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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으로 하는 안전한 기부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
금융상품은 돈을 불리는 데만 쓰이지 않는다. 지키는 것은 물론 돈을 지켜낼 힘이 없는 이들에게도 보호막이 돼준다. 최근엔 기부한 돈이 제대로 쓰이는 데도 ‘신탁’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센터로 전화가 걸려 왔다. 경기도 소재 요양원 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이 신탁에 대해 상담하고 싶다고 했다. 원장이 소개한 이는 80대 후반의 김홍자 할머니로, 남편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자녀가 없다. 남동생과 조카 2명이 있으나 남동생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최근 몇 년간 얼굴도 보지 못했다. 조카들은 김홍자 할머니에게 돈을 빌려 가서 지금까지 매달 이자를 갚아나가는 상황이라 돈을 믿고 맡길 수가 없다고 한다. 치매 초기지만 김홍자 할머니의 생각과 의지는 분명했다. 평소에 왕래도 거의 하지 않는 남동생과 조카들에게 재산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는 것이다. 또 할머니는 자신의 정신이 또렷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생활과 자금관리 등을 모두 요양원 원장이 맡아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양원 원장 역시 거액의 현금을 맡는 게 부담스럽고, 나중에 법정상속인들이 문제 삼을까 봐 조심스럽다고 한다. 이에 김홍자 할머니와 상담해 지금은 치매 초기이나 더 악화될 경우에 대비해 유언대용신탁으로 할머니의 재산을 관리하기로 했다.

신탁할 현금 재산은 할머니 생전에는 본인의 요양비나 생활비, 의료비 등으로 쓰고, 할머니 사후에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과학연구 대학교에 기부되도록 했다. 위탁자가 사망하면 신탁재산은 상속인의 동의 없이 기부처에 바로 지급된다. 김홍자 할머니 사례처럼 당사자가 사망하면 남은 재산을 학교법인에 장학금으로 기부하도록 계약하는 것이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공익신탁과 공익재단

신탁으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김홍자 할머니 사례처럼 기부 목적의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수익자를 본인이 원하는 기관으로 지정하는 방법이다. 둘째, 공익신탁을 통해 수익자를 특정하지 않고 포괄적인 공익 목적으로 기부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공익신탁은 말 그대로 개인이나 법인이 자신의 재산을 일정한 공익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신탁하는 것으로, 개인의 재산 증식이나 관리가 목적인 사익신탁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공익신탁은 복지사업, 의료사업, 교육시설 등에 재산을 증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자선신탁(Charitable Trust)’이라고도 한다. 개인이나 법인 등이 공익사업을 목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신탁하면 신탁회사가 신탁재산의 관리·운용은 물론 위탁자의 뜻에 따라 공익사업을 수행하는 파트너 역할도 한다.

공익신탁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 신탁과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공익신탁에서는 신탁 설정 시에 수익자가 특정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탁이 성립하려면 위탁자, 수탁자와 함께 수익자가 지정되어야 하지만 공익신탁은 신탁 목적만 지정될 뿐 공익신탁 설정시점에 수익자는 지정되지 않는다.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신탁계약만으로 효력이 발휘된다. 재단과 같은 별도의 운영 조직이 필요 없기 때문에 공익법인 설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차가 간소하고, 관리비용이 적게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익신탁이 아직 많이 이용되고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널리 보급되어 있다.

미국, 영국 등 신탁 선진국의 공익신탁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연보호 민간단체인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는 1895년 영국 전역의 문화재 관리를 위해 설립된 국민 공익신탁이다. 미국에서는 자산가들이 신탁을 통해 고액 기부에 참여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선수익기여신탁(Charitable Lead Trust, CLT)과 자선잔여신탁(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 등 다양한 공익신탁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고액 기부자들은 재산을 신탁기관에 이전하고 매년 연금 형태로 수익을 받거나 보유 재산에서 창출되는 모든 수익을 사회에 환원할 수도 있다. 또 신탁을 통해 기부한 금액에 비례해 소득세 및 상속세를 감면받을 수 있다. 한편 공익을 목적으로 기부하는 방법에는 공익신탁 외에 공익재단법인 제도도 있다. 공익재단법인은 공익 목적을 위해 제공된 재산을 기본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출연된 재산을 그 법인에 귀속함과 동시에 그 법인의 이사 또는 다른 기관으로 하여금 정관에 따라 공익을 위해 재산을 관리·운영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민간이 출연한 재산을 공익활동에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공익신탁과 공익재단법인이 동일하지만, 공익신탁은 공익재단법인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공익재단법인 설립에 비해 관리비용이 현격히 적게 든다. 재단법인 등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사무실 임차료나 인건비 등 통상 전체 기금에서 운영 경비가 소요되는데 신탁에서는 이 같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둘째, 공익신탁의 설립에 관한 행정 수속을 수탁자인 신탁회사가 수행하므로 기부자 입장에서 공익재단법인보다는 설정 절차부터 간편하고 수월하다.

셋째, 공익신탁은 ‘법인’이 아니며, 공익신탁의 재산권은 수탁자 명의로 관리된다.

한편 공익재단법인의 설립을 위한 최저 기본재산은 주무 부처별로 다르게 운영된다. 공익재단법인의 기본 재산 그 자체의 사용은 금지, 제한되고 수익금액을 목적 사업에 사용하도록 하고 있으나 공익신탁은 신탁원본도 사용할 수 있다.

넷째, 공익신탁은 출연 재산의 규모 및 활용 등도 위탁자가 결정하며, 한 개인이 큰 규모의 공익신탁을 설정할 수도 있는 반면 소규모 자금으로도 공익신탁 설립이 가능하여 모금형 공익신탁인 경우에는 불특정 다수인의 소규모 출자를 모아서 자산가의 거액 출연과 맞먹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신탁으로 가능한 ‘유산 기부’

우리나라는 지난 10여 년간 기부금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국세청에 따르면 2008년 9조원 규모에서 2016년 12조8600억원으로 1.4배 이상 증가했다. 문제는 개인의 기부금액 규모는 늘었지만 기부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고 있다.

우리나라 기부의 특징은 종교성이 강하고, 시혜적 동정심에 의한 일회성 기부가 많고, 유산 기부 비중도 매우 적다. 전체 기부금 중 유산 기부 비중은 영국 33%, 미국 8%, 한국 0.46%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김홍자 할머니 사례처럼 신탁을 활용하면 유산 기부 활성화에 힘을 보탤 수 있다.

201907호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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