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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치 - 시진핑의 반부패 창끝 ‘큰 호랑이’ 겨누다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석유방’ 대표격인 저우융캉 상무위원 일가의 몰락 충격…“호랑이와 파리를 다 때려잡겠다”는 강력한 권력 드라이브의 최후 타깃은?

▎시진핑(오른쪽 셋째) 중국 국가주석의 반부패 캠페인은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강력한 권력 드라이브와 관련이 있다. 저우융캉 전 공산당 중앙정법위 서기를 향한 사정의 칼날은 본격적인 권력투쟁의 서막이다. 지난해 11월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마치면서 시 주석을 비롯한 지도부가 개혁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당신도 알잖아요(니동더).” 한자로 쓰면 단 세 글자(你懂的)인 이 짧은 문장이 중국에서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좀 더 풀어 쓰자면 “내 입으로 굳이 꼭 얘기해야 하나, 다 아시면서 뭘 새삼스레…”쯤 될 법한 말이다. 이 말을 유행시킨 사람은 뤼신화(呂新華) 정치협상회의 대변인이다.

3월 2일 오후 3시. 베이징(北京) 천안문광장 동편의 인민대회당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양회(兩會)라고 불리는 중국 최대의 정치행사, 즉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정치협상회의(정협) 개막을 하루 앞두고 뤼 대변인이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자리였다.

중국의 일반 서민들은 국가 대사는 물론 개인의 삶과 직결된 정책들이 어떻게 논의되고 결정되는지를 알래야 알 수가 없다. 중난하이(中南海)란 지명으로 통용되는 중국 공산당 핵심부의 의사결정 과정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중난하이는 청와대나 백악관 등과는 달리 언론의 접근 범위에서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1년에 딱 한 차례 예외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양회다. 각급 정부기관의 대표자와 전국에서 모여든 지방 관리들, 국영기업은 물론 기층 민중의 대표자까지 이 회의에 참석해 토론을 펼치고 그 결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 때문이다. 보도의 자유가 온전하게 보장되지 않는 중국이지만 이때만큼은 중국 언론들도 치열한 취재경쟁을 펼친다.

그런 만큼 뤼신화 대변인의 기자회견장은 몰려든 내외신 기자들로 성황을 이뤘다. 20분간의 모두발언에 이어 13개의 질문이 이어지고 사회자는 회견을 끝내려 했다. 이 때 예정에 없던 마지막 질문 기회를 잡은 사람은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베이징특파원이었다. 그의 질문은 장내에 모인 모든 기자가 가장 궁금해 하는 문제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많은 소식을 들어왔다. 대변인이 이에 대해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다.”

민감한 질문이어서 핵심을 피해갈 것이란 예상을 깨고 뤼신화 대변인은 여유 있게 대답했다. “사실은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매체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2013년 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위) 감찰부가 국법위반, 당규위반 혐의로 간부들을 사법처리한 게 31건이다. 그중엔 장관급 간부도 있다. 우리는 위법행위를 한 간부들을 엄정하게 조사했고 당과 사회에 공개했다. 직위가 얼마나 높은지를 불문하고 당규와 국법을 어긴 사람은 엄중한 조사와 처벌을 받는다. 이건 절대 빈소리가 아니다.”

그리곤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덧붙였다. “난 이 정도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당신도 알잖은가.” 기자석에선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농담처럼 던진 대답이었지만 여기에 담긴 정치적 무게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저우융캉의 위법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모든 신문은 처음으로 저우융캉의 이름을 적시했다. 그때까진 차마 실명을 쓰지 못하고 에둘러 표현해오던 바로 그 이름 석 자였다.


▎중국 서남부 쓰촨성을 기반으로 막강한 힘과 재력을 휘둘러온 류한 한룽그룹 회장. 그는 지난 2월 청부살인과 불법도박장 등 불법행위를 저질러온 폭력조직의 두목으로 지목돼 기소됐다.
정경유착 파문 촉발한 류한의 이중생활

뤼 대변인의 기자회견보다 8일 전인 2월 21일. 중국의 관영매체에는 흥미진진한 기사가 실렸다. 중국 서남부의 쓰촨(四川)성을 기반으로 막강한 힘과 재력을 휘둘러온 류한(劉漢)의 비리를 폭로한 기사였다.

부동산 개발과 건설관련 사업을 주로 하는 한룽(漢龍)그룹 등 10여 개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약 400억 위안(약 7조 원)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였다. <포브스>지에 의해 ‘중국의 숨은 부호’ 중 1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류한의 사제 무기고에서 발견된 다량의 총기.
재력뿐 아니라 현지 정계에서도 영향력이 막강했다. 쓰촨성의 정협 상무위원이란 공식 직함과 별개로 ‘제2의 조직부장’이란 별칭으로 불릴 만큼 지방정부와 당 조직의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랬던 류한이 당국의 조사결과 대량의 총기로 무장하고 청부살인까지 저질러온 폭력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드러났다고 중국의 각 매체가 대서특필했다.

