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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보다 ‘돈’보다 더 쎈 ‘말’의 힘… 言力을 아는가 

중용의 언력은 군사·경제력에 이은 제 3의 파워… 오바마, ‘말의 힘’으로 대통령 당선
이어령이 말한다! 言力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별난페이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 한마디로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일컬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이 속담을 바꿔 말하면 실언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 양날의 힘을 가진 말의 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이번 경제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답이 있다고 한다. 말의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에 즈음해 ‘오바마 화법’이 화제다. 탁월한 연설 솜씨를 바탕으로 정치적 소외층과 정치에 무관심했던 계층을 선거판으로 끌어내 대선 승리의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대통령 탄생에 가장 큰 공신은 말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은 한마디로 “언력(言力·word power) 쓰나미가 밀려온다”고 말한다.

언어의 힘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던 글로벌 파워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이다. 군사력·경제력에 이어 ‘제3의 파워’가 된 말의 힘에 대해 이어령 고문에게 들었다.

- 오바마 정부의 탄생과 링컨 탄생 200주년이 맞물려 미국 진원의 경제위기가 쓰나미처럼 또다시 세계를 덮치고 있습니다. 언어의 힘이 글로벌 파워로 등장한 것과, 세계가 슈퍼파워 미국의 1극지배체제에서 무극화(無極化)로 내닫는 글로벌리즘의 변모가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리고 한국의 현실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언력’-그 말의 힘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은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쿠바사태 등 정치적 위기를 맞았을 때 사용한 말이지요. ‘위기를 한자로 쓸 경우 두 마디 말로 이어진다.

하나는 위험(danger)이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기회(oppotunity)라는 말이다(When written in Chinese, the word ‘crisis’ is composed of two characters. One represents danger, and the other represents opportunity)’라고요. 불과 스무 자밖에 안 되는 이 한마디 말이 전쟁 일보직전의, 그리고 베트남전을 비롯해 외교적 궁지에 몰렸던 미국에 활력과 도전과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쿠바사태의 위기를 이용해 케네디는 지도자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얻게 됐지요. 이것이 바로 언력입니다.”

-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케네디 대통령이 한 말이었군요?
“그렇지요. 위기(危機)라는 한자 풀이에서 비롯된 말을 한자권에 사는 우리가 역수입한 셈이지요. 사실 한자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은 위기라는 말이 한자의 ‘위(危)’와 ‘기(機)’라는 두 말이 합쳐진 말이라는 것조차 느끼고 살아온 적이 거의 없지요. 그것이 영어권의 대통령 케네디의 말을 통해 퍼지자 그때서야 위기라는 부정적 말 속에는 희망과 긍정적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위기의식을 창조적 에너지로 돌리는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한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위기’라고 할 때의 그 기(機)가 케네디의 해석처럼 기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기계(機械)라고 할 때의 그 ‘기’이기 때문에 옥편의 글자풀이도 ‘베틀 기’라고 돼 있어요. 인터넷을 찾아봐도 곧 알 수 있지만 최근까지도 ‘위기는 기회’라는 말은 한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오독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한자의 위기는 그냥 ‘위험한 시기’ 이상의 뜻은 없다는 지적이지요.

사실 이 말 자체가 케네디가 한 말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영·미권에서 격언처럼 쓰던 말이라고 해요. 문제는 그 말을 누가 했든, 그 뜻이 오독에서 온 것이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케네디 대통령이 말의 창조적 힘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입니다. 위험이라는 뜻밖에 없었던 영어의 ‘크라이시스’에 기회라는 예상치 못한 신개념을 부여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입니다.”


오바마 취임연설이 있은 후 블로거들은 오바마의 취임연설과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나란히 게재하며 기존 언론보다 앞서 150년 간극을 뛰어 넘으며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두 연설에 주목했다.

