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인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각성시킨 사자후 

누가 처음 말했느냐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말했느냐가 중요
역사를 바꾼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중세의 엄혹한 신권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근대라고 불리는 인간의 사회로 바통을 넘기던 순간에도 역사를 바꾼 한마디는 있었다. 결정적 순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한마디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년 8월28일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약 25만 명이 모인 가운데 치러진 워싱턴대행진에 앞서 행한 흑인 해방을 갈구하는 연설의 한 부분이다.

특히 최근 버락 오바마 신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 말은 다시 한 번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내뱉을 만한 매우 평범한 이 말은 오늘날 인류의 양심을 구한 한마디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포함한 연설은 그러나 시골 교장 선생님의 주례사만큼이나 길고 다소 지루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기도 문구를 인용하고, 때로는 설교 투의 화법을 사용하며 이어지던 연설 후반부, 드디어 많은 사람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부추기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이후 이 짧은 문장은 열세 번이나 더 반복되며 일정한 운율에 실려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결국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인종차별의 엄혹한 현실을 일깨워 마침내 약 반 세기 뒤에는 흑인대통령의 탄생을 지켜보게 했다. 그가 연설하는 모습은 영상으로 기록돼 육성과 함께 TV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방영됐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한다.

한마디의 말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물론 앞에서 인용한 킹 목사의 연설처럼 라디오나 TV의 힘을 빌려 그 감동을 전 세계가 공유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명연설도 대부분 처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많아야 수백 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결국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한마디도 따지고 보면 입소문을 통한 감동의 전파이거나 글을 통한 의미의 전파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곱씹는 명문장이나 역사를 바꾼 한마디도 대부분 글로 남겨진 기록이다. 연설의 목적은 선동이다. 명연설도 결국 현장에서는 열렬한 선동에 불과하다.

현장에서 얼마나 격정적 선동을 하느냐가 명연설의 핵심이다.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은 오히려 그 말이 현장을 떠난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명연설은 평상시보다 격정적 순간에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서양에 비해 동양에서 명연설이 드문 이유 중 하나다. 하기는, 동양이라고 해서 왜 명연설이 없을까?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百家爭鳴)하던 무수한 현자들도 결국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주군을 설득하거나 어전에서 소수의 가신들을 설득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동양 역사에서의 연설의 전부였다. 비록 소설이지만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수많은 세객이 그러하고,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와 맞서 싸우도록 손권 진영을 설득해야 했던 제갈공명 역시 그 설득의 대상은 많아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의 의미를 설파한 공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진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역사가 반복된 동양에서는 더욱이 연설다운 연설은 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백성을 앞에 두고 연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추측하건대 동양에서 오늘날의 명연설과 같은 형태는 차라리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다더냐”고 외치던 만적의 경우처럼 목숨을 걸고 봉기하는 반역의 순간에나 어울릴 법한 것이었으리라.

반면 서양에서는 결정적 체제 변화의 순간마다 그 순간을 움직인 한마디가 등장한다. 중세의 엄혹한 신권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근대라고 불리는 인간의 사회로 바통을 넘기던 순간에도 역사를 바꾼 한마디가 있었다.

1,000년 중세사회의 균열을 일으킨 말


“나는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1521년 4월18일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의 카를 5세 궁정에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교회의 권위가 엄연히 살아있는 세상에서 이 같이 말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당시 루터는 이미 교황으로부터 파면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독일의 영주들은 루터에게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 카를 5세는 신변 안전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이었다. 때문에 루터에게 그 자리는 자신의 죄를 벌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또한 말만 잘하면 죄를 면제받을 수도 있던 자리였다.

그럼에도 이미 자신의 주장에 확신을 갖고 있던 루터는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마르틴 루터는 이 사건 이후에도 영주들의 도움으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더 안락한 환경에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중세란 한마디로 교회의 권위가 세상의 다른 모든 권위 위에 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의 시작을 교회의 권위에 결정적으로 균열이 생긴 바로 이 순간이라고 봐도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닐 것이다. 이 한마디로 무려 1,000년 이상 서양사회를 지배하던 교회의 권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루터가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부터 교회의 권위가 상당부분 무너져 내렸음을 방증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이 신 중심의 역사에서 인간 중심의 역사로 무게중심이 옮겨온 경우였다면, 노예해방은 인간사회의 불균형을 해소함으로써 더욱 온전한 인간중심 사회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순간 최근 미국에서 킹 목사와 함께 새롭게 조명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었다. 링컨은 킹 목사가 1963년 8월의 워싱턴대행진에 앞서 행한 문제의 연설 첫머리에서 “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령에 사인을 했습니다”라고 소개한 바로 그 사람으로, 게티스버그에서 인간사회 평등의 원칙과 민주주의의 원칙을 제시하는 위대한 말을 토해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19일, 링컨은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그에 마련된 전몰자를 위한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해 불과 2분에 걸쳐 총 266단어의 짧은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이 바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로 인류 역사의 고귀한 가치인 민주주의라는 명제를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규정한 ‘게티스버그 연설’이다.

