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4)] 21세기 인류를 향한 태양신 아폴로의 예언과 경고 

미래를 보려거든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 문명은 금기와 비극 숨기지 않는 투명성에 바탕
암울한 미래 극복하고 운명 개척하려는 인간의 숭고함 찬미


▎터키 아나톨리아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 시데(Side)의 아폴로 신전과 지중해의 석양. 아폴로는 세상을 밝히는 예언의 신이자 태양신인 동시에, 전염병의 신이기도 했다. / 사진:유민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층 갤러리 162호실’

뉴욕에 들르는 지인이라면 반드시 감상하길 권하는 예술 공간이다. 수백여 종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상이 즐비하다. 필자가 특별히 권하는 작품은 신이나 황제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늙은 여성(Old Woman)’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높이 125㎝의 대리석 입상 조각이다. 특별 신분과 거리가 먼 이름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조각상은 1세기 로마에서 제작된 복제품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원본은 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 군사적·물리적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는 로마에 무릎을 꿇은 이류 국가다. 그러나 문명·문화적 차원에선 반대다. 정신세계에 관한 한, 그리스가 로마를 좌지우지한 일류 정복자다. 비록 짝퉁이라도, 대제국 로마는 그리스 예술세계 재현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미 10년도 넘었지만, 늙은 여성 입상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로마 짝퉁도 대단한 수준인데 원본은 어땠을까? 그러나 예술성 자체가 감동의 전부는 아니다. ‘무명의 늙은 여성’을 위한 대리석 조각상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감동을 불러일으킨 근본 이유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늙고 평범한 여성에 주목한 문명은 극히 드물다. 제작에 필요한 돈이나 예술가의 역량을 떠나, 늙은 여성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겠다는 의지나 의식 자체가 희박하다.

예수 어머니 마리아, 제우스 아내 헤라, 절세의 미인이라는 이집트 파라오 클레오파트라를 보자. 예외 없이 젊고 아름답고 신비하게 묘사된다. 한국의 최고가 오만원권 지폐 속 주인공 신사임당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이미지로 본다면 60대 여성으로 느껴지지만, 주름살 하나 없는 30대 후반의 고품격 얼굴로 묘사돼 있다. 젊고 강하고 아름답고 활기찬 인간을 묘사하는 것은 예술의 본분이자 가치다. 보는 순간 뜨거운 피를 느낄만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높이자는 것이 예술의 목적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름답고 빛나는 여성도 많은데, 주름살투성이 여성을 예술로 표현하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스 예술, 그리스인에 의한 문명·문화, 그리스인을 위한 세계관은 다르다. ‘결코’ 평범한 늙은 여성을 대리석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몸은 늙었지만, 정신과 영혼은 젊고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보다 더욱 숭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의 잔주름, 쳐진 가슴, 주저앉은 어깨, 힘없는 다리, 무심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표현한다. 늙고 약한 것은 인간의 기준일 뿐, 신의 관점에서 보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세계를 통해 드높은 품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의 세계관이다. 기원전 2세기 당시, 그리스 폴리스 한복판에는 신을 형상화한 조각과 더불어 농사꾼, 장사꾼과 같은 평범한 인간군상을 대리석 조각으로 승화해 전시했다고 한다. 메트로폴리탄의 늙은 여성 조각상도 그중 하나다. 오직 그리스만이 해낼 수 있는 위대한 세계관이다.

인간의 상식 뛰어넘는 그리스인의 미(美)적 관념


▎그리스는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하고 약하고 더러운 것조차 세상의 모델이자 경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와인 술잔에 그려진 배설하는 그림은 그런 고대 그리스 세계관의 증거다. / 사진:유민호
고대 그리스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지만, ‘투명성에 기초한’ 모두의 문화란 점이 매력적이다. 흔히 투명성이라고 하면, 비밀스러운 사실의 공표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소수가 독점하는 정보 공개가 투명성의 출발점이다. 그리스 투명성에는 또 다른 하나가 첨가된다.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추하고 약하며 악하기까지 한 사안의 투명성이다. 쉬쉬하는 사안을,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거침없이 공개한다. 가려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한층 더 강조해서 모두에게 공표하는 식의 투명성이다.