케네디의 “위기는 기회”

- 그 말의 힘이 지금 오바마와 링컨 열기와 관련돼 경제위기와 맞물린다는 관점이시군요? 그리고 그것이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와도 연결된다는 것이고요.
“맞아요. 오바마는 링컨의 코스를 그대로 따라 위싱턴에 입성했고, 국립도서관에서 링컨이 취임선서를 한 성서를 대출해 사용했습니다. 링컨의 지문과 오바마의 지문이 한 곳에 찍힘으로써 오바마는 자신이 바로 150년 전 남북전쟁으로 동강난 미국을 통합하려 했던 링컨의 입장과 심정, 그리고 정치철학의 동일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특히 무력으로는 승리를 이끌었지만, 남북의 마음을 안는 통합의 힘은 칼보다 강한 말의 힘, 언력에 의한 것임을 오바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입니다. 링컨·케네디·오바마는 모두 위기를 말로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려 한 언력의 일란성 세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명연설로 리더십을 발휘했고, 그 거대하고 다양한 미국을 통합한 매력(인기)을 얻었던 것이지요.”

- 오바마의 취임연설은 바로 언력으로 미국을 붕괴시킨 경제 쓰나미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시도라고 봐야겠군요? 그런데 우리 언론은 크게 관심을 가진 것 같지 않더군요.
“바로 그 점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오바마의 취임연설에 대한 블로거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이 일고 있어요. 전문을 게재하고 거시적으로 내다본 글에서부터 바늘 끝 만한 말 한마디를 놓고 천착하는 미시적 분석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오바마가 취임연설 첫 대목에서 자신이 44번째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사람이 됐다는 말을 놓고 대통령의 첫 실언(president first error)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지요.

취임 대수로는 44대지만 22대, 24대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대를 건너뛰어 두 번 역임(1885~89, 1893~97)했기 때문에 사람으로는 43번째가 옳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링컨의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과, 이번 오바마의 취임연설을 나란히 게재한 블로그들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대에 150년을 건너뛰고 두 연설문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이 무서운 말의 힘, ‘색깔은 변하고, 사원은 붕괴하고, 제국은 허물어져도 현명한 말은 남는구나’라고 노래한 손다이크 에드워드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죠. 하지만 링컨 시대의 큰 물결은 부국강병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였습니다.

마이크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그 연설을 했지만, 오바마는 200만 명의 청중과 2만5,000명이 경비하는 자리에서 20분간의 연설로 언력의 시대가 무엇인지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따로 감사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지구의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던 것이죠.”

이 대목에서 이어령 고문은 “군사력·경제력 다음으로 언력이라는 ‘제3의 파워’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 매우 드물다”며 “이것이 금융위기보다 더 큰 진짜 위기”라고 강조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오바마의 취임연설

-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오바마의 취임 연설을 비교해 언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첫째, 말의 힘은 마이크로 콘텐츠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링컨의 연설은 2분 조금 넘는 시간에 270여 단어에 지나지 않는 매우 짧은 내용이었지요. 카메라맨들이 찍으려고 하자 이미 연설이 끝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연설한 버네트의 연설은 장장 2시간이 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오바마의 취임연설도 불꽃놀이보다

짧은 20분이었습니다. 대학 강의시간과는 다른 연설 양식입니다. 이번 미국의 대통령선거전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것은 다름 아닌 ‘유튜브’였는데, 그 사이트에 오른 동영상들은 텔레비전 뉴스처럼 긴 것이 아니라 2~3분 길이여서 TV를 누르고 번져갔지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도 인터넷을 이용한 마이크로 콘텐츠의 말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바마가 공식 인터넷 참모로 누구를 지목한지 아세요? 바로 하버드대 2학년 재학 시절 ‘페이스 북’이라는 SNS(Social Network Site)를 열어 일약 수백만 명의 회원을 모은 20대인 마크 주커버그였습니다. 간단한 말 한마디의 힘이 도시 전체를 날려버리는 화약에 불을 붙이는 트리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오바마는 바로 그 말의 심지가 무엇인지 잘 이용해 대통령이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의 경쟁자였던 힐러리나 매케인 모두 발음이 어려워요. 젖먹이 아이들에게 따라 하라고 하면 절대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파열음이나 폐색음이 없는 오바마라는 이름은 단순하고 발음하기 쉽기 때문에 젖먹이 아이들도 금세 따라 해요.

