니다. 천광청은 그때 라디오를 듣고 있었습니다. 저의 어려움을 충분히 공유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두 눈이 없는 천광청 자신의 어려움과 함께, 저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과 같은 감정을 피력했습니다. 전화와 편지를 통해 얘기를 나누다가, 2001년 말 아예 천광청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2003년 결혼을 하고, 그해 말 첫 아이를 얻었습니다. 둘째는 2년 뒤인 2005년입니다. 첫 아이를 낳고 곧바로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남편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기 위해서입니다.”

궁금한 나머지 천광청에게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물어봤다. “라디오 방송 마지막에는 상담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줬습니다. 재빨리 기억해놨지요.”(웃음)

천광청은 4년 3개월 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는다. 가택연금이다. 외부출입이 금지된 상태에서 좁은 공간 속에서 공안요원들에 의한 고문과 폭력이 주기적으로 이뤄진다. “저의 작은 집 주변에 무려 7개 감시카메라가 설치됐습니다. 저를 감시하느라 투입된 돈이 무려 950만 달러라고 하더군요. 2012년 4월 탈출할 때까지 1년 7개월가량 그곳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채 생활했습니다. 전위예술가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던 아이 웨이웨이(艾未未)도 현재 저와 비슷한 가택연금 상태에 있습니다. 당시 저를 주기적으로 고문하고 학대하던 사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제가 탈출한 뒤 돈 문제로 다른 가족들을 살해한 뒤 자신도 자살했다고 들었습니다. 감옥과 가택연금 당시의 힘든 상황을 아직도 꿈을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악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천광청의 두 자녀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생활한다. 12세 아들과 10세 딸이다. 영어가 어느 정도인지, 미국에서의 생활을 부인 유안에게 물어봤다. “메릴랜드주 공립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최고의 시설과 교육이념을 갖춘 곳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중국에서의 악몽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펴낸 책을 보여주자, 몇 페이지 보다가 더 이상 못 읽겠다고 하더군요. 애들은 아버지가 공안들에게 고문당하던 모습을 전부 지켜봤습니다. 책 속에 그 같은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오니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중국 공산당은 저희 애들에게 수업에도 참가하지 못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학교에 가도 급우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의 얘기지만, 애들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2012년 4월 27월, 천광청은 자신이 직접 출연한 비디오를 중국정부에 보낸다. 당시 총리 원자바오(温家宝)에게 보낸 세 개의 요구조건을 담은 영상물이다. 가족을 불법 고문한 지방정부 관계자 처벌, 가족에 대한 안전보장, 법에 의한 법 집행 요구 등 3개 조항이다.

7개 감시 카메라를 따돌린 시각장애인의 탈출


▎<맨발의 변호사> 안에 설명된 천광청의 탈출로. 7개의 감시 카메라를 뚫고 성공했다.
천광청은 2012년 4월 22일 가택연금된 집에서 탈출한다. 행방이 묘연하던 상황에서 베이징 내 미국 대사관 안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미국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천광청을 보호한다고 발표한다. 중국은 즉각 내정간섭이라면서 송환을 요구한다. 밀고 당기는 과정을 통해 천광청이 중국 땅을 떠난 것은 5월 4일이다. 정치적 망명이 아닌, 공부를 위한 유학이란 형식으로 미국으로 떠난다. 중국에 남겨질 경우 보장한다는 갖가지 회유에도 불구하고, 천광청은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부인과 두 자식도 5월 14일 미국에 도착한다. 뉴욕대학은 천광청이 미국 안착과 함께 시작한 새로운 터전이다.

필자는 천광청이 보여준 자유로의 탈출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해봤다. 카메라 7개가 달린 감시 체제를 시각장애인이 뚫고 나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좁은 시골동네에서 너무도 쉽게 발각될 것이란 불안감은 없었을까?