이탈리아 로마 박물관 어딘가에서 본, 음식을 토하는 노인의 모습이 그려진 술병이 기억난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제작된 술병이다. 보는 순간 대단한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밥공기 주변에 벌레로 들끓는 오물 그림을 그려 넣는 식이다. 술병 그림을 보는 순간 술맛이 확 달아날 듯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의 해석도 가능하다. 더럽고 추하게 표현했지만, 술을 마실 때는 절제하면서 적당히 마시라는 ‘경고’로서의 그림이다. 추하고 약한 것은 무시되고 잊히기에 십상이다. 늙은 여성 입상과 토하는 모습이 담긴 술병은 21세기 그 어떤 나라에 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그런 모습들이 예술로 표현돼 모두에게 공표됐다. 그리스 세계관에 기초한 투명성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비극은 그리스 특유의 투명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최적의 본보기다. 한 번만 봐도 평생 기억에 남을, 그 유명한 그리스 비극(Greek Tragedy)이다. 그리스는 희극보다 비극에 주목한 나라다. 잠시 웃고 넘기는 희극은 시간 때우기, 싸구려 오락 수준에 머물렀다. 무대 예술로서의 비극을 장식해 줄, 액세서리로서의 희극일 뿐이다. 통상 비극이라고 하면, 슬프고도 처절한 스토리로 풀이된다. 그리스의 비극은 다르다. 숨기고 싶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도전이 바로 그리스 비극의 실체다. 신에 관련된 터부나 성역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통하는 터부나 성역은 전부 부정한다. 늙은 여성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외면만이 아닌 내면에 주목하는 투명한 스토리가 그리스 비극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은 감정으로서의 눈물이 필요 없다. 냉철한 이성과 분명한 판단력이야말로 그리스 비극에 임하는 전제조건이다.

그리스 비극의 대명사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Oedipus)를 살펴보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는 근친상간 스토리다. 지켜보는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이다. 추하고 반인륜 스토리라는 점에서 입에 올리기조차 거북할 듯하다. 그러나 잔인하고도 전율할 스토리는 첫 공연 이후 2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왜일까? 투명성에 기초한 그리스 세계관이 인류 모두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식 세계관으로 풀이하자면 오이디푸스 스토리가 갖는 무거운 상황 설정이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정신 나간 왕이 아닌, 나와 인간 모두의 본능 속에 잠재된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을 2500년 전 그리스인이 가르쳐준 셈이다. 숨기고 터부시하면서 피했을 뿐, 전혀 황당한 얘기가 아니다. 꼭꼭 숨겨져 있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현실이자 비극이다.

잠재된 욕망을 현실로 끌어낸 ‘오이디푸스’


▎아폴로는 젊고 아름다운 예언의 신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미래는 알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아폴로가 사랑한 여성들과 미소년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 사진:유민호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도 일상 뉴스로 정착된 듯하지만, 부모를 살해하거나 거꾸로 자식을 죽이는 얘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성적인 관계로 이어진 가족 간 뉴스도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현실 세계로 들어가면 더 많은 사건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의 오이디푸스 상황은 ‘사건 발생 이후’의 뉴스로만 접할 수 있다. ‘사건 발생 이전’에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부끄럽고, 체면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것은 피해가자는 생각일 것이다. 2500여 년 전 그리스는 다르다. 그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미리’ 알려준다. 왜 근친상간조차 투명성이란 명분하에 모두에게 공표했을까?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이 갖는 무서운 운명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호기심으로 채워진 흥미로운 스토리 경연(競演)에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 살해’라는 최악의 비극이 연출되는 동안, 수많은 질문이 관객 개개인에게 던져진다. 당신이라면 저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해야만 할지,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지를 묻고 또 묻는 교훈의 무대다. 한국에서 어머니는 찬미의 대상이자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투명성에 기초한 그리스식 세계관에 따르면 성역은 애초부터 없다. 어머니이지만, 자신의 욕심을 위해 자식까지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이기적인 인간이란 점을 그리스인 모두에게 알린다. 간단히 말해 어머니도 악의 화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서구의 상식이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어머니가 악으로 등장하는 스토리를 본 적이 없다. 계모를 내세운 얘기는 있지만, 계모보다 더 나쁜 어머니 스토리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성역이자 터부다.