그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올린 것이지요. 그러면 수백만 명이 그 영상을 보고, 그것을 모방해 자신의 아이들 것도 올리지요. 이것이 ‘오바마 베이비’라는, 선거 사상 처음 있었던 캠페인 방식입니다. 아이젠하워가 이름을 브랜드화한 ‘I like Ike’라는 멋진 운을 사용해 인상적인 마이크로 콘텐츠를 만들어 대선에서 승리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언력을 발휘한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 이제 언력이라는 것이 대권을 만들어 내는 핵폭탄이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통합의 언어, 접착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언력은 두 개의 다른 효력이 있어요. 하나는 폭탄 같은 힘이고, 또 하나는 내 편 네 편의 이질적 의미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분단의 언어, 서로 다른 이념이나 대립과 갈등을 낳는 언어를 통합해 융합·화합·결속의 힘을 만드는 부레풀 같은 언어의 힘을 냈지요. 링컨은 내전으로 인한 남북의 분열, 오바마는 주로 인종차별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라크전쟁으로 확대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분단의 언어를 통합하고자 하는 말의 힘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 분단언어라고 하셨는데, 분단국가인 우리의 경우만큼 언어의 분단이 심각한 나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분단의 언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요?
“노무현 대통령이 분단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던 당시 같은 한국말인데도 서로 뜻이 다른 분단의 언어로 인해 서로 모르게 회담의 장벽이 생겼던 것을 생각해보면 알 것입니다. 좀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기회에 언력이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자세히 말해 보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이야말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은 장벽’이라고 토로했죠. 분명히 노 전 대통령은 ‘이놈의 선’ 때문이라는 속어를 쓰지 않았으며 ‘제가 다녀오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지게 될 것’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썼습니다.

말 많은 사람들도 이 순간만은 ‘설레고’ ‘착잡하다’고 한 노 전 대통령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극적으로 드러난 노란 색 금단의 선은 평소에는 없었던 것으로, 이날 행사용으로 칠한 것이라고 합니다. 분단의 상징적 경계선을 직접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한 그 연출 방식처럼,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우리는 남북 사이에 가로놓인 많은 금단의 선이 겉으로 노출되는 효과를 경험했습니다.

김구 선생이 처음 그 금단의 선을 넘었을 때 이상주의의 안개에 가려 느낄 수 없었던 것들과, 김대중 대통령이 첫 방북 길에 올랐을 때 감상주의의 눈물로 얼룩져 볼 수 없었던 것들을 2007년에는 남북한 모두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만수대의사당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는 글을 남겼을 때 우리 국민은 ‘인민’이라는 언어의 분계선을 새삼 발견했을 것입니다.

한때 금기시했던 말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인민이라는 말을 ‘국민’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는 ‘혁명의 대상을 제외한 로동자·농민을 비롯한 사람’들로 정의돼 있기 때문이죠. 북에 가면 노 대통령이 ‘로무현 대통령’으로 기술된다는 단순한 표기법상의 차이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남북경제협력회담에서도 경제문제 자체보다 그와 연관된 개방·개혁 같은 용어의 문제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그런 말들이 체제를 부정하는 금기어로 인식되기 때문이죠. 통신시설을 현대화하는 데만 20조 원이 든다는 북한의 실정을 감안할 때 남북경협의 주체는 민간기업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는 기업가를 ‘로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 못박아 놓았습니다. 남북한이 진정한 경제공동체를 이루려면 언어공동체로서의 기반부터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가 생겨난 것입니다. 곡절이 많은 ‘아리랑 공연’ 관람도 문화의 분계선을 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줍니다.

공연 내용을 아무리 수정한다고 해도 어린아이들까지 10만 명을 동원해 매스게임을 벌일 수 있는 문화와, 붉은악마의 경우처럼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단 1,000명의 조직 동원도 불가능한 나라의 문화적 감각과 그 양식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자랑하는 일사불란의 집합미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기계적 획일성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도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진영의 공식 인터넷 참모였던 마크 주커버그.
인터넷을 이용한 마이크로 콘텐츠의 말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바마는 공식 인터넷 참모로 하버드대 2학년 재학 시절 ‘페이스북’이라는 SNS(Social Network Site)를 열어 일약 수백만 명의 회원을 모은 20대인 마크 주커버그를 지목했습니다.”



