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돌아온 김태호-총리 낙마에서 4·27 당선까지 200일 심경 첫 토로 

`총리 후보 수락 준비 없는 욕심이었다` 

김태호가 돌아왔다. 친노 세력의 결집을 뚫고 4·27 재·보선 김해 을 지역에서 승리했다. 총리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한 지 7개월 만이다. 낙마 이후부터 선거 승리까지 200여 일간의 심경을 처음으로 쏟아냈다. 중국에서 홀로 지내며 박연차 회장 관련 위증 등 뼈저리게 반성 유세 한 달 만에 “태호 온다, 태호 온다” 시장 상인들 소리에 안도 내년 총선도 김해에서 출마… “남은 정치인생 김해에 걸겠다”

김태호(49) 한나라당 의원과는 이미 두 번이나 만났다. 그가 경남도지사를 할 때였다. 두 번 모두 인터뷰를 위해서였지만, 한 번은 경남도청 인근의 한정식집에서 복분자술을 곁들여 길게 식사도 같이했다. 두 번의 경험으로 본 그의 인상은 당당함이었다. 목소리도 우렁찼고 큰 키로 걸음걸이도 껑충껑충했다. 모나고 투박한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외모가 번지르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젊은 도지사의 자신감과 패기로만 지켜보기에는 좀 위태롭기도 했다. 누군가 날개만 달아주면 주저 없이 훨훨 날아갈 듯했다.

지난해 여름 그는 진짜 날개를 달고 40대 국무총리 후보로 중앙무대에 섰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현장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최연소 도의원, 최연소 재선 도지사의 화려한 배경만으로 중앙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관계를 위증한 데다 불법정치자금 대출 등 치명적 도덕성 결함이 문제가 됐다. 맥없이 낙마한 그는 서둘러 짐을 싸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떠났다. 머리도 식히고 공부도 하며 자성의 시간을 갖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김태호 이름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1년도 채 안 돼 성큼성큼 사람들 속으로 걸어나왔다. 4·27 재·보궐선거를 50여 일 앞둔 3월 5일. 김해공항을 통해 귀국한 김태호는 “일이 하고 싶어 미치겠다”고 했다.

다소 민망해 보이는 행보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당당했다. 김해에 내려와 당 지원도 거부하고 ‘나홀로’ 유세를 벌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였다. 도의원선거부터 두 번의 도지사선거를 거쳐 이번 국회의원선거까지 김태호의 선거불패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그가 11개월 임기의 초선의원으로 중앙무대에 섰다. 총리 후보였던 그를 낙마시킨 국회로 그는 다시 진격한다. 이번에는 초선의원이라는 자격이다. 짧은 시간 동안 좌절과 영광의 시간을 한꺼번에 겪은 그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주일의 절반은 김해에

김 의원은 선거가 끝난 요즘도 1주일 중 절반을 김해에 내려가 산다고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김해로 가는 날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왔다. 비행기로 45분. 김해공항에도 비는 내렸다. 택시를 타고 다시 30분. 신도시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장유면 상가 4층에 ‘김태호 사무실’이 있었다. 선거 때 쓰던 사무실을 그대로 썼다.


▎4월 29일 4·27 재·보궐선거 당선자들이 국회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호, 분당 을 손학규, 순천 김선동 의원.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했지만 그는 김해부시장 일행과 회의 중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의 사무실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집기도 사람도 별로 없는 휑한 사무실에서 10여 분을 기다리자니 밝은 연둣빛 넥타이를 맨 김 의원이 활짝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그의 표정은 다소 들떠 있었다.

“(악수를 건네며) 또 뵙는군요. 선거가 끝나도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은 힘들지만, 요즘도 유세현장에 나가 출근인사를 합니다.”

간단한 수인사를 끝내고 시작한 인터뷰는 꼬박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는 가끔 벅찬 심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가가 붉어지기도 했다. 낙마부터 당선까지. 다른 평가를 제쳐두고라도 김태호 개인에게는 고단한 행로였음이 틀림없다.

당선이 확정된 후 두 손을 번쩍 들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을 봤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죠?

