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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 (16)] ‘K아트’ 비상 꿈꾸는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 

“현장 예술인들의 활로를 틔워주는 게 내 역할” 

국회·정부서 10여 년 문화예술 정책 다룬 경험 바탕
문화예술위원장 맡아 한국 예술 저변 확대에 주력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국회 상임위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으로 12년간 문화예술 정책을 다뤄본 경험이 있는 정책 전문가다. 올해 초 정치인으로선 처음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장으로 선출됐다. / 사진:조정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올해 초 제8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정병국 위원장이 한 말이다. 정 위원장은 한국 문화예술의 가치 확산과 발전을 이뤄나가기 위해 무엇보다 현장 중심의 소통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 지원정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정치인 출신 위원장은 예술위원회 설립 이래 처음이지만, 정 위원장은 예술위원회 업무가 낯설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11년간 국회 문화체육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재직 시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뿐 아니라, 145년 만에 외규장각 의궤의 고국 귀환 등 문화예술과 관련된 오랜 경험 때문이다. 앞으로 예술문화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확대 조성해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잘 활용하면서 예술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또한 공정한 지원을 통해 문화예술계의 신뢰 회복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 의지를 분명하게 피력했다.

정병국 위원장은 지난 1월 취임 후 한국 문화예술을 알리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볐다. 취임 직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전시에 참석해 ‘한국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반 사항을 관계자들과 협의하고, 해외 예술기관과의 파트너십 강화를 모색했다. 2년 뒤 한국관 개관 30주년을 앞두고 한국관 증축 약속도 받아냈다. 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IFACCA(국제예술위원회 및 문화기관 연합) 지도자 회의와 권역회의, 제9차 문화예술세계총회(The 9th World Summit on Arts and Culture)에 연이어 참석했다.

문화예술위원장 취임 후 한국문화 알리려 동분서주


▎2011년 6월 11일 경복궁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행사에서 정병국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고유제 헌관으로 참여해 의궤를 봉안하기 위해 근정전 앞에 마련된 의궤상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정책브리핑
이러한 회의를 통해 그간 만나기 어려운 아프리카나 중남미 권역의 예술정책 전문가들을 만나고, 세계 각국 예술지원기관 간 네트워크 및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협력 방안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 세계 400여 명의 문화 정책가, 연구자, 예술가들이 모이는 10차 문화예술세계총회를 유치해 예술과 기술의 조화와 협력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세계 3대 페어 중 하나인 국제아트페어 프리즈(Frieze)가 작년에 서울에서 처음 개최되었고, 9월에 2023년 ‘프리즈 서울’이 열린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 주관사인 프리즈가 아시아 첫 개최지로 서울을 선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술위원회는 기관 차원에서 한국 미술시장의 성장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다각도로 준비했다. 또 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예술나무 가치 확산 캠페인]을 대규모로 기획해 범국민적 운동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기획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며 상반기가 훌쩍 지났다. 요즘도 전남 나주에 있는 본사와 서울 ‘예술가의집’을 직접 차를 몰고 오가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집’은 예술위의 청사로 사용하다가 2010년 예술가들의 창작과 소통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그런데 코로나19와 시설 노후화 등으로 공간 활용도가 낮아져 얼마 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다. 1층은 청년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 기존 2층에 있던 기록원을 예술가의집 라운지 카페로 만들어 예술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휴식과 소통의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집무실 문턱을 낮춰 다양한 예술문화인들과 수시로 대화하려는 정 위원장의 현장 경영 철학에서 비롯됐다.

한국 예술문화의 세계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중요한 시기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설립 50주년을 맞이한다. 정병국 위원장을 대학로 ‘예술가의집’ 집무실에서 만났다. 인사를 하자 정 위원장은 “원두커피 한잔 내려드릴까요”라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시간이 될 때마다 예술인들을 만나 직접 내린 원두커피를 대접하고 고충을 듣는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막 내린 신선한 원두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예술위 설립 50년, 대국민 캠페인 전개


▎5월 26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예술가의집 재개관 행사에서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 예술인들과 대화하고 있다. /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치인이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된 건 처음이다. 지난 1월 취임 후 반년 가까이 지났는데 간단한 소회 부탁한다.