선거운동 당시 와이오밍주를 방문해 연설 중인 오바마 미국 대통령.

선동의 언어에서 통합의 언어로

뿐만 아니라 남북 정상이 애써 평화의 공동선언문을 만들어내도 평화라는 말 자체가 지니는 뜻이 다르면 그 의미는 희석되고 맙니다. 북한에서도 평화라는 말은 로동당 강령에도 등장하는 등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의’자가 붙으면 그 뜻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고 말아요. 남북한을 대표하는 두 사전을 놓고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평화주의(平和主義)는 ‘평화를 적극 주장하는 태도나 운동’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에 아부 굴종하면서 정의의 전쟁도 포함한 전쟁 일반을 반대하고 무원칙한 평화를 주장하는 반동적 사상이나 태도’라고 나옵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져 통일된 뒤에도 독일은 경제적·문화적 장벽은 허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경제의 벽은 1,820조 원을 투입해 겨우 허물 수 있었으나 문화의 장벽만은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어요. 군복을 벗은 북측 경호원들이 가슴에 단 배지만 떼면 남측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보도기사가 있었지만,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남북의 구분은 없어질 수 없죠. 피가 민족이라면, 그 피보다 더 진한 것이 바로 민족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고 보니 링컨의 연설문 가운데 핵심어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구절의 ‘국민(people)’도 남북한에 따라 번역이 달라지겠군요?
“그렇지요. 우리는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고 말하지만 ‘Democratic people’이라고 해서 인민공화국이라고 표기하는 북한에서는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 되겠지요. 같은 한자를 쓰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인민, 자유 진영에서는 국민이라는 말을 씁니다.

용어는 개념전쟁의 총탄 구실을 합니다. 링컨이 그 연설에서 시민(citizen)이라는 말을 피하고 국민(people)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또 연방(union)이라는 말 대신 국가(nation)라는 말을 선택한 것도 남부와 북부를 아우르려는, 편향성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결과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링컨이 전쟁의 언어에서 통합의 언어로 향한 것처럼, 그래서 쌍방을 아우르는 말을 찾아내려고 애썼던 것처럼 오바마 역시 취임연설에서는 선거캠페인과 다른 전략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어요. 선거전에서 오바마의 연설을 관심 깊게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취임사에서도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변화(change)라는 말과 ‘예스 위 캔(Yes, We can)’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지요.

겨우 한두 군데 정도 나오는데, 그것도 정치적 문제라기보다 지구 인구의 5%밖에 안 되는 미국인들이 지구 전체 에너지의 3분의 1을 소비한다는 비난을 염두에 둔 듯, 이제는 세계가 다 변할 때 미국의 소비 패턴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온 정도입니다. 선거 때는 자극적이고 선동적 표현을 볼 수 있었으나 취임연설에서는 오히려 실망할 정도로 중용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것은 선거전 때의 말은 한쪽을 치고 한쪽을 택하는 싸움의 언어이기 때문에 자연히 언어도 쏠림 현상을 보이지만, 취임에 즈음해서는 통합의 언어로 균형을 중시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쏠림의 언어들을 어떻게 중용의 언어로 바꿔 가는가, 그래서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이 통합의 언어에 의해 넓혀가고 갈등이나 분열을 넘어 힘을 모으는가 하는 긍정의 언어, 창조의 언어를 찾아내는 작업일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바마가 구사한 통합의 화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었나요?
“오바마는 구어를 많이 활용합니다. 이번 취임연설에서 언급한 ‘프라이스(대가를 치른다)’라는 말도 일상적인 구어입니다. 또 일반적 표현보다 구체적 표현을 많이 활용했죠. 취임사에서 오바마는 ‘2차대전’은 노르망디전투, 남북전쟁은 게티스버그라는 표현을 사용했죠. 제유법을 쓴 것입니다. 문인을 펜이라고 하듯 말이지요.