“시베리아 벌판에 맨발로 서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사지에 있던 사람을 김해 시민들이 살려줬으니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슴이 벅차오를 수밖에요.”

다음날 일간지마다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와 악수하는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유 대표의 착잡한 표정과 김 의원의 표정이 대비됐죠.

“(손사래를 치며) 아닙니다. 저도 그때 웃지 못했어요. 자세히 보시면 아마 두 사람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학교 선배이기도 한 유 대표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유 대표의 손을 잡는 순간 그냥 두 사람 다 고생했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야권 단일후보로 민주당의 곽진업 후보를 제치고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가 결정됐을 때 심정은 어떠했나요?

“유시민 대표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봉수와 싸움이 아니라 유시민과 싸움해야 한다는 의미였나요? 선거판이 더 어려워지리라 예상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당내에서는 오히려 곽진업 후보가 됐다면 더 어려울지 모른다는 말이 돌았으니까요. 그렇다고 안심했다는 말은 아니고….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이미 끝난 마당에 더 이상 사족을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에도 김해에 자주 내려오나요?

“선거는 끝난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선거 전과 똑같이 요즘도 지역주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합니다. 최소한 5월 한 달 정도는 지역주민들의 민원을 확인하고 점검표를 만들어놓을 작정입니다. 마침 5월에는 국회 회기가 아니어서 다행이죠.”

이번 선거의 승리가 진짜 ‘김태호 진심’의 승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선거 내내 겸손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선거유세를 할 때도 건방지게 보일까 봐 손 한번 흔들지 못했습니다. 시민들에게 감히 ‘도와달라’는 말도 못 했고요. 머리를 숙이고 그저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3월 15일 예비후보 등록 이후부터 5000번 이상 90도 각도로 꼬박 아침 출근인사를 했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요. 건성으로 했다면 아마 계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그 진심이 통했다고 믿습니다.”

김해 시민들의 반응은 어떠하던가요?

“처음 3주 동안은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도, 격려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무엇 하러 여기 왔느냐, 정신 나간 사람 아니냐, 너의 고향으로 가라고 소리치는 냉담한 반응뿐이었습니다. 김해가 야당지역이지 않습니까? 저를 배척할 뿐 아니라 한나라당과 정부에 보인 반감도 심했어요. 어떤 한 분이 손을 열렬히 흔들어주시기에 너무 기뻐 자세히 보니 격려가 아니라 ‘너는 아니라’는 의미로 ‘엑스(X)’ 자를 긋는 식이었죠. 그때의 절망감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당 내부에서도 계파 간에 묘한 기류가 흘렀어요. 한나라당은 지지하지만 김태호는 안 된다는 세력이 단합해 제게 비난공세도 퍼부었죠. 안팎으로 외로운 심정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좀 변하던가요?

“출근인사를 하던 초기에 어떤 분이 다가와 ‘예전에 도지사 할 때 같이 찍은 사진을 집에 걸어놓았었는데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보기 싫어 창고에 쑤셔 처넣어두었다’고 대놓고 말씀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이 한 달쯤 지나 전화해서 ‘사진의 먼지를 털고 다시 걸어놨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화 받고 남모르게 많이 울었습니다. 시장 할머니들도 처음에는 눈도 안 마주치다 ‘태호 온다, 태호 온다’며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진심이 통하기 시작했구나 생각하니 울컥하더라고요. 한없이 불안하던 마음이었는데 좀 안도가 됐죠.”

유세 중 봉하마을에도 가셨을 텐데 누구를 만났나요?

“노무현 대통령 묘지에 참배하고 형님인 노건평 씨를 찾아갔어요. 지역의 어른이니 당연히 인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잘되기를 바란다고요. 살아 생전에 ‘동생(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태호는 정치적이기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을 전해주더군요. 송구스럽고 면목이 없었습니다.”


▎당선이 확정되자 눈시울을 붉히며 손을 번쩍 든 김태호 의원.

권양숙 여사는 만났습니까?

“권 여사는 저뿐 아니라 유세 도중 일부러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불편해하실 것 같아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생전에 인간적 교류가 있었나요?

