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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17)] 한국 창작 뮤지컬의 간판 '명성황후' 

꺼져가는 촛불을 되살리려 몸 바친 위대한 여인의 서사시 

탄탄한 스토리와 노래로 인기, 명성황후 재평가 계기 마련
25년 동안 200만 관객 모으며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 확인


▎이문열 원작 소설 [여우사냥]을 뮤지컬로 각색한 [명성황후]는 국내 창작 뮤지컬 시대의 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사진:에이콤
국내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은 크게 창작 뮤지컬과 라이선스 뮤지컬, 해외 오리지널 뮤지컬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창작 뮤지컬은 말 그대로 ‘국산’, 라이선스 뮤지컬은 해외 원작에 대한 허가(License)를 얻어 국내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을 뜻한다.

창작 뮤지컬의 역사는 예그린 악단이 1966년 공연한 [살짜기 옵서예]에서 비롯된다는 게 정설이다. 최창권 작곡, 임영웅 연출의 [살짜기 옵서예]는 고전 배비장전이 원작으로 당대의 톱 가수 패티 김이 주인공 애랑을 맡아 대성공을 거뒀다. 창작 뮤지컬은 [살짜기 옵서예] 이후 예그린 악단의 후신인 서울시 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 서울 예술단 등 공공단체들을 중심으로 제작됐다. 공공단체답게 우리 역사와 설화에서 소재를 찾은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들어 극단 현대극장이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레미제라블], [사운드 오브 뮤직], [에비타] 등 해외 화제작들을 잇달아 소개하면서 국내에 뮤지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90년대가 되자 다수의 해외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민간단체들이 창작 뮤지컬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우리의 이야기와 음악, 몸짓으로 뮤지컬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충만했던 의욕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뮤지컬’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연극에 노래를 얹은 작품이 많았다. 해외 작품에 친숙한 팬들의 눈높이를 맞추기에는 완성도가 많이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당시로써는 아주 획기적인 창작 뮤지컬 한 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에이콤의 [명성황후]였다.

창작 뮤지컬 역사에서 하나의 변곡점으로 평가받는 [명성황후]는 김희갑 작곡, 양인자 작사, 윤호진 연출로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을 맞은 1995년 초연됐다. 국내에서 일대 신드롬을 일으킨 뒤, 1997년 미국과 영국에 진출해 한국 뮤지컬의 역량을 본토에 소개했다. 명성황후는 2021년 25주년 기념 공연까지 2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창작 뮤지컬의 역사를 새롭게 써오고 있다.

[명성황후]의 장기흥행에는 무엇보다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등 뮤지컬 빅 4로 대표되는 서구 뮤지컬의 성공 패러다임에 한국의 역사와 미학을 접목한 기획력이 큰 몫을 담당했다. 뮤지컬 빅 4는 아름다운 음악과 탄탄한 극본에 화려한 스펙터클 요소를 결합해 탄생한 문화상품이었다. 이에 자극받은 유럽 뮤지컬들 역시 빅 4의 문법과 공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야기와 볼거리를 집어넣어 영미뮤지컬과는 색다른 감성을 창조해냈다. 1992년 초연된 비엔나 뮤지컬 [엘리자벳]이 대표적이다. [명성황후]도 이 흐름을 수용했다. 빅 4의 패러다임에 우리만의 이야기와 감성을 담아낸 것이다.

한국 역사와 미학을 뮤지컬 패러다임에 접목


▎[명성황후]는 로이드 웨버-팀 라이스 콤비의 [에비타](1978)와 비교할 만하다. 실존했던 여걸이라는 점과 각각 영부인과 국모로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유사하다.
[명성황후]는 먼저 당대 최고의 작곡가-작사가 콤비를 영입했다. 중견 작곡가 김희갑-작사가 양인자 부부가 주인공이다. 김희갑·양인자 콤비는 조용필의 히트곡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을 비롯해 무수한 히트곡을 양산한 대중가요계의 전설이다.

뮤지컬은 작곡가와 작사가 콤비의 예술이다. 멀리 로저스&해머스타인 콤비를 시작으로 로이드 웨버&팀 라이스 콤비, 실베스터르베이&미하엘 쿤체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재능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켜야 한다. 여기에 대중 음악인들의 뮤지컬 진출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였다. 엘튼 존, 에릭 울프슨, 실베스터 르베이 모두 팝 음악에서 맹활약하다 뮤지컬에 뛰어들었다. 김희갑-양인자 콤비는 [명성황후]를 50여 곡의 노래로 이루어진 오페라 스타일의 뮤지컬로 만들어냈다. 작가 이문열이 쓴 원작 [여우 사냥]을 토대로 양인자는 우리말의 어감을 살린 깊이 있는 노랫말을 만들었고, 이 위에 김희갑의 웅장하고 한국적인 멜로디가 어우러졌다. 호주 출신의 음악감독 피터케이시의 편곡도 작품에 세련미를 더했다.