왜 그리스는 숨기고 싶은, 입에 꺼내기조차 불편한 얘기들을 ‘투명하게’ 내던지게 됐을까? 문명·문화적으로 볼 때 여러 배경이 있겠지만, 미래를 대하는 자세와 관심이라는 부분에 눈이 간다. 인간의 본능이지만, 자신의 미래와 자신이 속한 조직 사회 나라의 내일을 알고 싶어 한다. 놀랍게도 그리스는 그런 의문을 ‘일상생활’에서 풀어나간 인류 초유의 나라다. 답은 아폴로다. 고대 그리스에서 미래는 아폴로의 영역이다. 태양의 신 아폴로는 음악, 춤, 시, 나아가 활과 전염병을 주관한다. 세상만사를 다루지만, 특히 미래에 대한 예언은 아폴로만의 전문 분야다. 간단히 말해, 아폴로를 만나면 미래를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아폴로를 모시는 신전의 신관을 통한 예언, 즉 오라클(Oracle)을 매개로 미래상을 찾아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신이라도 공짜는 없다. 돈이나 제물 기부를 통해 감사와 존경의 뜻을 아폴로 신전에 전해야만 한다. 상상컨대 아폴로 신전이야말로 올림픽 12신 가운데 가장 바쁘고 방문객들로 미어터지는 곳이었을 듯하다. 21세기 서울에 비교하자면 신년맞이 운명감정소와 같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 신전은 신을 모시는 기능만이 아닌, 귀중품 보관소이자 은행, 나아가 식량 비축 장소로도 활용됐다. 미래 예언을 원하는 폴리스 내 수많은 사람의 정보가 교차하는 에게해와 지중해 정보교차로의 기능도 빼놓을 수 없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피로 범벅이 된 곳이 아폴로 신전 주변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아폴로의 예언이 반드시 밝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언은 일상사에서 통하는 언어가 아닌 메타포(metaphor) 형식으로 전해진다. 해석하기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애매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겸손하고 전심전력으로 신을 섬기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에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47년, 그리스 변방 에게해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에수스(Croesus)가 얻어낸 아폴로의 예언을 살펴보자. “크로에수스가 침공에 나설 경우, 하나의 왕국이 멸망할 것이다.” 크로에수스는 적인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다고 믿고 공격에 나선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정반대다. 공격에 나섰던 리디아의 멸망이다. 아폴로의 예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크로에수스의 오만이 나라 자체를 망하게 한 것이다.

‘예언의 신’ 아폴로와 크로에수스의 오판(誤判)


▎돌고래는 어린 아폴로가 위험했을 때 구해준 인연으로 아폴로의 상징이 됐다. 아폴로 신전이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 델피(Delphi)는 영어의 돌핀(Dolphin)에 해당한다. / 사진:유민호
아폴로의 무서운 예언은 그리스 특유의 투명성을 설명해주는 배경이 될 수 있다. 근친상간 같은 얘기조차 모두에게 알리는 것은 미래에 닥칠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폴로 예언이 그러하듯 미래는 죽음과 멸망의 함정으로 연결돼 있다. 밝고 희망찬 것보다 추하고 어둡고 힘든 것이 더 많다. 사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로 예언을 통해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상간이 이뤄질 것이란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무시하고 잊어버린다. 비밀로 간직하는 동안 사태가 더욱 악화된다. 숨기고 싶은 사안을 신의 이름을 빌려 모두에게 오픈하는 의식이 아폴로 예언이라 볼 수 있다. 아폴로 예언이 그러하듯 그리스 세계관에는 그 어떤 터부도 성역도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미래학이 없다. 일본에 부분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동양 전체를 통틀어 미래학에 관심을 갖는 나라는 전무하다. 문자로서의 ‘십년대계’, ‘백년대계’라는 통 큰 슬로건은 무성하다. 그러나 각론이 없다. 슬로건 하나로 지탱하는 것이 동양의 미래학이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 동양적 사고의 근저에 있다. 10년 뒤 아니 25년 뒤 한국의 경제 상황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10년 뒤 한국의 문명·문화 수준이 어떨지에 대한 얘기도 전무하다. 백번 양보해 굳이 떠올릴 수 있는 한국의 미래학이라고 한다면 ‘찬란하고도 희망찬 용비어천가’가 대세다. 통일 이후 세계 초강대국으로 떠오를 것이고, 세계가 한국을 우러러보며박수칠 것이라는 희망 사항이 미래학으로 둔갑해 남발되고 있다. 당연하지만, 밝고 힘찬 것이 미래의 전부는 아니다. 어둡고 척박하며 살벌한 내일도 있다. 정치적 차원의 보복성 경고는 있지만, 사회적·역사적·경제적·철학적·문화인류학적 차원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미래학은 전무하다. 어두운 결과를 발표할 경우 사회불안이나 유언비어 유포 정도로 추락할 수도 있다. 아폴로가 선보였던 어두운 예언은 애초부터 없다.

