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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산성기행 | 관산성과 옥천 

구진벼루 외진 굽이에 서린 聖王의 恨
백제의 운명 가른 관산성전투… 중흥조 잃고 쇠락의 길로 

한성을 잃은 백제는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로 서울을 옮기고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운명을 가르는 일대 격전을 앞두고 중흥의 중심이었던 성왕을 잃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제는 어디였는지 자취마저 희미한 구천(구진벼루)에는 매복에 걸려 말먹이꾼에게 목이 잘린 성왕의 한이 서려 있다. 그 애절한 역사의 현장 관산성을 오른다.
백제 성왕 32년(554) 7월 어느 날 밤, 한 무리의 군마가 밤길을 달려 지금의 충청도 옥천 부근의 구천에 이르렀다. 구천은 옥천읍 서쪽에서 금강을 향해 북류하는 서화천 일대를 말한다. 성왕이 직접 거느린 병력은 보병과 기병 50명이었다. 관산성 부근에 주둔했던 백제군 본영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백제군 본영은 고리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태자 여창(餘昌)이 대군 3만 명을 이끌고 신라군과 대치했다.



전세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성왕은 비밀리에 태자 여창이 주둔한 고리산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에 따르면 전투에 시달리던 태자 여창을 위로하려던 길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사 회의를 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간을 단축하고 비밀을 유지하려는 기·보병 50명의 단출한 야간행군이었다. 밤길을 달리는 병사들의 모습은 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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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호 (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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