“당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친해질 기회는 적었죠.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2007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이었죠. 경남도지사 자격으로 청와대 영빈관의 오찬에 초청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청와대에 가지 않고 봉하마을로 갔어요. 경남도지사로서 당연히 역대 대통령의 귀향을 환영하고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 후에도 노 대통령이 생태하천·오리농법·지역환경사업을 하는 데 제가 모두 지원해드렸습니다. 그분이 남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특권층이 없는 사회 추구 같은 가치는 저도 깊이 존경합니다.”

“주부 공략한 교육공약 큰 힘 돼”

4·27 재·보궐선거 지역 중 여권에 가장 불리한 지역이 김해 을이었다. 야권에서는 후보단일화라는 이벤트를 성사시키고 여론조사 결과도 상대적으로 꾸준히 높게 나온 데 비해 여권으로서는 강력한 카드가 없었다. 게다가 김해에 사활을 건 유시민 대표는 이봉수 후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태호 후보는 총리 후보 낙마자라는 낙인까지 찍힌 데다 선거 직전에는 특임장관실수첩사건까지 터졌다. 야권 단일후보가 나오면 백전백패할 상황이었다.

특임장관실수첩사건이 터졌을 때 심정은 어떠했나요?

“놀랐고 당혹스러웠죠. 겨우 민심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직후 주춤했거든요. 강원도의 한나라당 엄기영 후보 전화부대사건의 영향도 받았고, 정부의 신공항 백지화 발표 등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대통령 공약도 철회하는데 김태호 공약을 어떻게 믿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손으로 동작을 취하며) 운동장으로 치면, 이렇게 평평한 운동장에서 공정하게 시작한다기보다 땅이 기울어 공을 차면 도로 내려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언제 처음 승리를 예감했나요?

“개표 때까지도 질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개표 당일 모든 카메라와 언론이 상대후보 쪽으로만 몰렸거든요. 투표율이 35% 이하면 김태호에게 가능성이 있고, 그 이상이면 무조건 진다고 했어요. 5시 이후 퇴근시간에 장유면 유권자들이 줄을 서서 투표하면서 투표율이 41.6%로 올라가는 겁니다. 장유신도시에는 노동자와 젊은 층이 많이 살기 때문에 졌다고 여겼죠. 상대 후보는 승리 보도자료까지 준비했어요. 그런데 장유면 표를 열면서 결과가 뒤집혔습니다. 장유면에서 이기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거든요. 인구만 놓고 봐도 노 대통령 생가가 있는 진영읍이 4만 명이고 내외동이 8만 명, 장유가 12만 명이거든요.”

김해 을의 선거 결과를 보면 김태호 후보의 득표율이 50%가 넘지 않는 곳은 총 여덟 지역 중 진영읍·한림면·내외동 세 곳에 불과했다. 봉화마을에서 멀어질수록 김태호 후보의 지지율이 높았고, 이봉수 후보의 지지율은 김해 을 전체에서 봉화마을 주변으로 한정됐다. 경남도지사를 지낸 김태호의 인물론과 친노를 강조한 이봉수 후보의 정권심판론의 대결에서 인물론이 승리한 셈이다.

장유면에서 이길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육 분야 공약을 선점해 주부들의 점수를 받지 않았나 분석됩니다. 장유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한 30·40대 주부들의 최대 걱정은 먹고사는 문제 다음이 교육문제였거든요. TV토론을 다섯 번 했는데, 유치원과 초·중·고교의 여건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어요. 김해만 해도 중학교 졸업생 8000명 가운데 상위 1000명 이상은 외부로 유출되거든요. 이곳의 교육여건이 안 좋다는 의미죠. 김해의 발전뿐 아니라 소중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호소가 통했나 봐요. 제가 만난 김해 시민들은 어느 정권이 되든 민생고와 지역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줄 사람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지지율이 2%p 차이(김태호 51%, 이봉수 49%)였습니다. 유시민 대표에 대한 40·50대의 반감이 김 의원 쪽으로 갔으리라는 분석도 있습니다만.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거꾸로 보면 유시민을 좋아하고 김태호에 반하는 정서가 49%나 된다는 의미입니다. 승리한 덕분에 긍정적 평가가 따르지만, 20·30대 표는 유시민 대표 쪽으로 많이 갔다고 보죠. 선거란 항상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물론 운도 따랐겠지만요.”

