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시스템 개발자가 장애인을 위한 웨어러블 특수 마우스 제작에 나섰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따뜻한 기술로 ‘감동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에서다.
▎박준형 대표가 장애인용 특수 마우스 EA-1(헤드셋)을 머리에 착용하고, EA-2를 손에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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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장애인이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IT 기기를 마음껏 활용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키보드와 마우스 등 기본적인 입력장치들이 하나같이 손 사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접속해달라’거나 ‘클릭해달라’고 요청할 조력자가 없다면, 실제로 컴퓨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이럴 때 꼭 필요한 기기가 장애인용 웨어러블(wearable) 마우스다. 손 대신 머리에 착용하거나 입에 무는 형태가 많다.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서 수입한 제품이 대부분인 웨어러블 특수 마우스 시장에 국내 한 스타트업이 뛰어들었다. 지난 2020년 박준형 대표가 창업한 에이아이컨트롤(AiCon)이다. 대학에서 메카트로닉스, 대학원에서 지능로봇시스템 과정을 전공한 박 대표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연구개발(R&D) 분야에서 일하다 창업에 나섰다. 로봇과 전기·전자공학, 소프트웨어 등을 연구하던 ‘천생 엔지니어’가 어쩌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 마우스 개발에 나섰을까.박 대표는 “도대체 이 사업을 왜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인용 웨어러블 마우스의 국내 시장 규모는 수억원대, 미국 시장으로 범위를 넓혀도 50억원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장애인 보조기기와 고령자 친화기기를 묶은 미국 시장 규모를 약 100조원대로 추산한다. 그에 비하면 웨어러블 특수 마우스의 시장 규모는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작은 게 사실이다.“창업 초기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코딩교육 로봇이 주력 아이템이었어요. 직접 코딩한 프로그램을 실물로 구현하는 방식이죠. 온습도·밝기(조도)·소리 감지 센서와 스텝 모터, 스피커, RGB LED 등 출력장치를 갖췄습니다. 소리를 감지하고 간단한 주행도 가능하죠. 지금도 회사의 주요 사업 아이템입니다. 특수 마우스는 사실 부수적인 프로젝트였어요.”코딩교육용 로봇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특수 마우스 개발에 나선 건 ‘국가 지원사업’에 응모하기 위해서였다. 창업 초기 스타트업이 으레 그렇듯 AiCon도 운영자금이 빠듯했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것이 국가 지원 프로젝트를 따내는 일이다. 박 대표는 사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주관한 보조기기 개발 사업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2022년 처음 선보인 ‘EA 시리즈’의 출발이었다.
머리에 쓰고 입에 무는 마우스
▎에이아이컨트롤이 선보일 예정인 장애인용 지능형 서비스로봇의 렌더링 이미지. 대형마트와 도서관 등에서 장애인의 손과 발 역할을 해줄 혁신 제품이 될 전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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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는 ‘Everything is Available’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손을 사용하기 어려운 장애인들이 컴퓨터로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활 속 거의 모든 서비스가 컴퓨터(PC)나 스마트폰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기술 발전이 고도화될수록 손을 못 쓰는 장애인은 사회 발전을 따라가기는커녕 점점 도태돼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박 대표는 이런 사람들의 손 역할을 해줄 첫 번째 기기로 ‘EA-1’을 개발했다. 헤드셋 타입으로 머리에 착용하는데, 머리를 움직이면 커서(포인트)가 따라 움직인다. 클릭(터치)은 헤드셋에 딸린 마이크에 바람을 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머리 움직임과 바람을 인식하는 센싱 기술을 접목한 제품이다.“예전에는 막대기 같은 걸 입에 물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주변 시선을 힘들어하는 분이 많았죠. EA-1은 일반 헤드셋과 디자인 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어요. 장애인 보조기기 분야에서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라 부릅니다. 이런 디자인이 적용된 제품일수록 사용 시 거부감이 훨씬 덜하죠.”EA-1은 호흡 횟수에 따라 클릭, 더블클릭, 우클릭, 스크롤 등이 모두 가능하고 드래그 기능까지 적용됐다. 초기에는 모스부호처럼 제작했는데,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증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개발했다. 장애인 중에는 손을 쓰기는커녕 누워서 지내는 이가 많고,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폐활량이 부족하다는 점도 감안했다.박 대표는 EA-1에 이어 곧장 ‘EA-2’를 내놓았다. 조이스틱 타입의 특수 마우스로, 휠체어나 책상 등에 고정해 입에 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우스피스를 물고 움직이면 커서가 따라 움직인다. 다소 적응이 필요한 헤드셋 타입에 비해 바로 사용이 가능할 만큼 편의성을 높인 제품이다. 호흡 방식에 따라 12가지 기능을 담아 더 정교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박 대표는 “실제로 EA-2를 사용해 미디 작곡을 하거나 자서전을 집필하는 분도 있다”고 소개했다. 현재 개발이 끝나가는 ‘EA-3’ 모델은 턱을 사용하는 시프트(shift) 기능 등을 더해 더욱 고도화할 예정이다.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은 이를 뒷받침할 매출과 이익이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EA 시리즈가 갖는 공익적 의의와 별개로 시장 자체가 갖는 성장의 한계는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한번 이 분야에 들어온 이상 발을 빼는 게 어렵다”며 사업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제품 개발과 실증을 위해 장애인분들을 많이 뵀는데, 그들을 본 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국내에 이런 제품을 개발하는 회사가 생겨서 너무 기쁘다는 장애인과 가족들, ‘이제는 무엇이든 도전해보겠다’거나 ‘매일 밤 잠들 때 내일은 또 무얼 할지 기대한다’ 같은 말을 들을 때면 마음 한쪽이 뭉클해지죠. 향후 EA 시리즈를 지능형 서비스로봇에 연결해 장애인들의 자립 영역을 더 넓히는 게 목표입니다.”EA 시리즈는 가격 면에서도 외산 제품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경쟁력을 갖췄다. 비슷한 기능을 가진 외국 제품은 개당 300만~400만원 수준인 데 비해, EA 시리즈는 65만~95만원 수준이다. 정부 장애인 보조금을 활용하면 실구매 비용은 10만원대까지 떨어진다.
