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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4)] 이데올로기 사고의 원형, ‘브루투스 영웅론’ 

역사의 최종 평가자는 평균 수준의 장삼이사 

‘공화국 로마’ 옹호 위해 영웅 둔갑한 ‘존속 살해범’ 브루투스
환경·젠더·반(反)트럼프 등 오늘날 정치 선전에서도 활용


▎‘파시즘의 창안자’ 베니토 무솔리니(왼쪽)는 로마 재건을 명분으로 반대파 숙청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했다. 로마 베네치아 궁전 테라스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있는 무솔리니.
소프트 뉴스는 연말연시 신문 방송을 채우는 필수요소 중 하나다. 동물·어린이·자연을 통한 정신적·육체적 힐링이 어제의 반성과 내일의 희망을 위한 청량제로 통한다. 연말연시, 단 며칠만이라도 살벌한 삶의 전선에서 벗어나 즐길 뉴스들이다. 주류야 정치·경제·외교와 같은 하드 뉴스겠지만, 가능하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소프트 뉴스가 우선이다. 새해 첫 출산 소식이 그렇다.

그러나 최근 상황을 보면 그 같은 생각이 ‘꼰대의 전형(典型)’이란 느낌이 든다. ‘연말연시=소프트 뉴스’라는 공식은 옛말이란 의미다. 1년 365일 전의를 다지자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연말연시일수록 하드 뉴스가 한층 더 강세다. 지난해 12월 마지막 밤들을 수놓은, 여의도 정치의 횡포는 기억에도 선명하다. 연말연시 소프트 뉴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오해나 착각에 빠지기 쉬운 소식이다. “설마 저렇게 중요한 사안을 연말연시에 날치기로 처리할 수 있을까?”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사안이라면 연말연시 전후에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연말연시 소프트 뉴스의 종언(終焉)은 ‘소프트 뉴스를 가장한 하드 뉴스’라는 점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언뜻 보면 소프트 뉴스지만, 실제는 평시와 다름없는 하드 뉴스의 연장일 뿐이란 의미다. 귀여운 북극곰 사진을 통해 지구온난화 문제를 거론하다가, 돌연 미국이나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하는 식의 뉴스다.

신년 들어서기 무섭게 터진 로마 바티칸 교황청 발(發) 비디오는 ‘소프트 뉴스를 가장한 하드 뉴스’, 즉 신년 소프트 뉴스 종언에 해당하는 알맞은 예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동양계 여성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신년 전야 미사를 위한, 바티칸 바로 앞 성 베드로 광장이 무대다. 교황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신자들과 악수를 교환했다. 그 과정에서 갑자기 동양계 여성이 교황의 팔을 끌어당기며 뭔가를 외쳤다. 얼떨결에 끌려간 교황은 곧바로 화가 난 표정으로 여성의 팔을 두 번 내리치며 붙잡힌 손을 떨쳐냈다.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한 ‘소위 브루투스(so called Brutus)’ 흉상.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암살의 정당성을 웅변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바티칸 비디오는 사회관계망(SNS)을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비디오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동양계 여성의 행동은 교황을 만난 기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은 상대와의 조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 얻는 일방적 기쁨은 실례, 나아가 범죄나 악이나 진화될 수도 있다.

교황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황당한 경우를 만났다고 볼 수 있다. 교황 이전에, 84세 노인에게 벅찬 육체적 고통이 따랐으리라 믿는다. 주변에 아는 정치인에 따르면 하루 수백 명씩 악수하는 것만으로도 손과 팔이 아프다고 한다. 84세 노인의 팔과 손은 동양계 여성을 만나기 이전부터 건강하지 못하다. 특히 악수를 마무리 짓고 돌아서려는 찰나 붙잡혔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도 편하지 못했을 듯하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자신의 신체 일부가 ‘공격’당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일이 미국 대통령에게 닥쳤다면 테러에 준하는 행위로, 경호원이 총을 빼 들 만한 행위다.