선거에서 져본 적이 없죠? 특별한 비책이라도 있나요?

“제가 도의원부터 경선을 했습니다. 군수·도지사 두 번도 모두 경선으로 올라갔어요. 돌아보면 제일 어려운 선거가 도의원선거였습니다. 서울 여의도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하다 1000만원이 든 마이너스 통장 하나 들고 내려와 현직 도의원과 경쟁해 이겼습니다. 그때 경쟁 상대가 경남의 토박이 정치인인 이강두 의원의 처남이었어요. 그런데 이겼습니다. 초반에는 게임이 안 되었지만 민심의 방향을 믿고 달려들어 밤낮 가리지 않고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죠. 항상 ‘시작만 하면 역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도지사 선거의 경우에도 천막당사 시절 치열한 경선을 했는데, 지역 국회의원 대부분이 저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제가 확정되자 지역 국회의원들이 천지개벽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자성의 시간을 갖겠다며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선뜻 출마를 수락하게 되던가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 이렇게 실망시켰는데 어떻게 표 달라, 도와달라 말할 수 있느냐’며 펄펄 뛰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에서 도와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당에서도 처음부터 위태로운 지역이라고 평가했나 봅니다. 한나라당의 누군가가 나와 상대 후보를 이길 듯했다면 제게 나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겠죠. 지는데 김태호가 나가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될성부른 지역에 나갔다면 제가 더 욕먹었겠죠.”

처음 제안을 받은 것이 언제입니까?

“지난해 12월 말쯤이었습니다. 당도 당이지만, 정부 쪽에서도 ‘고생 좀 해달라’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가능성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말을 듣고 고심 끝에 결정했습니다.”

당의 누가 적극 추천하던가요?

“이름을 공개하기는 힘듭니다. 저를 걱정하는 사람은 백이면 백 다 말렸습니다. 사지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셈이다, 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느냐, 이번에 가면 정치적으로 끝이다, 1년만 참으면 또 선거인데 고향이나 쉬운 자리를 놔두고 왜 그곳으로 가느냐고요. 제가 판단해 나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선거 과정을 통해 청문회 때 부족했던 부분과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김해는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했고요.”

어떤 의미가 있는 지역입니까?

“경남도지사도 야권이 잡고 있습니다. 부산시장선거에서도 45%가 날아가고 겨우 이겼어요. 이번에 김해 을이 무너졌다면 한나라당으로서는 ‘쓰나미’였습니다. 야당 텃세인 김해 을에서 한나라당이 당선되었다는 상징성은 큽니다. 당선되고 김영삼 전 대통령께 첫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김태호가 한나라당을 구했어’라며 격려해주시더군요.”

서울대 농업교육과 재학 시절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 측근이었던 고 김동영 전 의원 집에서 하숙하면서 정치감각을 키웠다. 김 전 의원은 김 의원 부친의 어릴 적 친구였다. 그는 1992년 14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이강두 전 의원의 선거캠프에 합류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이 전 의원 당선 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에서 사회정책실장을 맡았고, 1998년 경남도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김태호 정치의 뿌리인 셈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막역하겠어요?

“대학시절 민주화 의식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민주산악회 같은 곳에 따라다니며 짐꾼 노릇을 좀 했습니다. 총리에 지명됐을 때도 ‘제가 민주화 활동을 할 때 ‘각하의 짐꾼을 한 태호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분도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요.”

“박연차 회장과는 안부전화만”

그는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트위터에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는 모호한 문구를 남겼다. 이 말은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국가주석이 심복인 린뱌오(林彪)를 떠나보내며 말했다고 전해지는 ‘톈야오샤위 랑야오자런(天要下雨娘要嫁人)’을 풀이한 말이다. 하늘의 뜻을 어찌하지 못할 때 인용하는 말이다. 총리 후보 낙마가 결국 자신의 잘못이 아닌 운명으로 알고 체념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일부 네티즌은 인터넷에 김 의원을 비난하는 글을 퍼붓기도 했다.

