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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윤석열 정부, 외교 방향을 바꿔라 

가치보다 실리로… ‘코리아 퍼스트(Korea First)’가 지혜롭다 

尹 정부, 현실성 없는 대북정책·이념 중심 ‘가치외교’에 매몰
안보·경제발전·통일 목표 달성하려면 실익 중심 명확히 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3월 16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1년간의 외교 정책 방향의 핵심은 이념을 토대로 한 가치 동맹 위주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통일부 회의실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 친필 휘호가 걸려 있었다. 당시 정부의 실제 대북정책 기조는 ‘비핵·개방·3000’이었다. 비핵화하고 체제를 개방하면 북한 소득을 3배 이상 향상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비핵화나 개방 중 하나만 시행해도 자신들의 체제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경제, 안보, 사회 등 총체적인 위기에 몰려 있는 북한의 최우선 과제는 체제 안보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최근 대일정책은 당시를 떠오르게 한다. 정부의 구호와 실제 정책이 너무 다르다. 현 정부의 대외정책 기치는 글로벌 중추국가다. 정부는 글로벌 중추국가 역할 강화를 설명하면서 “자유·인권·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국제사회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겠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 기업들에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권을 침해받았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명예를 회복하려고 수십 년을 노력해온 일본 정부의 사과와 기업으로부터 배상받을 권리를, 윤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등한시했다. 더구나 대법원 판결을 도외시해 삼권분립과 사법부의 권위마저 무시했다. 글로벌 중추국가가 정작 자국 법치와 국민의 자유·인권을 배제한 셈이다.

가치를 내세우더라도 민족 정기와 국가 실익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 권력정치가 난무하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가치외교 주창은 과도하다. 트럼프 시절부터 미국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을 펼치고 있고, 중국도 ‘중국 우선(China First)’, ‘Make China Great Again’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자유와 민주, 인권, 법치 모두 좋은 가치이고 국민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국제질서에서 수많은 갈등 현안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견국가인 한국이 선명한 가치를 내세우고 이를 주도적으로 실현하겠다는 단순명료한 외교는 실익을 거두기 어렵다. 자칫 강대국들에 이용만 당할 위험이 크다. 선진국 문턱에 선 한국으로서는 질서주도국의 가치 추구에 동참하면서 실리 추구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진영논리 매몰되면 국가전략 3대 목표 달성 어려워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 외교를 돌아보자. 윤 정부의 외교 정책을 평가하기 위해선 ‘3대 국가전략 목표’가 기준이 돼야 한다. 국가전략이란 “국가가 처한 지정학적 여건 아래에서 국가목표를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가용수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운영하는 방법”이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필수적인 국가목표에 한국은 평화통일이 추가된다. 한국은 세계 8위의 중견국이지만, 여전히 더 강한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다. 통일은 물론이고 여러 안보 과제들도 이들 강대국이 반대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유사 가치를 추구하지만, 우리보다 국력이 크고 국익의 우선순위도 다르다. 문재인 정부가 북핵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에 전념했지만, 미국에게는 중국 견제가 우선이었다. 김정은이 북한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핵 관련 사안을 포함해 일부 성의를 보였지만, 트럼프가 북·미 관계 정상화나 한반도 평화체제는 물론이고 종전선언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은 이유다. 일본 정부도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수많은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하고도 고작 10여 명의 납치자 문제를 들어 스스로를 피해자로 지칭한다. 일본은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에 거의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 한·미 간 이간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다만 윤석열 정부의 태도는 결이 좀 다르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윤석열 정부의 대외전략 기조는 현 국제사회를 신냉전 대립질서로 규정하고 ‘우리 편’인 미국, 일본, 나토와의 관계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80% 이상이고 중국에 대한 반감이 80% 내외인 점을 고려하면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것 없다는 계산일 수 있다. 문제는 국제정치가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먼저 현 시대는 ‘신냉전적’이지 신냉전 자체는 아니다. 군사안보는 양 진영 간 대립구도가 대체로 맞다. 그러나 경제는 다극화되어 있고, 진영 간에도 상호의존이 크며, 진영 내부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기후, 환경, 팬데믹, 테러,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 등은 진영을 넘어 반드시 협력해야 하는 과제들이다. 따라서 서방의 수장인 미국만 맹종하다간 우리 국익이 매몰될 수 있다.