또 취임연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행에 비유해 썼어요. 미국 국민을 ‘아무 짐도 없이 꿈을 찾아 이 땅에 온 사람들’로 지칭하며, 이들이 지금 여행 중에 겨울을 만났는데 그 겨울을 극복하고 행진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취임연설문의 큰 줄거리죠. 미국의 역사를 끝없는 여행, 끝없는 행진으로 본 것입니다.

또, 오바마는 취임사에서 ‘A냐 B냐(Not A, But B)’ 하는 흑백의 화법이 아니라 ‘A뿐 아니라 B도(Not only A, But also B)’라는 긍정의 화법을 구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새 일터를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성장의 기반을 닦으려 한다’고 말하죠. 이 말 속에는 부정보다 긍정의 화법에 익숙한 서양의 화법이 농축돼 있죠.”


전 세계인 누구나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소니와 한국어 음 그대로 영문으로 표기해 외국인들이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삼성.

한국어, 긍정의 힘보다 부정의 힘 발달

-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긍정의 언력, 창조적 언력이 싹트기 힘들까요? 시위 현장의 언어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말을 선택해야 속된 말로 ‘약발’이 먹습니다. 야당도 투명성을 위해서는 강경한 말을 써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의 힘은 독한 말, 막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요.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사용하는 가정 내 대화도 대부분 부정의 언어로 되어 있어요.
“오랫동안 억압돼왔거나 식민지 시대처럼 남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에게는 말은 유일한 저항과 자기방어수단이 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여론의 여(輿)는 한자의 수레·가마를 뜻하는 것으로, 수레를 끌고 가마를 메고 다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여론은 수레에 탄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끄는 사람, 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기에 저항적이고 부정적 비판정신이 언력이 되는 것이지요. 무력·재력(금력)을 쥔 힘있는 사람들일수록 언력에 대해 하찮게 생각합니다. 말보다 권력이나 재력으로 얼마든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 의사대로 세상을 끌고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무력도, 권력도, 재력도 없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었던 최후의 기둥이 언력이었던 것입니다. 부정의 언력은 한곳으로 쏠릴수록 선명하고 폭발성이 강하죠. 결사·절대박살 등 극한적이고 자극적인 말들이 생겨 나게 된다는 거죠. 막말과 욕설은 말을 넘어 혈서의 언어로, 거기에서 다시 폭력의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의 언어로 번지면서 부정적, 극한적 말의 힘은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인터넷 여론의 힘도 갈수록 막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의 네트워킹인 인터넷은 최첨단 과학기술입니다. 하지만 네트워킹을 통해 돌아다니는 콘텐츠는 결국 과거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던 입소문의 변형된 형태죠. 인터넷의 발전 덕분에 입소문이 전 지구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됐죠. 과거에는 입소문이 지역적으로 국한돼 그 힘도 지역적으로 국한됐었는데, 인터넷과 블로그와 UCC가 생겨나면서 한 개인의 말의 힘이 전 지구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고문은 “인류문명의 파워 이동이 과거 군사력이라는 물리적 파워를 가진 자로부터 경제력을 가진 자로 이동했고, 이것이 곧 ‘부국강병’으로 일컬어지는 20세기까지의 파워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많은 국가가 부국강병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부국강병의 파워가 막강하지는 못해요. 제3의 파워인 말의 힘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이 말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 인터넷이고요.”

- 말의 힘이 이용되고 있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을 지칭하시는 것이죠?
“말의 힘이라고 할 때, 말은 실제 말뿐 아니라 소통을 위한 콘텐츠 전체를 일컫습니다. 동영상과 디자인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죠. 상품도 일종의 언어이고 말의 힘이 뻗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품이 갖는 이미지, 상품이 갖는 매력도 결국 지적 가치이고 정보적 가치인데, 그것이 결국 언어의 힘이거든요.