“어려서부터 문화예술을 워낙 좋아하고 관심이 많았다. 16대 국회에서 처음 국회의원이 됐을 당시(2000년대 초) 문화예술 소관 상임위원회는 가장 인기 없는 상임위 중 하나였다. 그래도 문화예술을 좋아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선택했다. 상임위원회에서 11년 동안 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1년을 했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일에 대한 낯섦은 전혀 없고, 일이 재미있고 보람을 느낀다.”

올해 비엔날레에서 한국관 증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 게 인상 깊었다.

“이미 5년 전부터 한국관을 증축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탈리아 베니스시에서 그동안 허락을 안 해줬다. 이번에 가서 마침 우리 개막식에 참석했던 베니스 부시장과의 사전 미팅을 통해 왜 증축이 필요한지 충분히 설명해 동의를 받았고, 그분이 축사할 때 공개적으로 자신이 주도해서 성사시키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올 10월까지는 결과를 내달라고 했다. 설계도가 나왔으니 착공에 들어가면 내년에 완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한국관 부지가 워낙 좁다. 그래서 증축한다고 해도 많이 늘어나는 건 아니고 조금 늘어나는 정도다.”

9월에 대규모 기획인 ‘예술나무 가치 확산 캠페인’이 개최된다. 그 의미가 궁금하다.

“위원회가 설립된 지 올해 50주년이다. 1973년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00달러대였다.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먹는 것도 자체 해결이 안 되던 나라였다. 당시에 초등학생이었는데 원조품인 옥수수죽을 급식으로 먹으며 학교에 다니던 시대였다. 먹고사는 것도 해결이 안 되는데 문화예술을 진흥하겠다고 ‘문화예술위원회’를 만들고 국내 진흥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게 기반이 돼서 오늘날 K문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문화 콘텐트 산업의 기반이 되는 것은 결국 순수예술이다. 그동안 국민들의 성원 덕분에 우리나라 문화예술이 여기까지 왔고,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음악회도 열고 또 그러한 장을 통해서 대국민 캠페인도 해서 ‘예술나무를 심자’는 내용이다. 단기간에 문화 강국 반열에 오를 수 있던 배경에는 세계에서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있고, 이러한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것은 후원이 큰 몫을 했다. 후원의 중요성을 무겁지 않고 즐겁게 전달하고자 소프라노 조수미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동참해 문화예술계 후원문화를 확산할 예정이다. 9월 23일 토요일 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페스티벌이 진행된다.”

‘프리즈 서울’ 통해 한국 미술 알리려 준비 박차


▎3월 9일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현장 업무보고에서 정병국 위원장이 문화예술 후원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2년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고, 올해 두 번째로 열린다. 한국 미술시장의 성장 기회가 될 수 있는데, 기관 차원의 지원책은 어떤 게 있나?

“작가들이 역량은 있는데 상대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아직 그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미술이다. 국내 아트페어가 갤러리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작년에 처음으로 ‘프리즈’가 들어왔는데, 한국 미술을 홍보하고 알릴 기회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각 국공립 공공기관 책임자들을 모시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한국 미술을 알릴 기회로 삼기 위해 역할을 나눠 준비했다. 한국 작가와 작품을 세계 시장에 더 많이 알릴 수 있는 홍보의 장으로 삼을 생각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아르코미술관을 중심축으로 비영리·신생 미술 공간 지원 및 참여 확산에 포커싱해 오프라인으로 인포센터를 운영하고, 온라인 애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해 맞춤형 비영리 공간 및 전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그리고 한국 문화시설이나 미술관, 박물관 등 교통 편익을 제공할 수 있는 셔틀 시스템을 구축하고, 한국관광공사와 MOU를 체결해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명소, 관계자들이 찾을 만한 맛집, 관광지, 미술관, 박물관, 아틀리에 등을 넣은 매핑 작업을 했다. 외국에서 온 큐레이터나 컬렉터들이 한국 미술을 알고 싶어 한다. 작가를 발굴하려고 일일이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어주려고 아르코미술관에서 네트워킹 파티 행사로 9월 8일 금요일 ‘아르코 데이’를 개최해 우리가 선정한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등 다양한 계획들을 갖고 있다.”

