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차강희는 ‘산업디자인의 거장’으로 꼽힌다. 그가 서울디자인재단 대표로 취임하자 산업계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는 AI 시대의 디자인 사고 전환을 강조했다.
▎지난 10월 취임한 차강희 서울디자인재단 대표는 LG전자에서 프라다폰 개발을 주도하며 ‘슈퍼디자이너 1호’로 선정된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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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중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일대에서 11일 동안 열린 ‘서울디자인 2024’에는 역대 최다 수준인 133만 명(온오프라인 행사)이 방문했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한 이 행사는 ‘내일을 상상하다’를 주제로 인공지능(AI)이 디자인계에 미칠 영향력을 집중 탐구하면서 전시·마켓·콘퍼런스·부대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지난해까지 시민 참여 문화축제 중심이었는데, 올해는 기업·디자이너 중심의 산업박람회 성격이 짙어졌다.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 프로젝트에 상을 수여하는 국제 디자인상 ‘서울디자인어워드’도 올해 다섯 번째로 열렸다. 공식 앰배서더로 등장한 버추얼 K-팝 아티스트 ‘나이비스’와 DDP 개관 10주년 기념 DDP 루프탑 투어도 관심을 모았다.올해 행사는 차강희 서울디자인재단 신임 대표의 ‘컬러’가 강하게 스며들었다. 10월 초에 취임했으니 행사 준비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지만 그는 ‘산업디자인의 거장’답게 서울디자인재단의 새 비전을 탑재했다. 차 대표는 LG전자 디자인연구소장으로 근무하면서 LG전자의 대표작인 초콜릿폰, 프라다폰, 올레드(OLED) TV, 노트북 그램(gram) 등 제품 디자인 개발을 주도했다. LG전자 최초로 슈퍼디자이너로 선정되는 등 30년간 산업계에서 전문 디자이너로 일했다.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산업디자인 교수로 재직하다가 발탁됐다. 임기는 3년이다.정신없이 한 달을 보낸 차강희 대표를 DDP에서 만났다. 그는 “올해를 시작으로 기업과 디자인이 중심이 되는 디자인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또 “기업에서도, 학교에서도 일해봤고 이제 기관에 들어왔으니 그 경험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는 일에도 기여하고 싶다. 제품과 교육을 떠나 더 큰 틀에서 변화와 혁신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공디자인 관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다.
디자인 인프라 부족한 중소기업 지원 나설 것
▎‘서울디자인 2024’ 기간 동안 진행된 ‘DDP디자인론칭페어’는 세상에 없던 디자인 제품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사진:서울디자인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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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후 파악한 서울디자인재단의 인프라와 역량은.“평소 서울시가 디자인을 통해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노력을 알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서울디자인재단이 있음을 깨닫게 됐다. 특히 ‘2024 DDP 디자인 론칭페어’는 서울디자인재단의 강력한 인프라와 전문 역량을 체감할 기회였다. 많은 국내외 디자이너와 기업이 참여해 다양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선보였는데, DDP라는 플랫폼이 디자인산업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산업 분야와 협력해 디자인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디자이너들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3년 임기 동안의 주요 계획은 무엇인가.“디자인재단 본연의 미션인 디자인 문화 확산과 디자인산업 진흥에서 성과를 내고자 한다. 동행과 매력을 담은 공공정책과 디자인을 융합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으며, 공무원·시민·학생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디자인 싱킹 교육을 통해 서울 전역에 창의적 사고를 확산할 계획이다. 현재 잘하고 있는 사업들은 내실을 다진 후 규모를 키워서 서울 시민의 더 나은 삶을 선도하는 디자인 기관으로 거듭나겠다.”
내년부터 DDP 루프탑 투어가 진행된다는데…“DDP 루프탑 투어는 DDP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시민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기획했다. DDP 루프탑에 올라서서 서울시를 360도 조망하는 새로운 경험으로 서울 관광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DDP 지붕 일부 280m를 30분 정도 직접 걷고 즐기는 코스다. 올해 시범 운영한 뒤 내년에는 코스를 확대하고 다양화해 봄과 가을에 정식 콘텐트로 운영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DDP의 다양한 공간을 창의적이고 소통적인 문화와 디자인 행사의 장으로 활용해 시민과 관광객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치를 높이겠다.”
‘활동 영역이 DDP 밖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맞는 말이다. 그동안 DDP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이제는 서울 전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DDP는 이미 세계적인 스폿으로 잘 알려진 만큼 양질의 콘텐트를 토대로 K-디자인 문화를 글로벌하게 확장하는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 이 전진기지를 바탕으로 서울 곳곳에서 디자인을 통한 문제해결을 도모하며 시민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산업디자인 전문가가 취임해 산업계의 기대가 높다.“중소기업이 디자인 역량을 강화하여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디자인 인프라가 부족한 중소기업이 재단의 지원과 협업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고, 나아가 산업 전반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디자인업계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협업할 생각이다.”
‘굿 디자인’보다는 ‘의미 있는 디자인’ 중요
▎서울 동대문 DDP 루프탑 프레스 투어에서 참가자들이 DDP 루프탑을 걷고 있다. / 사진:서울디자인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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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제품을 아우르는 ‘디자인 철학’이 궁금하다.“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불분명한 것을 명쾌하게,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어려운 것을 쉽게 그리고 거기에 시대적 가치를 담는 일’이다. 또 ‘규칙과 룰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모두 디자인된 것이고, 그 안에서 디자이너는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개별 제품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생각이 LG전자에서 거둔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굿 디자인이 넘쳐나는 시대에 더욱 의미 있는 디자인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삼성에서도 짧은 기간 경험이 있다. LG 디자인과 삼성 디자인의 차이는 무엇인가.“LG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디자인, 삼성은 기술 중심의 기능적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며 차별화를 꾀했다. 두 회사 디자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 속에서 성장해왔다. 두 회사 모두 각자의 장점을 잘 살려서 소비자에게 좋은 제품을 제공해왔다는 것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앞으로도 선의의 경쟁을 펼쳐 세계시장을 리딩하는 한국 기업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많은 기업이 ‘디자인 경영’을 이야기한다.“한국 기업은 첨단 제품이나 한류 등 디자인을 통해 나이스하고 에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스토리, 일관된 정체성 등에서는 부족하다. 한국 산업계는 디자인을 사업의 중요한 경쟁요소로 생각하고 디자인 경영을 강조하지만, 정작 우수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좋은 디자인은 우수한 역량의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이다. 그들을 지속적으로 육성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지금 주목해야 할 디자인 트렌드는 무엇인가.“4차 산업혁명과 같은 기술 발전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닌 새로운 가치다. 소비자는 기술 그대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 은유적이며 감성적으로 디자인이 입혀진 가치를 소비한다. 디자인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가, 어떻게 존재하게 할 것인가, 윤리적인 가치인가, 환경은 배려하는 것인가 등 예전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명제들에 대해 더 의식 있고, 지속가능하도록 풀어나가야 한다.”
AI 시대의 디자인적 사고는 어떻게 달라야 하나.“디자인은 창의적인 작업임과 동시에 노동집약적인 일이기도 하다. 최근 AI를 통해 만들어진 디자인이 유명 어워드에서 1등 상을 받는 등 디자인 분야에서 AI가 빠르고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AI의 발전은 동시에 AI를 통해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는 세상이 되기도 하다. AI 시대에는 인간의 창의성이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동반자적 디자인 사고가 중요하고, 디자이너들에게는 수준 높은 의사결정의 역량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조득진 선임기자 chodj21@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