언어의 힘이 사회적 파장을 낳은 가장 구체적 예를 들자면 지난해 있었던 촛불집회, 촛불집회 뒤에 있었던 광우병이라는 세 글자로 된 단어죠. 만약 언론이 광우병이라는 표현 대신 일본처럼 학명인 BSE(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라는 단어를 썼다면 과연 지난해와 같은 광우병파동이 있었을까요? 사람들이 청계광장에서 ‘광우병’ 또는 ‘미친소’라는 피켓 대신 BSE라고 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골드스타와 LG의 차이

- 정말 그렇네요. 같은 의미의 단어에도 그처럼 큰 뉘앙스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그것이 바로 언어의 힘입니다. 광우병은 일상어이고, BSE는 학명이든요. 노인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늙은이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것과 비슷하죠. 일반적으로 일상어는 정감적이고 주관적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논리성에서 벗어나기도 하고요. 일상어의 문화를 가장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이 ‘막말’이죠. 막말이 갖는 말의 힘이 대표적인 말의 부정적 힘이고요.

반면 학명이나 철학적 용어, 과학적 용어는 중립적인 것이 많습니다. 의학용어도 일종의 과학용어이니만큼 중립적이지요. 병명은 일상어를 사용하면 지나친 공포 혹은 반대로 낙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상어를 잘 사용하지 않죠. 예를 들어 ‘장티푸스’를 우리말로 하면 ‘염병’입니다. 한자로는 ‘장질부사’이고요. 상가에 가서 ‘아버님이 염병으로 돌아가셨다면서요?’라고 해봐요.

당장 따귀 석 대는 날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장질부사로 돌아가셨다면서요?’라고 하면 상주가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아무 말도 못할 것입니다. 반면 ‘ 아버님이 장티푸스로 돌아가셨다면서요?’라고 하면 ‘아, 예. 그렇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똑같은 병이지만 염병이라고 할 때와 장티푸스라고 할 때의 어감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것이 일상어와 중립어의 차이이고요. BSE만 해도 소(Bovine)가 스펀지처럼 되는 증상(encephalopathy)을 뜻합니다. 전혀 미쳤다는 뜻이 포함돼 있지 않죠. 심지어 병도 아니라 증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그것도 머리글자만 따서 BSE라고 하고요. 이렇게 약자를 쓰면 그나마 무슨 뜻인지 모르는 시스템 언어가 되니까요.

약자를 쓰면 그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선입견이 안 들어가거든요. 때문에 요즘에는 기업도 점점 약자를 쓰는 추세죠. ‘금성’이라고 했을 때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생각나지만, ‘LG’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잖아요. 요즘에는 회사 이름을 지을 때도 이렇게 언어의 힘을 빌립니다.”


- 언어에는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 그리고 중립의 힘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어의 힘을 말할 때 당장은 언어의 부정적 힘이 긍정적 힘보다 셉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창 이념싸움을 할 때 나왔던 구호들은 ‘결사반대’ ‘박멸’ ‘XX 죽여라’ 등의 부정적 언어였습니다. ‘‘결사반대’ 대신 ‘우리는 원만한 해결을 원한다’고 논리적 표현을 쓰면 선동 자체가 안 되죠. 선동가들이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언어를 쓰는 이유죠. 선동가들은 언어의 힘을 알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사람들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언어의 힘을 발휘한 콘텐츠는 성서입니다.”

억압의 한이 막말정치 낳아

-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기독교의 성서 말입니까?
“네. 생각해 보세요. 2,000년 전 예수님이 가진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가진 힘은 ‘말씀’이라는 것 하나였습니다. 그 말씀이 곧 언어죠. 그 말의 힘 하나로 로마의 군사력과 맞선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의 군사력과 재력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예수님의 말은 아직도 살아있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 거대한 가톨릭과 맞서 싸울 때 유일하게 성서 한 권을 들고 싸웠습니다.

그의 무기는 구텐베르크의 활자였고요. 국회를 영어로 ‘Parliament’라고 하는데, 라틴어 계열의 ‘파레(말하다)’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폭력보다 말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의회라는 것이 생긴 것인데, (국회에서) 망치가 나온다는 것은 말의 힘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지요. 그래서 한국정치가 절망스럽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요. 이는 아직 말의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블로그나 인터넷에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말의 힘을 더 잘 알아요.”