부인 유안은 말한다. “탈출은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미국에 오신 천광청의 어머니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줄곧 말렸습니다. 그렇지만, 천광청은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자유를 향한 정의로운 길은 반드시 성공한다. 공안요원들이 7개 감시 카메라를 전부 확인하지는 못한다. 처음에는 신경을 쓰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태해질 것이다. 그것이 공산당의 습성이다. 걱정하지 말고 탈출하자.’ 저는 남편 말만 믿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탈출하는 동안 남편이 병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불을 덮어 씌운 채 병 간호하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남편이 탈출한 뒤 너무도 걱정이 돼 잠을 못 잤습니다. 물론, 남편 탈출이 밝혀진 뒤 공안요원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 대사관 안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천광청의 탈출 과정은 두 눈을 가진 필자조차 엄두도 못 낼 용기의 연속이다.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빨리 뛸 수도 없다. 검은 안경을 쓴 시각장애인이기에 공안요원들이 쉽게 발견해낼 수 있다. 만약 잡힐 경우 공안요원으로부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상황이 외신에 알려질 리도 만무하다. 탈출 중 사고로 사망했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실제 그러했듯이, 그의 탈출을 지원한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도 이뤄진다. 천광청의 사촌은 탈출을 도와준 혐의로 현재 수감 중이다. 천광청은 집에서 미국 대사관에 가는 동안 무려 200번이나 넘어졌다고 한다. 다리 뼈가 부러지고,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상태에서 미국 대사관에 들어간다. 목발에 의지한 채 미국 땅을 밟은 것은 그 같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원래 천광청과의 인터뷰는 인류 최고의 가치이자 원칙에 대한 재확인을 목적으로 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타는 목마름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천광청의 행적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변하게 된다. 인권운동가(Human Right Activist)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하려 인간운동가(Human Activist)로서의 천광청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노동 3권의 보장과 같은 인권운동을 사치스럽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란 사실 자체를 증명하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 바로 천광청이다. 시각장애인이지만, 개·돼지가 아닌 평범한 인간과 똑같은 권리와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인간 승리의 상징이다.

“특권을 원하는 게 아니다, 법대로만 하라!”


▎천광청과 함께 선 필자. 백악관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고 해서 함께 갔다.
“제가 중국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법대로 하라는 겁니다. 법에 의한 지배를 상식으로 하라는 것뿐입니다. 특권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그 같은 상황이 불가능합니다. 1996년 베이징에 가서 탄원서도 올리고 했지만,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비행을 모르지 않을뿐더러 한층 더 썩어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유는 중국체제의 이원화에 있습니다. 법이 있습니다만, 법 위에 존재하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이들 공산당은 법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심지어 바꾸고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법을 지키고 싶어도, 공산당 간부들의 생각 하나에 이리저리 바뀝니다. 공산당 자체가 법 위에 존재합니다. 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모든 법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법에 의한 지배가 이뤄지기 위한 기본조건은 공산당이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사람들을 동물로 취급합니다. 그들 자신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인권이란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제가 할 일은 그 같은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고 중국인에게도 깨우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메시지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민주주의 없이는 인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이뤄낸 아시아의 모범국입니다. 중국의 많은 인권 지도자는 인권선진국 한국으로부터의 격려와 지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한국은 공산당 국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한국이 중국에 영향을 줘야 합니다. 한국민들은 한국 정부가 중국 공산당의 영향 아래 놓이는지 여부를 항상 감시해야 할 것입니다.”

천광청과의 인터뷰는 3일에 걸쳐 이뤄졌다. 지금까지 필자가 나눈 인터뷰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이다. 첫날 전체적인 얘기를 나누고, 둘째 날은 점심식사를 나눈 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백악관 구경도 함께 했다. 셋째 날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들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빈센트반 고흐의 작품도 함께 ‘느꼈다’. 저녁 6시30분에는 국립미술관 내 콘서트에도 참가해 바하와 모차르트 음악을 나눴다. 천광청은 고흐가 누군지, 인상파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고 말했다. 피아노 콘서트도 난생 처음이다. 전부 서툴고 어색해했지만, 천광청과의 인터뷰는 필자가 경험해 본 최고·최상의 만남으로 기억될 것이다. 시각장애인 인간운동가와의 만남이지만, 부처나 예수가 나타난다면 자신의 옆자리에 앉힐 숭고한 인물이 천광청이다.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고결한 인물, 그를 지지하고 믿는 바보 같은 부인, 그리고 두 사람을 성원하는 인류 모두의 응원이 인터뷰 내내 가슴속에 출렁였다. 부처와 예수가 보기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은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중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 물어봤다. “중국은 공산당 체제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외국 정보에 오픈되고, 인권에 대한 욕구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중국의 경제발전에 놀라는 듯 한데, 전부 껍데기만 볼 뿐입니다. 중국은 두 개로 나눠집니다. 도시 중국과 농촌 중국입니다. 제가 살던 농촌 중국의 참담한 현실은 어제나 오늘 변한 것이 없습니다. 평균 세 가구가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야 대학생 하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70%의 중국인이 가난하고, 법 밖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공산당은 태생적 한계로 중국인들의 요구와 요청에 응할 수가 없는 집단입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봅니다. 중국인의 인권도 향상될 겁니다. 물론 모든 상황은 1당 독재 체제 아래의 중국 공산당이 사라진 뒤입니다.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 워싱턴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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