정상적 판단을 한다면 비디오 속 동양계 여성의 무례함을 문제시할 듯하다. 그러나 신문·방송·SNS에서는 전혀 다른, 아니 정반대 의견들이 난무했다. 대표적인 것은 CNN이다. ‘교황은 신년 메시지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메시지 발표 몇 시간 전, 교황은 자신의 손을 잡은 여성(손등)을 두 번이나 때렸다(slapping).’ 인내심 잃은 교황이란 타이틀로 방영된 바티칸발 뉴스는 ‘교황=가해자, 동양계 여성=피해자’라는 식으로 묘사됐다. 비디오를 보지 않았다면, ‘평화의 사도가 보여준 여성폭력’이란 느낌으로 대할 듯한 기사다. SNS에서는 CNN과 비슷한, 아니 한층 더 한 논조의 교황 비난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최근 가톨릭계의 비행(非行)과 함께 ‘교황=위선자’로 비난하는 글들이 곳곳에 넘쳤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SNS에 떠도는 글 가운데 30%는 비난조다. 동양계 여성을 꾸짖는 글은 약 20%, 나머지 50%는 교황과 여성 모두를 비난하거나 별로 문제 될 게 없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는 상식이나 세계관과 전혀 다른 결과다. 그 같은 분위기를 파악한 듯, 교황청은 곧바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인내심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어제 벌어진 나쁜 본보기(bad example)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유감 표명은 2020년 1월 1일 교황이 보낸 첫 번째 메시지가 됐다. 상황을 지켜보면서 동양계 여성 본인의 생각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러나 필자가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동양계 여성은 표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얼떨결에 끌려갔다가, 여성폭력에 가담한 위선자 교황의 유감 표명만이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바티칸 해프닝이 벌어질 당시 필자는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 중심 외신과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황 발 뉴스는 이탈리아 생활의 일부다. 교황에 관련된 크고 작은 소식들이 늘 주변에 있다. 이탈리아인에게 ‘교황=여성폭력범·위선자’로 보는 생각이 어떤지 물어봤다. 10명 중 9명은 만약 똑같은 상황을 만났다면 교황보다 더 심한 ‘여성폭력’에 가담했을 것이라 말한다. 디지털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이탈리아 밖의 시선과 180도 다른 생각이다.

직접 대화를 통한 아날로그 여론, 그것도 가장 가까이서 생활 속에서 터득한 상식에 기반한 생각이라면 ‘결코’ 동양계 여성을 용서할 수 없다. ‘감히 교황이란 권위에 어긋나게’ 식의 상명하복 판단이 아니다. 교황을 여성폭력 위선자로 만든 무례한 장본인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평소에는 교황도 인간이라 말하더니, 일이 터지자 교황은 신이라면서, 신이 여성폭력에 나설 수 있느냐며 맹비난하는 사람들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인터넷 시대가 낳은 ‘무지·무책임·무신경’의 결과지만, ‘교황=여성폭력범·위선자’라 보는 사람이 곳곳에 있다. 상식을 얘기해도 ‘꼰대 논리’란 이유로 거부된다.

멀리 볼 필요 없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단상을 통해 충분히 절감할 수 있다. ‘1+1=2’라고 하면 시대정신을 못 따라가는 ‘꼰대’로 쳐다본다. ‘1+1=1’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1+1=1’이라 말하면 이번에는 바보라 비웃으며 ‘1+1=2’라 답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단과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환경·성별·성소수자·반(反)트럼프 문제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통하는 주된 명분이자 수단·방법이다. 아무리 무장을 해도, 어딘가 하나는 걸리게 돼 있다. 손등을 두 번 때린 교황이 여성폭력범으로 둔갑한 것은 약과다. 명망 있는 환경 운동가라도 플라스틱 빨대로 콜라를 마실 경우 그대로 퇴출이다.

한국에서 찾는 ‘브루투스 부활’ 징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긴 여성을 상대로 화를 내고 있다. 교황은 지난 12월 31일 신년 전야 미사를 마친 뒤 광장에 모인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 사진:연합뉴스
‘브루투스의 부활’은 필자가 주목하는 최근 한국 내 상황 중 하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당시 종신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를 암살한 브루투스를 영웅이라 찬미하면서, 카이사르를 정의에 반하는 악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세계관이다. 카이사르 한 명만이 아닌, 카이사르 생전에 함께 했던 지지자, 나아가 카이사르를 역사의 중심에 두고 브루투스를 변방에 둔 후세의 모든 사람이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크게 보면 브루투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기보다, 브루투스 이름만을 빌려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는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수단으로서의 브루투스일 뿐이란 의미다.

한국판 ‘브루투스 부활’의 구체적인 본보기로 어떤 것이 있을까? 넘치고 넘친다.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부활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최적의 예(例)다. 필자는 김재규를 비난할 생각도 그렇다고 해서 찬미할 생각도 없다. 갖가지 자료와 증언에서 보듯, 우발적 암살에 의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역사학적으로 의미야 있겠지만, 나라를 헌신한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는 반대다. 국가적 차원에서 ‘김재규 영웅론’이 등장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박정희 신자 여부를 떠나, 영웅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와 그 주변의 권위와 위상을 허물려는 생각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를 최종 평가하는 것은 평균 수준의 일반인들이다. 정치가나 어용 역사가가 나서 의도적으로 끌고 간다 해도 결코 오래가질 못한다. 이탈리아 문학의 최고봉이자 꽃으로 불리는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은 그 같은 진리를 깨쳐주는 증거다. 신곡은 카이사르 암살 1300여 년 뒤 출간된 책이다. 흥미롭게도 브루투스는 신곡 1편인, 지옥(Inferno) 편에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단테가 접한 불길 속 지옥은 크게 9등급으로 나눠진다. 7등급이 폭력범, 8등급 사기범의 영역이다. 최하의 9등급 지옥은 배신자로 채워져 있다. 비명조차도 지를 수 없는, 침묵 속의 고통만이 넘친다. 최소한 자기변명을 할 수 있는 폭력범·사기범과 달리, 배신자는 말을 할 권리조차도 없다.

