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오스트리아 빈(WIEN) 

‘음악의 성지’에서 환희를 맛보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만큼 많은 음악가를 포용했던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말러 등과 같은 대음악가들을 제외하고도 빈을 거쳐 간 유명 음악가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빈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빈 시가지의 핵심 지역. 슈테판 대성당이 구심점을 이룬다. / 사진:정태남
품위 있는 도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을 지닌 도시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러한 빈이 가진 물리적인 특징 중 하나는 널찍하고 멋진 대로가 빈의 핵심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로는 ‘링슈트라세(Ringstrasse)’, 즉 ‘순환도로’를 뜻하며 간단히 링(Ring)이라고도 한다. 이 도로의 폭은 57m, 총길이는 5.2㎞인데 도심에 이토록 품위 있는 도로가 있는 도시는 유럽에서 그리 많지 않다.


오늘날 유럽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중세 성곽도시들처럼, 빈도 중세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빈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 1857년 11월 20일에 기존의 도시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로(大路)를 만드는 대대적인 도시계획안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중세의 성곽이 완전히 철거되고 1865년에 마침내 링슈트라세가 완공되자 빈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후 링슈트라세 도로변에는 국립대학, 시청, 의사당, 궁정극장,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국립오페라극장 등 많은 공공 건축물이 세워졌다. 그뿐 아니라 빈의 귀족층과 산업혁명 이후 부상한 돈 많은 중산층 계급을 위한 개인 건물들도 주변에 세워지면서 오늘날 보는 빈의 도시 모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링슈트라세에 세워진 국립오페라극장. / 사진:정태남
링슈트라세가 감싸고 있는 역사 중심 지역 한가운데에는 슈테판 대성당의 첨탑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다. 노른자 같은 이 지역에는 ‘황금의 U(Goldenes U)’라고 하는 빈 최고의 명품 구역이 있다. 이곳에서는 ‘모스틀리 모차르트(Mostly Mozart)’라는 간판이 유독 눈길을 끈다. 모차르트와 관련된 관광기념품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모차르트가 만약 지금 살아 있다면, 음악 저작권료 외에 이런 매장으로부터도 엄청난 브랜드 사용료도 받을 수 있을텐데…. 슈테판 대성당 부근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있었는데, 1839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는 지금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모차르트가 1791년에 세상을 떠난 다음 빈의 음악계에 생긴 공백은 독일 본(Bonn)에서 온 젊은 천재 베토벤이 채웠다.

환희에 부쳐


▎바덴바이빈에 보존된 베토벤하우스(왼쪽). / 사진:정태남
‘음악의 성지’ 빈에는 또 다른 ‘성지’가 있다. 다름 아닌 하일리겐슈타트(Heligenstadt)이다. 이곳에는 악성(樂聖) 베토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은 옛날에 빈에서 마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한적한 마을로, 빈의 상류층 사람들이 여름에 즐겨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빈 시내 중심에서 4호선 지하철(U4)로 20분 정도 걸린다. 숲이 많은 이곳에는 개울이 흐르고 언덕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어서 지금도 전원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1806년, 베토벤은 [교향곡 5번 ‘운명’]을 쓰던 도중에 [교향곡 6번 ‘전원’]을 구상하고는 1807년 7월경에 본격적으로 스케치했으며, 1808년 6월경에는 하일리겐슈타트에 머물면서 모두 완성했다. 베토벤은 이곳의 숲길을 산책하면서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 교향곡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곡에서는 삶의 환희가 넘친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런 곡을 완성하기 4년 전에는 깊은 고뇌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모스틀리 모차르트. / 사진:정태남
그는 28살 때인 1798년 무렵, 청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1802년에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서 받은 상처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귓병이 더욱 악화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히 쇠약해졌다. 그는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동생 앞으로 비장의 유서를 썼다. 이 유서 끝부분에 적힌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담은 문장에는 ‘mit Freuden’이란 표현이 보인다. 영어로는 ‘with joy’이다. 문맥상 여기서는 ‘기꺼이 죽음을 맞겠다’라는 뜻이리라.

이 프로이데(Freude), 즉 ‘기쁨’, ‘환희’는 그가 생애 후반에 작곡한 [교향곡 9번]에서는 ‘고뇌를 통해 도달하는 환희’로 승화된다. 이 교향곡은 끝 악장에 프리트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송가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를 가사로 하는 합창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통 ‘합창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하우스(오른쪽). / 사진:정태남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쳐’는 프랑스혁명 이전인 1785년, 당시 봉건적 정치와 전제적 군주제하에 있던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쓴 작품으로, 당시 26세였던 실러는 인류애와 인간 해방이라는 이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 후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1815년 빈 국제회의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베토벤은 지켜봤다. 빈 국제회의 이후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혁명 이전 시대로 되돌리려는 보수 반동체제의 억압적인 사회 상황과 맞물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암울한 인간적인 고통을 겪고 있던 베토벤에게 실러의 송가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한 줄기 빛처럼 보였을 것이다.

베토벤이 생의 후반기에 휴양차 즐겨 찾았던 곳은 빈에서 남쪽으로 26㎞ 떨어진 바덴바이빈(Baden bei Wien)이다. 그는 15년 동안 여름이면 이 작은 온천 도시를 찾았는데, 시청 부근 골목길에 보존된 베토벤하우스(Beethovenhaus)는 그가 1821년부터 1823년까지 체류했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가 [교향곡 9번]의 중요한 부분을 작곡했다고 하여 이 집을 ‘9번 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링슈트라세에 세워진 베토벤 기념상. / 사진:정태남
베토벤은 1824년 2월에 [교향곡 9번] 전곡을 완성했고 그해 5월 7일에 캐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초연했다. 지휘봉은 미하엘 움라우프가 잡았고, 베토벤은 무대 옆에 앉아서 템포를 주었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연주가 끝난 줄도 몰랐는데, 알토 독창자가 알려주어 청중들이 크게 환호하는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1709년 세워진 캐른트너토어 극장은 링슈트라세가 건설된 후 이 지역이 새롭게 개발되면서 아쉽게도 헐려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1886년에 호텔 자허(Hotel Sacher)가 세워졌는데 바로 국립오페라극장 뒤이다. 이 호텔은 초콜릿케이크인 자허토르테(Sachertorte)가 특히 유명하다. 만약 베토벤이 살아 있다면 이곳에서도 환희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환희’의 차원이 다르겠지만.

※ 정태남 -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306호 (2023.05.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