지능형 서비스로봇 개발에 승부수시장의 특성상 성장 한계가 명확한 특수 마우스 시장의 돌파구는 어떻게 열 수 있을까. 박 대표는 “EA 시리즈와 지능형 서비스로봇을 결합한 제품을 개발 중”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해 현재 AiCon은 대형마트의 진열대를 관리하는 통합시스템 ‘카이로스’ 개발을 완료한 상태다. 영상 인식, 인공지능, 로봇팔 제어 기술을 이용해 로봇 세 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진열대를 스캔하고 필요한 물건을 카트에 담는 게 가능하다. 필요한 상품을 넣어 진열대를 정리하고 재고를 유지한다. 박 대표는 “국가 과제로 선정된 프로젝트”라며 “오는 5월부터 마트에서 실증을 거친다”고 소개했다.실제로 진열대 관리 부실로 인한 유통업체의 손실은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원하는 제품이 진열대에 없는 일이 세 번 이상 반복되면 약 70%의 고객이 이탈한다고 한다. 박 대표는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이 같은 고객 이탈로 인한 손실이 1200조원 수준”이라고 설명했다.카이로스 프로젝트가 실증 작업을 마치면, AiCon의 본격적인 사업 시험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EA 시리즈와 로봇팔, 장애인용 전동 휠체어를 결합한 시스템이다.“휠체어에 장착한 태블릿에 제품 영상이 실시간으로 뜹니다. 고객(장애인)이 인식한 제품을 특수 마우스로 클릭하면 해당 진열대로 자율주행해 이동한 후, 로봇팔이 상품을 집어 장바구니에 담아주는 거죠. 대형마트나 도서관 등 장애인이 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장애인용 지능형 서비스로봇은 그동안 박 대표를 비롯한 AiCon 연구진의 R&D 노하우가 집약된 제품이 될 전망이다.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제품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유일무이한 생활보조 로봇을 만들겠다는 게 박 대표의 다짐이다. 실제 시제품은 2025년 상반기 중 선보일 계획이다. 이를 위해 프리A 시리즈로 5억원가량의 투자 유치에도 나섰다. 투자금은 연구 인력 충원과 로봇 시스템 제작에 활용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이 제품을 “2026년 세계가전박람회(CES)에 출품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내년 상반기 시제품 발표 이후에는 시리즈A 투자 유치도 병행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단기적으로는 EA 시리즈 보급과 수출에 주력할 방침이다. 지난 2022년 EA-1을 무상 보급으로 론칭한 이후 2023년에는 SK행복나눔재단에도 27대를 무상 보급했다. 수출도 꾸준히 추진 중이다. 현재 영국 현지의 보조기기 전문 개발·판매사와 유럽 총판 협약을 진행하고 있다. 유럽에서 장애인 보조기기를 판매하기 위해선 의료기기 인증을 받아야만 하는데, 여기에만 수억원이 든다. 박 대표는 현지에서 오랜 기간 영업해온 업체에 인증 절차를 맡기고, 대신 총판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장애인 비중이 크고 출산율도 높은 중동 시장도 공략 대상이다. 박 대표는 사우디와 카타르에 제품을 보내 샘플 테스트를 마쳤다고 말했다.코딩교육 로봇인 ‘아이코봇(i-COBOT)’과 블록코딩보드 ‘코북’ 등 교육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학교와 정부교육사업, 사회적협동조합(방과후수업) 등을 주요 타깃으로, 실제 교육 현장에 맞는 서비스를 더 고도화한다는 방침이다.박 대표는 “EA 시리즈 고도화하고 지능형 서비스로봇에 접목해 장애인들의 자립 영역을 넓히겠다”며 사업 의지를 다졌다. 사명대로 장애인과 고령자 등을 위한 인공지능 서비스로봇의 아이콘(AiCon)이 되겠다는 포부다.“잘돼도 대기업에선 임원 승진이 그만이었어요. 기껏 개발을 완료해도 시장성에 밀려 기술이 사장되는 경우도 많았죠. 개인적으로 감동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게 인생의 목표예요. 회사를 나와 창업을 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죠. 사람에게 투자하고 그를 통해 얻는 것만큼 큰 행복이 없더군요. 누군가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요.”-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