예언은 다가올 미래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


▎시데의 아폴로 신전에 남아있는 대리석 부조상과 기둥 조각들. / 사진:유민호
필자의 판단이지만, 예언의 신 아폴로는 미래학이 서구 학문 중 하나로 정착된 가장 큰 배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예언자가 등장한다.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관한 얘기가 신의 생각을 전하는 예언자의 주된 역할이다. 예수가 태어날 것이고, 그의 죽음을 통해 인류가 구원될 것이란 식의 예언은 구약성경의 수많은 예언자가 예견한 미래다. 7세기 등장한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유일신 알라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무함마드의 사명이다. 무함마드는 예수와 같은 신의 아들이 아니다. 신의 메시지를 대신 전하는 수많은 예언자 중 한명이다. 예언자의 설교를 통해 미래를 알고,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 기독교와 이슬람 신앙의 출발점에 있다. 미래학에 기초해 내일을 준비하는 식의 서구 세계관과 통하는 부분이다.

동양 종교는 어떨까? 불교를 살펴보자. 내용을 떠나 예언자를 통한 미래의 계시가 거의 없다. 예언자 혹은 선지자 역할이 불교에서는 미약하다. 수양과 수행을 통해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뿐, 신의(神意)를 받은 예언자의 영향력과 권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극락정토라는 죽음 이후 파라다이스는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미래에 관한 예언도 미약하다. 신앙 차원의 종교로 보기는 어렵지만, 유교나 주자학은 어떨까? 불교보다 더하다. 아예 예언자를 사악한 미신, 요술로 치부하고 근본적으로 배척한다. 사후세계에 대한 얘기도 극히 드물다. 지금 당장 눈앞의 문제만 중요할 뿐 내일에 대한 얘기 자체가 없다. 동양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를 뒤져보면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자나 신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뢰성과 권위, 사람들의 관심도에서 아폴로에 비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오감을 통한 체득과 경험이 세계를 이해할 첩경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식에 관한 얘기도 숨김없이 알리는 그리스의 투명한 정신세계, 그러한 문명·문화를 지탱하는 그리스인의 미래관, 나아가 서구에 통하는 아폴로의 위상과 의미를 피부로 이해하고 싶었다. 결론은 신전 방문이다. 터키 아나톨리아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 시데(Side)에 있는 아폴로 신전이 목적지다. 아폴로 신전의 원형은 그리스 델피에서 시작됐다.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200㎞ 떨어진 산중에 있다. 그리스어로 델피(Delphi)는 영어의 돌핀(Dolphin)에 해당한다. 지중해, 에게해에서 돌핀은 아폴로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로 통한다.

