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담대하게 독립운동가들을 이끌고, 그토록 망설임 없이 무장투쟁에 나섰던 투사 남자현이지만 친손자 김시련 앞에서는 더없이 따뜻한 할머니였다. 임종 때도 이 손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죽음마저 미루고 있었다. 부랴부랴 달려온 11세 손자를 바라보고는 “이제 됐다”는 말을 나직이 뱉었다. 그러고 간직하던 행낭을 풀며 49원80전의 절반을 손자 공부시키는 데 쓰라고 당부했다.
혈육에 대한 애착은 보편적인 모성 그 이상의 것이다. 젊은 시절 3대 독자였던 남편을 여의었을 때 그녀는 배가 부른 몸으로 상(喪)을 치렀다. 유복자인 4대 독자 김성삼은 그녀에겐 삶의 이유였고, 삶의 무게이기도 했다. 만주로 건너간 뒤 남자현은 경북 영양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고 있을 아들을 급히 불러 올렸다. 그에게 공부를 시키는 게 급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성삼이 낳은, 당시로서는 유일한 손자가 김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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