이 대목에서 이 고문은 “말의 힘을 철저하게 따져야 할 시대가 왔다”고 강조했다. 말의 힘 중 창조적이고 긍정적 힘이 아니라 파괴적이고 부정적 힘만 활용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우리 주변에는 욕쟁이가 많아요. 옛날에는 자기 자식한테도 저주에 가까운 욕을 했고, 떼를 쓸 때는 ‘배째고 소금 넣으라’는 끔찍한 극한 용어도 잘 씁니다. 반면 일본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칼의 나라임에도 욕이 발달하지 않아 바보라는 뜻의 ‘빠가야로’ 정도입니다. 억압당한 한이 그대로 남아 오늘날의 막말정치와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막말 댓글로 되살아나는 것이고요.”

이 고문은 “이 같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그 대표적 예가 베토벤 바이러스”라고 말했다.

“바이러스는 원래 사람을 해치는 병균을 뜻합니다. 바이러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바이러스는 걸리거나 퍼뜨리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해로운 것의 전파력은 긍정적인 것의 전파력보다 강합니다. 우스갯소리로 “라면이 맛있는 이유는 몸에 해로워서”라는 말도 있잖아요? 때문에 ‘베토벤 바이러스’처럼 이 해로운 것에 좋은 것을 덮어씌워 좋은 쪽으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죠. 이렇게 부정적 언어를 긍정적 언어로 바꾸기 위해서는 ‘워드스미스(wordsmith)’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 언어의 조어 기능을 말씀하시나요?
“예. ‘스미스(smith)’가 ‘만들다’라는 뜻이니까요. 워드스미스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죽거나 산 제품의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들은 아직도 워드스미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 같아요. 영어로 써서 좋은 이름이 하나도 없어요. 일본 기업들은 워드스미스에 매우 신경을 씁니다. ‘도요타’만 해도 발음 그대로 하면 DOYOTA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요타라고 하면 힘없이 들려요. 탁음이기 때문에. 그리고 ‘도’ 발음을 잘 못하는 언어권이 많죠. 그 런데 P, T, K를 발음 못하는 언어권은 없거든요. 이 세 음은 전 세계에서 다 통해요. 그래서 DOYOTA가 아닌 TOYOTA가 된 것이죠. 이렇게 하면 T가 두 개 있어 음률도 생겨나고요. ‘SONY’도 처음에는 SONNY였어요.

그런데 이게 N이 두 개여서 ‘소니’가 아니라 ‘써니’로 읽히는 거예요. 일본에서 ‘쏜’은 손해라는 뜻이거든요. 잘못 발음하면 ‘손해났다’로 들리는 것이었죠. 반면 SONY는 ‘싸노스’라는, 음향이라는 뜻과도 발음이 비슷하고 또 라틴어로 ‘작다’는 ‘써니’와도 비슷하게 들리니까 N을 하나 빼고 SONY로 갔죠. 전 세계적으로 소니를 발음 못 하는 곳은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을 보면 아쉬운 것이 한둘이 아니에요. ‘삼성(SAMSUNG)’만 해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외국인은 거의 없습니다. 다들 ‘삼송’ ‘삼손’이라고 하죠. 세계경영을 하겠다며 세계무대를 휩쓸고 다녔던 대우(DAEWOO)도 읽기 힘들어요. O가 두 개 있어서 ‘다이우~’라고 발음되죠. ‘쌍용’은 심지어 SS로, S가 두 개예요. 우리나라에나 ‘ㅆ’이 있지 외국에서는 자음 두 개는 발음 못해요. 또 ‘현대’의 H음은 라틴어 계열의 나라에서는 발음이 안 돼 현대가 아니라 ‘욘대’라고 읽힙니다.”