형식에 관한 한 뮤지컬 빅 4와 똑같은 틀을 갖추게 되면서 ‘연극인지 뮤지컬인지 모르겠다’는 논란은 사라졌다. 김희갑-양인자 콤비는 [명성황후]의 성공을 발판으로 [킬리만자로의 표범](1999), [몽유도원도](2002) 등의 창작 뮤지컬에서 잇달아 호흡을 맞췄다. 이어 한국적인 스펙터클의 구현을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명성황후]의 시대배경이 구한말의 궁중이라 한국적인 스펙터클이 가능했다. [엘리자벳]과 비슷하게 우리만의 화려한 궁중 의상과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무대에서 재현할 수 있게 되었고, 호위 무사들과 일본 낭인의 칼싸움 장면 역시 다이내믹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 관객은 물론 해외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낼만한 볼거리가 곳곳에 배치됐다.

인물의 재해석: 민비에서 명성황후로


▎뮤지컬 [명성황후]의 하이라이트이자 명성황후가 죽어간 이들과 함께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나 인터내셔널가와 같은 전율을 선사한다.
한국은 뮤지컬 후발국이다. 후발국은 선진국의 장점을 빨리 흡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창의성과 개성을 담아야 한다. 수많은 창작 뮤지컬이 ‘한국적인 것’을 주장하면서 외국 사람이 봤을 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와 지루한 음악을 보여주고 들려주었지만, [명성황후]는 서구 뮤지컬의 문법을 유럽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현명하게 흡수했다.

웅장한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영상을 통해 1945년 8월 히로시마 상공에 떠 있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보인다. 연도를 표시하는 숫자가 거꾸로 바뀌다 무대가 밝아지면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명성황후 살해범 공판 장면이 펼쳐진다. 재판장의 심문에 피고 미우라와 공범들은 일본 천황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다짐할 뿐이다.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그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는다.

[명성황후]의 성공을 당시 ‘민족주의 마케팅’(요즘 말로 하면 ‘국뽕’쯤 될 것이다) 덕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을 활용했다는 뜻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구한말 일본 낭인들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최후는 지금도 한국인의 피를 끓게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 마케팅’을 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국뽕’을 넘어선 다른 무엇이 있었기에 [명성황후]의 성공은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인물의 재해석이었다.

이 뮤지컬이 등장하기 전 명성황후 민자영의 공식 명칭은 ‘민비(閔妃)’였다. 역사 시간에 배웠던, 또 TV 사극에서 익히 봐왔던 그녀는 ‘시아버지(흥선대원군)에게 대든 며느리’, ‘사치와 권력욕에 눈먼 왕비’, ‘집안을 망하게 한 암탉’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은 이런 민비를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로 재탄생시켰다. 국운이 다해 가는 난세에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외교술을 발휘해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 새롭게 해석했다.

인물의 재해석을 위해 [명성황후]는 전통 서양비극의 패턴을 활용했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토대로 정립한 서양 비극은 ‘고상한 인간의 고상한 행위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하기에 운명에 맞서 싸운 인간의 숭고한 도전, 그리고 패퇴의 아픔을 통해 진한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도전의 위대함과 무모함이 어마어마하기에 예정된 패퇴의 고통이 더욱 가슴을 후벼 파는 드라마 구조다. 이렇게 전통 패턴을 채택하면 기승전결이 명확해지고, 주제가 선명해진다. 드라마의 전체 윤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작품에서 명성황후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여걸이다. 고종과 결혼해 궁에 들어와 보니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어린 고종은 궁녀들과 노는 데 심취해 나랏일에 무관심하다. 황후는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펼치라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마침내 대원군은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고종이 수구파와 개화파의 당쟁 사이에서 번민하자 황후는 개화정책이 옳다고 설득한다. 열강 중에서 일본이 선택되지만, 일본 상인들은 교묘한 상술로 농간을 부린다. 임오군란이 터지고 주도세력인 구식 군대는 황후의 처형을 요구한다. 황후는 급히 피신하고, 대원군이 권좌에 복귀한다. 하지만 대원군은 청나라에 의해 추방되고, 황후는 다시 궁궐로 돌아온다. 청일전쟁이 터지고 여기서 승리한 일본의 공사 이노우에는 황후를 회유하려 하나 그녀는 오히려 러시아를 끌어들여 위기를 타개하려 한다. 열강의 힘의 균형을 통해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러자 일본의 신임 공사 미우라는 황후의 암살계획을 서둘러 마련한다.