수시로 현장 누비며 예술인들과 소통의 폭 넓혀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 꼽은 인생 사진. 고등학교 1학년 때 활동했던 문학 동아리 ‘돌담불’의 작품 발표회 때 모습이다. / 사진:정병국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코로나19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예술인이 많다. 위로의 말 한마디 부탁한다.

“블랙리스트는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피해자분들께 정말 안타깝고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5월에 IFACCA 총회에 참석했는데, 이번 주제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였다. IFACCA는 국가 단위 예술지원기관이 모인 연합체다. 총회에서 중동,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 세계 각국의 문제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의 울분을 듣기도 했다. 나는 총회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도 불과 30년 전에 정권의 탄압으로 창작의 자유가 제약을 받았는데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민주화가 됐다. 나도 그때 싸웠고, 투옥까지 당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예술을 수단화하는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라고 인정해줘야 하느냐,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하느냐’ 이 질문은 결과 보고서에서도 중요한 키워드로 다뤄졌다. 앞으로 힘든 예술인들이 있다면 우리 문화예술위원회가 하나씩 풀어나갈 생각이다.”

기존 2층에 있던 기록원을 라운지형 카페로 바꾸는 등 예술가의집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는데…

“정치할 때도, 장관을 할 때도 제일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현장을 많이 다니지만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은 한계가 있어 취임하자마자 했던 게 현장 업무보고다. 직원들이 내게 업무보고를 하겠다고 해서 이미 내용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으니 정책 고객인 예술가들을 상대로 업무보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현장 업무보고를 지금까지 파트별로 14차례 진행했다. 담당 부장들이 올해 사업 예산은 얼마를 어떻게 집행할 것이고, 내년에는 이것을 보완해 어떻게 할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하고, 현장에서 질의응답을 받고, 온라인으로 생중계해 누구나 다 볼 수 있게끔 했다. ‘아르코 익스프레소(ARKO Ex-presso)’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신청하면, 제가 직접 내린 원두커피를 대접하고 참여를 희망하는 예술인들을 만나 고충을 듣고 있다.”

농사지으라는 부친과 씨름 끝에 상경해 학업 이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 한 장이 있다면?

“어려서 양평군 개군면에 살았는데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조그마한 동네였다. 우리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분이셨다. 시골 조그만 학교여서 성적이든 뭐든 1등 하니까 여기선 내가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중학교는 서울로 가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굳이 농사를 지을 거면 학교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학교에 안 갔다. 아버지가 잡아서 학교를 보내려고 하면 산으로 도망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기를 한 달가량 했더니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서울에 방을 얻어 주셔서 그때부터 자취 생활을 했다. 그때 전기밥솥도 없고, 냉장고도 없는 시절이라 연탄불에 밥해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주말이 끝난 월요일 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영화나 음악회를 다녀왔다고 하는데, 음악회가 뭔지 영화가 뭔지 모르니까 대화에 낄 수가 없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런 경험 때문에 문화예술 정책을 펼 때 어린아이들에게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고, 체험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초등학교 다닐 때 연극 주인공도 해보고, 사생대회에 나가면 상을 받을 만큼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그래서 지금도 작가 작업실을 찾아가 대화하거나 전시하는 그림을 보는 게 가장 큰 취미다. 대학 1학년 때는 사진 클럽 활동도 했다. 형님이 중동에 파견 나갔다가 들어올 때 독일제 롤라이 필름 카메라를 사다 주셔서 기본적인 것을 배워 사진 찍으러 많이 다녔다. 사람들이 제 사진을 보면 구도를 잘 잡는다고들 했다. 그리고 뭔가를 하고 나면 꼭 그것에 대한 백서를 만들었다. [나는 반성한다], [한 시간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와 [문화, 소통과 공감의 코드]라는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도 했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진이 있지만, 지금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담불’이라는 문학 동아리에서 문학작품 발표회를 할 때 찍은 사진들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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