단테가 만난, 9등급 지옥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배신자는 3명이다.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 카이사르 암살 주동자인 카시우스(Cassius), 그리고 브루투스다. 신곡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14세기 명작이다. 단테의 상상력에 기초한 책 내용이 사람들 가슴 속에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화국 재건을 위해 독재자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브루투스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옥행 그것도 최악의 9등급 배신자 영역만이 답이다. 국가적 이벤트로 브루투스 영웅론을 퍼뜨린다 해도, 카이사르의 독재를 아무리 비난해도, 결국은 지옥 9등급일 뿐이다.

러시아에서 되살아난 로베스피에르


▎2017년 3월 11일 경기 광주시에 위치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묘소 풍경. 전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인용 결정이 내려졌다.
보통의 힘을 안 믿는 사람도 많겠지만, DNA처럼 무의식 속에 드러나는 것이 평균 수준이다. 한국인의 평균 수준에 따라, 언젠가 ‘김재규 영웅론’이 나올 수도 있다. 2020년 필자가 보는 평균 한국인의 의식 수준을 보면 ‘결코’ 그 같은 상황은 닥치지 않을 듯하다.

신년 바티칸 해프닝에서 보듯, 이탈리아가 아닌 외국에서의 교황에 대한 비난이 한층 더 거세다. 무지·무책임·무의식은, 보통 공격적 행태와 함께 상대를 전면 무시하는 식으로 진화된다. 브루투스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카이사르 당시의 로마, 이후의 이탈리아의 상황을 모르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의 경우 브루투스 영웅론에 동의하기 쉽다.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는 평균 프랑스인이라면 언급하기 꺼리는 피의 혁명가다. 단두대를 통해 1만6594명의 목을 날린, 1789년 혁명 당시 공포정치(la Terre ur)의 핵이다. 그 자신도 이후 단두대에서 사라지지만, 흥미롭게도 1918년 11월 러시아에서 부활한다. 로베스피에르 입상을 통한 영광의 재현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후 1년 만에 레닌의 명령 하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영웅 모델로 떠오른다. 단두대 처형의 장본인으로 모두의 원성 하에 사라진 인물이란 점은 배제한 채, 1789년 혁명의 영웅으로서 러시아에서 재등장한 것이다. 프랑스인이 본다면 황당해할 일이지만, 혁명 당시 상황에 무지·무책임한 러시아인이 본다면 창조적 발상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평균 수준의 힘이 증명하듯, 러시아에서의 로베스피에르 영웅론은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한순간 반짝할 뿐, 프랑스인 마음도 사로잡지 못하는 판국에 러시아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옥 9등급의 불길 속에서 신음하던 브루투스를 역사무대에 올린 최고의 공로자.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다. 1599년 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붐을 불러일으킨 최대 요인이다. 제목과 달리 소설 속 주인공은 브루투스다. 고대 로마 역사학자들을 통해 간간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셰익스피어처럼 브루투스를 적극적으로 묘사한 작가는 없다. 간단히 말해 셰익스피어가 없었다면 브루투스에 대한 얘기도 로마사의 에피소드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보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편향된 시각에 견줘 보면, 브루투스를 대하는 셰익스피어의 세계관도 한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 보기 쉽다. 고대 로마, 이탈리아와 무관한 영국인 셰익스피어가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대다. 고대 로마, 이탈리아 출신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하이브리드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의 브루투스다. 김재규 영웅론으로 나가면서 박정희와 그 주변 역사를 파괴하는 식의 스토리와 무관하다. 카이사르도 영웅이지만, 브루투스도 영웅으로 최후를 마쳤다는 ‘윈-윈 영웅론’이 셰익스피어 소설의 핵심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영웅이란 단어 앞에 수식어 하나를 붙여 카이사르와 구별하고 있다.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브루투스다. 공화국 부활을 위해 카이사르 제거에 나섰지만, 신의를 배신하고 암살에 나선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한 위대한 인물로서의 브루투스다.