민주주의 이념을 간결하게 농축한 이 연설로 말미암아 인류는 민주주의를 해하려는 수많은 기만과 위협으로부터 온전하게 민주주의를 지켜갈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됐다. 때문에 링컨이 연설에서 “세계는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이라고 말했지만, 세계는 그의 연설을 인간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보호하는 금과옥조로 삼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링컨은 이 연설을 하기 전인 1963년 1월1일을 기해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연설의 첫머리에서도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말을 함으로써 노예해방의 의미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링컨은 스스로 완전한 노예해방론자가 아니었던 데다, 이때의 선언에는 다분히 정치적 명분도 섞여 있어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노예해방 ‘선언’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의 계기가 된 게티스버그 전투 상상도.
결국 노예가 법적으로 해방된 것은 1865년의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되면서였다. 그러나 이는 겨우 인종차별 철폐 역사의 시작일 뿐, 정확히 100년 후 킹 목사의 시기에도 여전히 흑인들은 엄혹한 시절을 견디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은 미국 땅에서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세게 곳곳에서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와 전체주의적 사고가 갖가지 얼굴을 하고 나타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하기 15년 전 유럽에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노예해방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인류 역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맺는 이 선언은 노예는 아니었으되 노예와 별반 다름없는 삶을 영위하던 노동자들을 해방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산주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후 지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국가들에서는 약 80년 동안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른 체제 실험이 이루어지는 등 인류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현재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은 간판을 내렸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가 들어 올린 횃불은 꺼지지 않았다며 그의 말에 기대어 새로운 인간 해방의 길을 찾고 있다. 노예해방과 평등사회를 지향하며 진일보하던 인류는 20세기 들어 두 차례에 걸쳐 발전에 역행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탐욕으로 빚어진 전쟁이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한 개인의 과대망상이 빚은 엄청난 비극이었다. 과대망상의 주인공은 독일 제3제국의 총통 히틀러였다. 1932년의 총선거에서 나치스가 제1당이 되고, 그에 힘입어 1933년 1월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어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고 이듬해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총통 겸 총리로 취임한다.

1935년 베르사유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한 히틀러는 병역의무를 다시 도입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인류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휘몰아갔다. 히틀러가 이렇게 일사천리로 권력을 쥐게 된 데는 그의 타고난 연설 능력이 크게 한몫 했다고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훈교육을 담당할 교관 양성 강습회에서 보수파의 우수한 학자와 정치가의 강의를 듣고, 토론과 연설 훈련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탁월한 연설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정치·경제·역사 등 다방면의 강의를 듣고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대중 연설에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며 나치의 당세를 확장했다. 특히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독일 국민을 격정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다.

그 가운데 “다수결은 한 천재를 죽인다” “이성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포와 힘이다” 등은 히틀러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로 기억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돌파해 프랑스로 진격하자 영국에서도 전운이 감돌았다. 결국 영국은 유화주의자였던 네빌 쳄벌레인 총리 대신 많은 사람들의 질시 속에 혼자 히틀러의 야욕을 일깨우며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해 전쟁광이라는 비난까지 받던 처칠에게 정권을 맡겼다.

처칠은 1940년 5월13일 의회에서 대독 선전포고와 같은 연설을 했다. 전쟁 상황에서 급하게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히고 닥쳐올 고난과 희생의 세월에 대비하도록 국민에게 경고하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처칠은 적절한 말의 반복을 통해 울림을 주면서 “단합된 우리의 힘을 믿고 우리 모두 전진합시다”라며 영국인들의 투지와 단결을 유도했다. 이 연설에서 처칠은 또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장을 포함시켰다.

“나는 피·수고·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그 뒤 ‘피·땀·눈물’ 이라는 세 단어로 정리돼 오늘날에도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 그리고 그 피와 땀과 눈물로 결국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마무리해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양차대전의 처참한 순간을 극복한 인류는 그러나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또 한번 아찔한 순간을 넘겨야 했다.

이른바 쿠바사태, 냉전의 서릿발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는 기선 제압에 성공해 가까스로 세계대전을 피해갈 수 있었다.

표절의혹에도 평화 분위기 없어

케네디가 이처럼 강경론을 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민의 단결된 힘이 있었고, 그 단결된 힘은 그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부터 바람직하게 고취해온 것이었다. 명연설가로 알려진 케네디는 1961년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라는 유명한 말로 미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수년 전 이 문장을 포함한 케네디의 명언들이 표절 시비에 오른 적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 등과 함께 미국의 3대 명언으로 꼽히는 케네디의 이 연설이 워런 하딩 제29대 미 대통령이 191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과 흡사하다는 것.

하딩의 연설은 “우리는 시민들이 정부가 무엇을 해줄지보다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 걱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였다고 한다. 앞에서 소개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명 연설 역시 나중에 킹 목사의 학위논문 등과 함께 표절 의혹에 시달린다. 그 전부터 전하던 어느 송가의 형식을 그대로 따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구도 케네디 대통령이나 킹 목사의 이 한마디를 폄하하지 않는다. 말이란 누가 처음 말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말했느냐에 따라 길이 남는 한마디가 되기도 하고, 흘러가는 한마디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부분의 명연설 역시 애초에 말한 사람은 따로 있었으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이 가장 적합한 시기에 적합한 장소에서 되새겨 발언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우리 뇌리에 남아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추동하면서 인류의 바람직한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200903호 (2009.03.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