세부적으로 정부의 대외정책은 대북정책에는 ‘담대한 구상’, 외교정책에는 글로벌 중추국가, 인도·태평양 전략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담대한 구상’은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하고 대화에 나오면 인도적 부문부터 각종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정책의 성패는 북한의 태도에 달려 있다. 5년 내내 남북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고 북·미 정상회담까지 주선해준 문재인 정부가 무조건적인 인도적 지원을 제공해도 거절해온 김정은 정권이 언제라도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조건부 경제지원 제안에 과연 응할까? 특히 김정은의 관심사는 남북보다 북·미 대화에 쏠려 있다. 트럼프가 약속하고 지키지 않은 조치들을 바이든이 무조건 이행해야 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를 보여주지 않는 한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공언하고 있다. 미국이 정책을 급선회해 전향적으로 나오더라도 북한이 대화에 응할지 의문인 상황에서 남북 대화 가능성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北 향한 ‘담대한 구상’은 윤 정부 희망사항일 뿐


때문에 현 정부의 ‘담대한 구상’은 남북 대화를 위해서라기보다, 국제사회에 한국 정부가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내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정부는 북한을 대화 상대가 아니라 단지 적대적인 도발자로서 미·일과 협력해 대결하거나 억지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의 특징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인권의 가치 평가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인권과 자유는 한·일관계 개선의 장애물로 여기면서도, 북한 주민의 인권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생존권적 인권은 경시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정치적 인권을 규탄하고 있다. 이런 대응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망신주기보다 대화를 통해 당당히 논의하고 경협과 연계시켜 실현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에 대응해 북한은 남한을 향해 적대감을 표출하면서 핵 공격 협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이 현실화할 경우 그 피해는 재앙적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수분 내에 수도권에 도달할 북한 미사일을 방어할 방법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해 맞대응하는 것은 미국이 가로막고 있다. 실효적인 대응책이 없는 가운데 미국만 바라볼 뿐이다.

외교 면에서 정부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기치로 한·미 동맹에 집중 투자해 안보·경제를 넘어 기술분야로 확장했고, 굳건한 혈맹관계를 확인했으며,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명암이 엇갈린다. 먼저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은 막으면서 전술핵 재배치 등 확실한 핵 확장 억지 제공도 주저하고 있다. 또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있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보다 전향적이지 않으면 북한이 대화에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북핵문제 해결에 별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북한의 핵 고도화는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경제에서도 반도체와 자동차 부문에서 한국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구애해 유치해 놓고, 이제는 보호주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주거나 투자를 제한하고 영업 기밀을 내놓으라는 식의 불공정행위를 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는 어느새 갑에서 을의 처지로 전락했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은 징용피해자들의 인권을 외면하고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서 일방적으로 양보한 결과였다. 일본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부문 3소재 제재를 풀었지만, 오히려 한국의 대체품 생산 기업 피해가 우려된다. 화이트리스트 복귀도 얻지 못한 채 지소미아를 재개해 한·일 안보협력을 강화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우리보다 일본에 훨씬 더 이득을 주는 조치였다. 특히 이는 미국의 동북아 미사일방어망과 직결되어 한국은 일본과 미국으로 날아가는 중국의 미사일을 정탐하는 역할을 맡게 되므로 향후 중국의 추가 보복 제재가 우려된다. 더구나 한·일 간에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 등으로 이어지면 한국은 최전선에서 북·중·러 연대에 맞서는 전초병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 우리가 일본을 대신해 적이 아닌 중국과 전쟁을 치를 위험을 자진해서 졌다는 우려가 있다.

일본의 일부 극우 인사들은 중국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한국을 중국의 총알받이로 쓸 것을 구상할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30여 년간 이어진 불황을 극복하고 일본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2차 한국전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기우에 불과할까? 정부는 대일 양보가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미래 핵심 안보 과제는 북한의 도발과 남침을 억지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북한 급변사태를 수습하고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는 데 있다. 정부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한·미·일 안보 강화 일변도 외교가 미래 핵심 안보 과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윤 정부의 태도를 보면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상시적인 대책이 결여된 상태에서 미국만 쳐다보는 수준이다. 여차하면 북한과 국지전 내지 전면전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또 “외교의 중심은 경제”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국민은 물가, 이자율, 환율 등 3고에 시달리고 있다. 무역수지는 1997년 이후 처음으로 13개월 연속 적자를 내고 있으며, 올해 적자 규모는 작년의 두 배가 될 상황이다. 빈부 격차는 점점 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평화통일은 언감생심이고, 남북 대화나 경협 재개도 요원하기만 하다.

일본과 안보협력 강화가 한국을 최전선으로 내몰 수도


그렇다면 국익 극대화를 위한 국가전략에 부합하는 대외전략 방안은 무엇일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북한 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국민이 안심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핵을 개발해 맞대응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당장 미국의 단호한 반대와 합의가 전제돼야 하기에 현실화하기는 어렵다. 만에 하나 핵 개발을 강행한다고 해도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우리 경제가 국제적인 제재를 버티긴 어렵다.

현실적인 차선책은 40개 정도로 추정되는 북한의 핵무기 위협을 상쇄할 전력을 갖추는 일이다. 지금처럼 미국의 전략폭격기가 한번 휘젓고 간 뒤 1년 365일 중 350일을 핵 위협 속에 사는 방식이 아니라 상시적인 미국의 핵우산을 확보해야 한다.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출해야 할 과제다. 미국이 한시적 조건부라도 전술핵 지상 재배치를 꺼린다면, 사실상 상시적인 핵 자산의 해상 순환 배치가 이뤄져야 한다. 북한이 애써 개발한 핵의 효용성을 상쇄하는 전략이다. 핵 효용성이 떨어진 북한은 강경한 태도를 완화해 대화에 나올 필요를 느낄 것이다. 그마저 안 된다면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핵 보유로 가는 중간단계인 핵연료 재처리와 농축 권한이라도 최소한 확보해야 한다.