소설은 소설일 뿐


▎카이사르 암살 2년 후인 기원전 42년 빌립보 전투에서 패배가 확실시되자 자결하는 공화파 리더 브루투스. 독일 화가 헤르만 보겔의 작품 ‘브루투스의 자살(The Suicide of Brutus)’.
소설 속 브루투스는 자살 직전 카이사르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다. “카이사르여 이제 편안히 눈을 감으시라. 나는 (공공의 선을 위한 것이었을 뿐) 결코 그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당신을 살해하지 않았다(Caesar, now be still; I killed not thee with half so good a will).” 자살로 마감한 비극적 영웅에 대한 찬미·찬사는 카이사르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안토니우스의 독백으로 표현된다. 브루투스와 전쟁을 벌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추적한 인물로, 후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자살한 또 다른 비극적 영웅이다. “브루투스는 로마의 품격을 모두에게 알린 최고의 인격자다. 자연도 일어나 전 세계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브루투스야말로 진짜 위대한 인물이었다(This was a Man).”

로마 제정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브루투스 추격에 나선, 이른바 관군(官軍)이다. 브루투스에 관한 공적 기록이 남기 어려운 환경이다. 법으로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즉 기억 말살형(刑) 대상이 브루투스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고대 로마 전체를 통해 브루투스 흉상을 접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 관심으로 인해 열심히 찾아 나섰지만, 지금까지 본 ‘유사품’ 2개 정도가 전부다. 브루투스 본인 여부가 불확실한 조각이란 의미다.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접한 대리석 두상은 ‘소위 브루투스(so called Brutus)’란 타이틀의 조각이다. 그나마 당대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브루투스 조각물로 유명한 것은 로마 한복판 카피톨리니 박물관의 흉상이다. ‘카피톨리니 브루투스(Capitoline Brutus)’라 불리는 청동형 조각으로 기원전 3~4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 분위기가 나폴리 브루투스와 비슷하다. 수염의 길이, 대리석과 청동이 주는 느낌만 다를 뿐 동일한 인물이라 봐도 될 듯하다. 두 작품 모두 일직선 시선을 통한 강렬한 결의가 표류한다.

로마 카피톨리니의 주인공은 이름은 브루투스지만, 자살한 브루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정확한 이름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로,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 초대 집정관(consul)에 오른 인물이다. 집정관은 오늘날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국가의 얼굴이다. ‘카이사르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500여 년 전 조상에 해당한다.

루키우스 브루투스가 초대 로마 공화정 집정관에 임명된 것은 ‘왕국 로마(Etruscan Kingdom of Rome)’를 무너뜨린 대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왕국 로마 최후의 왕이 귀족의 부인을 겁탈하는 과정에서 왕에 반대하면서 아예 왕정 폐지에 나선 인물이 루키우스 브루투스다. 카피톨리니 브루투스는 기원전 509년, 공화정 로마를 창조해낸 최고 지도자에 대한 기념물에 해당한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제정 로마를 세울 때까지의, 공화정 건국의 아버지가 루키우스 브루투스인 셈이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에 관여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공화정 로마를 세운 ‘조상 탓’이라 볼 수 있다. 대를 이은 공화정 수호자들이다.

역사는 엘리트 뜻대로 안 흘러가


▎이탈리아의 화가 빈첸초 카무치니의 1798년 작 ‘카이사르의 죽음(The Death of Julius Caesar)’ / 사진:사이
필자의 상상에 불과하지만, 나폴리의 브루투스는 카피톨리니 브루투스에 기초한 모조품이라 생각된다. 공화정을 창조한 카피톨리니 브루투스는 제정 로마 황제라 해도 폐기할 수 없다. 제정 황제라 해서 공화정 로마를 결코 무시 배척하지 않았다. 끝까지 살아남은 공화정 창조자이자 수호자의 흉상을 젊은 브루투스로 바꿔 창조해낸 조각이 나폴리 대리석 흉상일지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는 제정 로마 황제조차도 흠모했던 공화정 체제다. 제정 로마 역사를 통해, 자살한 브루투스를 흠모한 로마인도 절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만난 ‘소위 브루투스’ 스타일의 조각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16세기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비극적 영웅’도 있지만, 단테의 지옥 맨 아래층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만 하는 것이 이탈리아 내 브루투스의 운명이다. 경천동지가 없는 한, 브루투스는 부활할 수 없다. 역사는 브루투스 영웅론, 아니 ‘사이비 브루투스’가 주도하는 소프트뉴스형 감성 이벤트가 아니다. 긴 시간에 걸쳐 하나씩 쌓아 올리는 국민 평균 수준의 결과다. 당장은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길어야 10년이다.

당장은 해괴한 명분으로 교황을 파렴치범으로 만들 수 있지만, 초대 교황 베드로 이래 2000년 이상 지속한 인간의 신뢰와 평균 수준을 허물 수는 없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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