떠날 때 심정은 어떠했나요?

“좀 쉬면서 자성할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지난 10여 년을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혈혈단신 건너갔습니다.”

굳이 중국으로 간 이유가 있나요?

“많은 사람이 미국을 추천했는데, 미국 통은 많잖아요? 남북문제 해결의 키를 잡은 나라도 중국이고요. 이왕 떠날 바에야 중국이나 제대로 알고 오자 싶어 선택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농촌마을에서 자보기도 하고, 예술인·공산당원·경제인들 두루 만나고 다녔어요. 중국어 공부도 많이 했고요. 밥도 혼자 해먹은 덕분에 요리실력도 많이 늘었습니다.”(웃음)

중국어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잠깐 가서 배웠으니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머리 깎고, 택시 타고, 밥 먹으려 식당에 가거나 안부를 묻는 정도는 가능하죠. 의사소통은 대충 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안 쓰다 보니 잊혀지더군요.”

그곳에서 한국인들은 안 만났나요?

“류우익 중국 대사님과 식사한 것 외에는 한 명도 안 만났어요. 특히 한국 언론인과 만남은 의도적으로 차단했습니다. 반성하고 성찰한다며 떠난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돌아다닐 수는 없죠.”

떠나기 직전 트위터에 올린 글이 논란이 됐습니다. 어떤 뜻으로 썼나요?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다 접고 운명처럼 받아들이자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내공이 부족해 생긴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억울한 면이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무엇이 그렇게 억울하던가요?

“선거 치르면서 시민들에게 너무 차갑게 외면당하다 보니 총리 낙마에 따른 안타까움, 애절함, 분노 같은 복합적 감정들이 다시 일더군요. 그냥 박연차 회장을 만났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일면식도 없다고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바보 같았고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어요.”

그 당시 솔직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잠시 침묵 후) 그때는… ‘40대 총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는데 완벽해야 한다는 욕심만 앞섰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긴장도 많이 했고요. 하늘에 맹세하고 2006년 재선 전에는 박연차 회장과 사적인 만남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청문회에서 ‘사적인 만남이 없었다’고 하면 될 텐데 ‘일면식도 없었다’고 표현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모든 행동에서 촌놈 행실을 했고, 준비도 안 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재선되기 전인 2006년 2월 이상조 밀양시장의 출판기념회가 창원 인터내셔널국제호텔에서 있었어요. 박 회장이 밀양 출신이어서 이 시장이 박 회장도 초대했죠. 시장 3선 마지막이기 때문에 도지사도 초청한 자리에 불려나가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청문회에서 일면식도 없다고 했는데 이 사진은 뭐냐’고 공격했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돼버렸죠.”

출판기념회 자리를 사적 만남으로 보지 않은 것이군요?

“개념의 차이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만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뷰하는 식의 만남이나 저녁을 함께하는 정도가 만남이지…. 허 참,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공개적인 사진이 또 있을지 모르죠.”

두 번이나 경남도지사를 했고, 박연차 회장은 김해 굴지의 기업인입니다. 일반 상식으로 사적인 만남이 한 번도 없다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006년 저와 당내에서 도지사를 경선한 사람이 김해의 송은복 전 시장이었습니다. 이후 송 전 시장은 박연차 리스트에 올라 옥고까지 치렀습니다. 박 회장이 누구를 도와주었겠습니까? 재선 때 붙은 장인태 전 행정자치부 차관도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온 인물이고, 역시 박연차 리스트에 올라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박연차 회장이 양쪽을 왔다 갔다 하지 않은 이상 저와 사적으로 만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2006년 재선 이후에는 교류를 했다는 말씀이죠?

“박연차 회장은 사업상 멋있는 사람이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역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요. 박 회장과 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베트남 공장도 둘러봤습니다. 해외에 나가보면 압니다. 그래서 재선 이후 오히려 제가 접근했습니다. 행정부지사·정무부지사 데리고 같이 골프도 치고 기획실장도 수시로 보냈죠. 노무현 대통령 라인인 줄 알았으니까 박 회장에게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께 이런 사업을 하니 도와달라’는 식으로 했어요.”