또한 미국의 소극적인 대북정책을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행하지 않은 약속 중 일부라도 바이든 행정부가 계승해 지킨다는 태도로 임해야 비로소 북한이 대화에 나올 것이라는 점을 미국에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북·미 협상에 나온다면 비핵화의 대가로 경제 지원뿐만 아니라 체제 안전보장도 제공한다는 기조 하에 우선 단계로 핵 생산을 동결시킨 뒤 생산시설 해체, 그리고 핵무기 해체 순으로 진행하는 단계적 동시 병행 방식으로 합의를 이룰 것을 제안한다.

미국의 중국 견제 동참 요구 맹종하지 말아야


▎지난해 5월 20일 취임 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 평택시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둘째, 북한의 도발을 방관하지 말고 이를 예방하고 억지하는 것이 정부의 소명임을 자각해야 한다. 북한의 대형 도발을 방치하다가 이를 미·일 일변도 외교의 명분으로 삼기보다 국민이 준 소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북한의 도발 시 격멸은 기본이지만, 우선순위는 도발과 전쟁 예방 및 억지에 두어야 한다.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당장엔 어렵더라도 적대관계가 되는 것을 피하고 북한의 도발 동기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셋째, 북·중·러 3자와 우호 관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적대관계를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북한만 억지하려면 미국과의 동맹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지원은 보조적일 뿐이다.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할수록 북·중·러 단합도 심화하게 마련이다. 자연히 한반도 긴장은 커진다. 강대국 대리전으로 볼 수 있는 6·25를 겪은 우리가 일본과 미국을 대신해 북한이나 중국과 또다시 전장에 내몰릴 수 있다는 점을 잊는 것은 어리석다. 특히 경제와 통상에서 무역의 30%를 차지하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대가를 치를 위험이 크다. 또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 정책에 반기를 들면, 한국의 핵심 안보과제는 어느 하나도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넷째, 경제 및 통상부문에서는 전방위적 경쟁시대라는 점을 인식하고 우리의 경제 실익을 당당하고 치열하게 따져야 한다. 미국이 동맹국이므로 우리에게 선의만 베풀 것이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법, 한수원의 체코 원전 수출 제동, CIA의 우리 정부 감청 등 미국은 항상 자국 이익 중심이다.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에 우리도 협조하고 있으므로 동맹국 간에는 불이익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또 대중국 반도체 통제가 칩보다 제조장비 위주로, 그리고 메모리반도체보다 군사용으로 쓰이는 비메모리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며, 미래 반도체 기술 개발에 한국의 참여를 보장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특히 미국의 중국 견제에 한국의 동참 요구를 맹종할 필요는 없다. 작년에 미·중 간 교역량이 사상 최대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미국 역시 자국 이익 극대화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한·미·일 공조를 적절히 강화하더라도 한·중, 한·러 우호 관계 유지를 최대한 지키고 경제·통상에서도 호혜적인 이득을 찾아야 한다.

한·중·일 3국의 경제적 공동이익 증진 모색해야

다섯째, 진정 한·미·일 관계가 바람직하게 재정립되도록 당당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 일본과의 과거사와 영토 문제에 있어서 성노예 및 강제징용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 그리고 독도 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 정부가 자유, 인권, 법치를 진정 중요한 수호 가치로 여긴다면 이제라도 징용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끝까지 구상권을 행사할 것임을 약속해 양해를 구하는 성의가 우선돼야 한다. 우선 정부가 변제해 피해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부의 책무를 다하고서, 이제까지 지켜온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회복해 한·일 관계를 올바른 기반 위에 재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섯째, 일본과의 관계 재개를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의 징검다리로만 생각하기보다, 미국의 보호주의 경제정책이 한국과 일본이 원하는 자유무역과 상반된다는 점에 착안, 양국이 합심해 미국에 규범 기반 자유무역 질서를 요구하는 등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또 중국 역시 자유무역을 선호하므로 한·중·일 정상회담 등 3국 관계를 재정비해 경제적 공동이익 증진을 모색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러시아도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진출, 북한 개혁·개방 유도 등 한반도 정세 관리와 북한 급변사태 대비, 통일을 위해 협력이 꼭 필요한 나라이므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조속히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일곱째, 정부의 외교가 좋은 가치들을 지향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으나 지나치게 강조하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나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 등 난처한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 평화와 번영은 논쟁적이지 않은 인류 공통의 가치지만, 자유·인권·법치는 다의적이고 내정간섭 등의 반발이나 논쟁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이 이들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지지하되 우리의 국가 정체성에 맞는 적절한 외교 원칙과 입장을 분명히 세워 국제사회에 주지시키고, 일정 수준의 불이익은 감수하더라도 이를 일관성 있게 지켜 국가 자율성과 신뢰성을 지켜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실질 국익을 극대화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hyunik@sejong.org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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