- 말의 조어 측면에서 일본과 우리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확 느껴지네요. 우리가 워드스미스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문화는 말 잘하는 사람을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말을 잘해서 강연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강연하고 나면 ‘참 말씀 잘하시네요’ ‘말이 청산유수네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잘한다’면 긍정적 뜻보다 부정적 뜻이 강합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이 통찰력이 있다거나 창의력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말 잘하는 사람은 콘텐츠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말을 막힘 없이 술술 하는 사람으로 통해요. 하지만 정말 말을 잘한다는 것은 더듬지 않고 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콘텐츠를 전략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이죠. 지난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보여준 전략이 그 대표적 예고요.”

소니·도요타 vs 삼성·현대

이 고문은 “워드스미스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에 있던 말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파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로 정국이 바뀐 예 중 하나가 영국 총리였던 처칠의 ‘철의 장막’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처칠이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연할 때 한 말인데, 소련이 폐쇄적 사회임을 정문일침의 한마디로 꼬집은 것이었죠. 동서 냉전 시절 이 한마디가 몇 사단의 무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면서 소련을 포위했지요.

이 말이 중국에 가서는 ‘죽의 장막’으로 변형됐고, 북한에 대해서는 ‘싸리 장막’으로 변형됐고요. 그런데 철의 장막의 원래 뜻은 극장에서 불이 날 경우 무대와 객석 사이를 차단하기 위해 내려오게 만든 철문을 뜻하거든요. 이 말은 1910년대부터 독일에서 사용하던 말이었고, 소련을 그렇게 부른 것은 1930년대 외교관의 부인이었던 스노우든 부인이 소련에 대해 쓴 기행문에서 썼던 것이지요.

그 말을 처칠이 다시 인용해 유명해졌죠. 링컨의 그 유명한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도 실은 영어 번역 성경의 서문으로 쓰였던 말을 웹스터가 인용하고, 그것을 다시 흑인해방 주장자였던 바커 목사가 다시 인용한 것이 결국 링컨에 의해 불멸의 말로 전해지는 것이죠. 진정한 워드스미스는 독창성도 중요하지만, 남의 말이라도 얼마나 적절하게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이죠. 그것이 정치가가 할 일이고요.”

- 결국, 힘이 있는 사람이 말을 해야 퍼진다는 말씀이기도 하네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죠. 그래서 말의 힘이 군사력·경제력에 이은 제3의 파워라고 하지만,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군사력·경제력과 합쳐질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고요. 똑같은 말이라도 권력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 말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죠.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 큰 자원을 방치하고 있죠.

제가 오바마의 취임연설에서 가장 인상 깊게 들은 것이 ‘60년 전 시골 식당에서 차별받아 쫓겨난 아버지(흑인)를 둔 아들이 지금 대통령 취임식에서 여러분과 만나게 되었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서러움을 한풀이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언력으로 이용했습니다. 흑인 스미트 목사처럼 ‘갓뎀 아메리카(goddam America)’가 아니라 오히려 ‘블레스드 아메리카(blessed America)’로 찬양한 것입니다.

60년 동안에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건국 때부터 오늘의 미국을 만든 위대한 힘이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과거 민주화투쟁을 하다 투옥돼 고생했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어 집권자가 됐을 때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가능성이요, 위대성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됐습니까? 그런 대한민국을 소중하게 가꿔 미래의 아이들에게 물려주자고 말한 사람이 과연 있었습니까?”

이 고문은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연설의 한 대목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며 취임사의 한 부분을 소개했다.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이며, 이슬람교도의 나라이며, 불교도의 나라이며, 무신론자의 나라입니다.”

“이 대목을 우리 같으면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도 아니며, 이슬람교도의 나라도 아니며, 불교도의 나라도 아니며, 무신론자의 나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자연스럽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바마와 같은 혼혈을 두고 ‘흑인이며 백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정적 사고가 몸에 배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워싱턴에 아무런 네트워크도 갖고 있지 않던 흑인 상원의원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온전히 언력에 의해서였던 것처럼 우리도 말의 부정적 힘에 기대어 막말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창의적 언어를 물려줄 때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경제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요.”

이어령 고문은 긴 인터뷰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200903호 (20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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