이번 선거기간에는 전혀 만남이 없었나요? 박 회장도 요즘 김해에 자주 머무른다고 아는데요.

“이 지역 어른이니 내려왔을 때 전화로 안부인사 정도 드렸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전화로 ‘잘됐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상대 후보에게 오해받을까 봐 오히려 더 조심했어요.”

박연차 회장의 위증뿐 아니라 청문회 때 관용차를 부인에게 내줬다든지, 도청 직원을 가사도우미로 썼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부분은 기억력 문제가 아닌 도덕성의 문제인데요?

“관행의 일부로 받아들인 제 불찰입니다. 관행상 전직 도지사들도 해왔던 일이어서 큰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젊은 사람으로서 그러한 관행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크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할 때마다 청문회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라고요. 많은 분에게는 누를 끼쳤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인생공부가 됐습니다.”

“총리 제안은 발표 3일 전에 들어”

지난해 1월 25일. 그는 3선 도지사가 유력함에도 “밤잠 설치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고민한 후 결정, 새 그림을 그리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8월 8일 개각에서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탁됐다. 이로 인해 불출마를 선언할 때 이미 청와대와 사전 교감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떠돌았다.

언제 청와대로부터 처음 총리 제안을 받았습니까?

“3일 전이었습니다. 진짜예요. 신문에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제가 공식적으로 전해 듣기는 3일 전 맞습니다. 임태희 비서실장이 직접 전해줬어요. 그전에도 어렴풋하게 입각 제의는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입각 제의요?

“예. 총리 후보를 제안받기 1주일 전쯤인가 임태희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모시고 진해에 오셨는데, 진해에서 만난 제게 ‘대통령께서 깊이 생각하고 계신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어느 부처에 가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임태희 비서실장도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제가 총리 후보가 될 줄 몰랐던 겁니다. 어른이 끝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이게 뒷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이 부분은 언론에 처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안받고 바로 수락하기로 결정했나요? 부담되지는 않던가요?

“자격이 없고 많이 부족하다며 사양했어야 하는데, 솔직히 욕심이 생기더군요. 제 불찰이었습니다.”

3선을 포기했을 무렵에는 청와대로부터 입각 제의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는 말씀인 거죠?

“당연하죠. 지난해 임기가 마무리되는데 2009년 10월 청와대에 독대를 신청했어요. 3선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대통령에게 알리는 것은 의무고 정치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대통령 일정에 코펜하겐 환경회의 참석이 있어 계속 미뤄지다 결국 이듬해 1월 6일 시·도지사와 대통령의 간담회 때 만남이 이루어졌죠. 회의 끝나고 대통령과 만났는데 그때가 첫 독대였어요.”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만둔다고 말씀드리자 ‘왜?’ 그러시기에 ‘공부 좀 하려고요’ 했더니 ‘무슨 소리야? 도지사만 한 공부가 어디 있어’ 하시더라고요. 본인도 서울시장을 하면서 공부 많이 됐다고 하시면서요. 그러고는 ‘마무리는 잘해라’ 하셨어요. 본인도 시장 임기 마지막 날 오후 5시까지 근무하고 나왔다고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이 이야기도 처음 말하는 겁니다. 독대할 때 어른은 총리의 ‘총’ 자도 말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그대로 다 털어놓고 이야기합니다.”

중앙무대 진출의 꿈이 전혀 없지 않았죠? 예전 경남도지사 당시 인터뷰 때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네. 늘 가고 싶었죠. 꿈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중앙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심은 없는지요?

“이제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내공이 쌓였는지 확실히 돌아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두 번 실수할 수는 없죠. 지금 저는 1년짜리 국회의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김해 시민들의 지역 현안을 풀어가는 데 1년을 다 쏟을 작정입니다. 내년 재선에도 도전해야 하고, 지금 중앙이나 차기 대선 구도 같은 큰물에 신경 쓸 여력은 없습니다.”

다음 총선에도 김해에서 출마합니까?

“당연히 여기서 출마합니다. 이제 저는 김해를 떠나서는 정치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201106호 (2011.06.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