마침내 미우라는 명성황후 암살 작전인 ‘여우 사냥’을 개시하고 일본 낭인들이 궐 안에 난입한다. 이들을 막으려던 호위대장 홍계훈은 장렬한 최후를 맞고, 상궁들은 피신을 간청하지만, 황후는 고종과 세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거부한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이제 하나였다. 황후는 낭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쓰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막으려 했던 명성황후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 이미 국운이 기울어버린 마당이라 여인 한 명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관객들은 다 안다. 하지만 그녀는 타협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역사의 폭풍우에 맞선다. 바위에 부딪혀 터져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 열정과 순수한 용기가 관객에게 처연함을 안겨준다. 이 순간 관객은 분노와 슬픔이 엇갈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서양 비극 정형에 충실한 ‘한국의 에비타’


▎1997년 8월 21일 자 [뉴욕타임스]는 뉴욕에서 공연한 뮤지컬 [명성황후]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빛 조명과 기발한 무대 세트, 화려한 의상으로 관객들을 매료했다’고 호평했다.
비탄에 잠겨 있는 백성들 앞에 황후의 혼이 나타난다. 역사 속에서 죽어간 이들과 함께 무대에 줄지어 앉아 비장하게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우리 역사와 백성들, 그리고 명성황후를 위한 진혼곡이다.

알 수 없어라. 하늘의 뜻이여/ 조선에 드리운 천명이여/ 한스러워라. 조정의 세월, 부질없는 다툼들/ 바위에 부서지더라도 폭포는 떨어져야 하고/ 죽음이 기다려도 가야 할 길 있는 법/ 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 재가 된들 어떠리/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 노래가 울려 퍼지면 객석 이곳저곳에선 훌쩍이는 관객들이 많다. 특히 배우 이태원이 이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97년 작품에 합류해 이후 10여 년간 [명성황후] 역을 맡아 무대에서 열연을 펼쳤다. 지금도 [명성황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가 바로 이태원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비극은 가정사에서 벌어진 참극이 많다. [장화홍련전]도 그렇고, 한때 크게 유행했던 신파극과 악극도 그렇고, 못된 계모나 시어머니에게 주인공이 모질게 당하는 내용이 다수다.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모질게 휘둘리는 과정의 아픔이 보는 이에게 동병상련을 안겨준다. 이 전통은 수많은 TV 드라마에서도 반복됐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이와 다르게 운명에 저항한 여걸이라는 서양 비극의 틀을 채택했다.

창작 뮤지컬 붐 일으킨 자극제로 역할

[명성황후]는 여러모로 로이드 웨버-팀 라이스 콤비의 [에비타](1978)와 비교할 만하다. 먼저 역사에 실존했던 여걸이라는 점이 같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었고, 명성황후는 국모로서 둘 다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비극적 결말도 유사하다. 에비타는 빈민을 위한 자선사업을 펼치다 암에 걸려 쓸쓸히 죽었고, 명성황후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려다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시해됐다.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결국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여인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비극의 틀에 끼워 넣기 딱 맞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명성황후]를 미국에서 공연할 때 ‘한국의 에비타’란 홍보 문구를 내건 것은 우연만이 아니다.

서양 비극의 패턴을 통한 인물의 재해석은 이 뮤지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민비를 미화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논쟁은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돌리는 게 나을 듯하다. 다른 모든 예술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뮤지컬도 픽션이다. 뮤지컬 속의 명성황후 역시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캐릭터일 뿐이다.

[명성황후]를 미국에서 공연한다는 발표가 나자 당시 “창작 뮤지컬의 수준을 봤을 때 무리한 시도”, 또는 “외국 가서 망신만 당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제작자 겸 연출가 윤호진은 “뗏목을 타고서라도 태평양을 넘겠다”며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우려 반 기대 반 속에 강행한 미국 공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만, 이 첫걸음에서 한국 뮤지컬의 글로벌화가 촉진됐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시도였다. 뮤지컬에서 시작된 ‘명성황후 신드롬’은 배우 이미연의 열연이 돋보였던 KBS 드라마 [명성황후](2001), 소프라노 조수미가 노래한 드라마의 주제곡 ‘나 가거든’의 뮤직비디오 등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장렬히 최후를 맞으며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던 이미연의 대사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물론 약점이 있다. ‘백성이여 일어나라’ 외에는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한 넘버가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창작 뮤지컬의 고질적인 ‘아킬레스건’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를 기점으로 뮤지컬 전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고, 무수한 창작 뮤지컬이 쏟아져 나오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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