시데의 아폴로 신전은 지중해에 흩어진 수많은 아폴로 숭배지 중 하나다.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1세기 로마 때 대규모로 증축되면서 역내의 예언 중심 무대로 부상한다. 그리스 델피는 바다에서 10㎞ 떨어진 내륙에 들어서 있다. 시데의 아폴로 신전은 바닷가에 있다. 방문객을 맞이하기 쉽다는 의미다. 신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시장에다 21세기형 테마파크 같은 분위기로 변한다. 방문객이 넘치고, 상거래가 이뤄지는 비즈니스 센터이기도 하다. 신전은 기도를 올리는 곳인 동시에 테마파크처럼 활용됐다. 방문 기념품은 물론, 현지 특산물로 만들어진 음식도 팔았다. 그리스 시대의 바다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한다. 육로보다 해로가 훨씬 더 빠르고 안전했다. 지역 내 사람들이 시데에 모여 아폴로의 예언을 듣고, 기도는 물론 장사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질병에 맞선 인류를 향한 태양신의 충고

시데는 알렉산더 대왕 원정과 더불어 헬레니즘 문화권에 편입된다. 이후 이집트를 거쳐 로마 통치를 받으며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전성기였던 3세기에는 인구 6만의 비즈니스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시데로 들어가자 로마식 원형극장이 눈에 띈다. 로마 검투사의 결투장으로 활용됐을 공간이다. 다 허물어져 흔적만 있지만, 200m 길이의 스타디움도 시데의 명물 중 하나다. 그러나 그런 유물들은 로마가 남긴 속(俗)의 흔적에 불과하다. 그리스인에 의해 창조된, 신의 목소리를 담은 아폴로 신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닷가를 따라 들어가자 멀리 그리스풍 건물이 나타났다. 기둥 6개와 앙상한 지붕이 전부지만, 아폴로 신전이란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최근에 보수 개축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스 로마 유적지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됐지만, 원래 모습과 달리 최근 보수된 건물이 대부분이다. 대략 2000여 년 전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중해권은 화산지대로 연결돼 있다. 지진으로 무너지기도 하지만, 잘 다듬어진 대리석은 후세에 다른 곳에 옮겨져 재활용된다. 얼마 남지 않은 과거의 유물들을 조합해 재구성, 재건축한 것이 21세기 고대 유적지의 실상이다.

아폴로 신전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넓고 넓은 우주로 느껴진다. 지중해의 특징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수평선의 범위가 엄청나다. 크리스털 블루 바다가 해변에 펼쳐지지만, 조금 멀리 눈을 두면 시커먼 심연의 바다가 도사리고 있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리스 신전 주변에는 신비로운 ‘영(霊)과 혼(魂)’의 기운이 표류한다. 시데의 아폴로 신전도 마찬가지다. 뼈만 남은 앙상한 공간이지만, 신전 주변에 넘실대는 뜨거운 태양을 통해 신비로운 ‘정기(精気)’도 느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예언이 신전 내부 어디에서 이뤄졌는지 살펴봤다. 보통 신전 내부는 이중구조로 돼 있다. 신관만 들어갈 수 있는 내관과 방문객이 들를 수 있는 외관이다. 보통 내관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내관 중심에는 아폴로 입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때마침 석양이 신전 서쪽 끝 바다로 저물기 직전이다. 지중해의 태양은 오렌지색이다. 붉은 태양이 아니라, 진한 오렌지색이 그리스인이 본 아폴로의 빛깔이다. 아폴로 신전의 그림자가 석양과 함께 지표면에 길게 퍼져나간다.

아폴로 입상이 들어섰을 신전 내관 주변에 섰다.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폴로의 예언을 듣고 싶었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아폴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신 델피의 아폴로 신전 입구에 걸렸던 문구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2500여 년 전, 그리스 아폴로 신전에 들른 방문객 모두가 읊조렸다는, 인간 모두에게 내던져진 태양신의 경고이자 충고다. 그 유명한 경구,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σεαυτόν)’라는 말이다. 내일의 모습을 알기 전에 먼저 오늘의 나부터 정확히 이해하라는 메시지다. 그리스의 세계관은 약하고도 평범한 ‘나’에서부터 출발한다. 사회 국가, 세계, 우주를 논하기 전에 일상의 희로애락 속에 살아가는 나에 관한 철저한 이해가 기본전제다. 따라서 나를 모르면 미래도 없다고 풀이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나를 알면 미래도 보인다는 의미다. 태양이 뜨는 한, 아폴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메시지도 인류 역사에 던져진 영원한 숙제로 기억될 것이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07호 (2021.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