류한 뒷배 봐준 유력인사는 누구?

개발사업의 이권을 둘러싸고 경쟁업자와 알력을 빚은 끝에 서로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총격전을 벌인 사례를 비롯, 그가 배후로 지목된 각종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9명에 이르렀다.

TV에는 20여 자루의 총기와 수류탄, 다량의 총알을 보관해둔 사제 무기고의 화면이 나왔다. 손에 피를 묻혀 번 돈으로 정·재계의 거물로 군림하면서 자선사업가로도 명성을 쌓아온 그의 실체를 폭로한 기사에는 ‘두 얼굴의 류한’이란 제목이 붙었다.

할리우드의 마피아 영화나 홍콩 갱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중국에선 버젓이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중국에서 발행부수 2위인 유력지 <신경보(新京報)>에 나온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2001년 류한은 귀인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각종 사건에 연루돼) 공안기관의 조사 명단에 올라 있던 그는 모 고위 지도자에게 거금을 전달했다. 자신의 이름은 명단에서 삭제됐다. 이후 류한의 사업은 다른 지방과 외국으로까지 뻗어나가 광업제국·자본제국을 건설했다. 2002년 무렵, 특수한 배경을 가진 기업가 저우빈(周彬)이 쓰촨에 투자했다. 류한은 (시세보다) 비싼 값을 치르고 이를 매입했다. 콴시(關係)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류한은 고위 지도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큰 이익을 남기고 있던 수력발전소 두 곳을 버진아일랜드에 등록된 기업 후이르(匯日)전력에 5억 위안에 넘겼다. 2개월 후 후이르는 이를 다탕(大唐)전력에 27억 위안을 받고 매각했다. 순식간에 22억 위안의 차익을 챙긴 것이다. 류한이 발전소를 후이르에 넘긴 것은 모 고위층과의 관계를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한 제보가 여러 차례 성(省)정부에 들어갔으나 아무 일이 없었다.”

결국 이 기사는 류한의 이중생활을 파헤치는 폭로기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어마어마한 파장을 예고하는 정치적 복선이 깔린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귀인’ 혹은 ‘고위 지도자’란 익명으로 류한의 뒤를 봐준 유력인사가 등장한다. 실명으로 등장하는 저우빈도 ‘특수한 배경의 기업가’라고만 묘사됐을 뿐이다. 하지만 저우빈이 누구인지, 나아가 ‘귀인’이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미 홍콩 언론 등 외신을 통해 저우빈이란 이름이 보도되고 있었고 뒤이어 재신망(財新罔)을 비롯한 중국 매체들도 그의 실체를 파헤치는 기사를 잇달아 내보냈다. 각 매체는 2002년께부터 석유사업에 투신하여 젊은 나이에 거부가 된 저우빈(42)을 ‘신비상인’(神秘商人)’이라 표현하면서 그의 성공가도에는 바로 얼마 전까지 권력 최상층부에 있었던 아버지가 든든한 배경 노릇을 해왔다고 보도했다.

그는 석유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광을 바탕으로 알짜배기 유전을 인수하는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공공주택 사업 이권까지 손에 쥐었다는 내용이었다. 저우빈의 알선으로 이라크에 수출한 석유 채굴장비에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수출업체인 국영기업 중국석유천연가스(이하 중국석유·CNPC)가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저우빈은 오히려 거액의 중개료를 챙겼다는 사실도 폭로됐다.

저우빈 부자가 이른바 석유방과 관련된 부패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보도는 정경유착은 물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암흑가와의 결탁,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무소불위의 특권층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특권의 대물림 현상 등 중국 사회의 어두운 실상이 ‘종합세트’처럼 한데 얽힌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저우빈은 지난해 12월 당국에 구금돼 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 매체들은 ‘니동더(你懂的)’ 식으로 굳이 저우빈의 아버지의 실명만은 언급하지 않았다. 학력, 고향과 가족관계, 현재 경영하는 기업의 이름과 소재지 등 밝힐 건 다 밝혔고 일부 매체는 저우위안건(周元根)이란 그의 어린 시절 이름까지 공개하면서도 지금 이름은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한 매체는 이렇게 썼다. “성이 저우(周)란 점이 저우빈의 인생 전반부를 결정했고, 그의 후반부 인생이 급전하게 된 것도 그의 성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눈매가 가늘고 체격이 건장하다.”

중국 언론이 한사코 이름 밝히기를 꺼린 저우빈의 부친이 저우융캉을 지칭하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이미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아들 저우빈과 동생 저우위안칭(周元靑)마저 구금당해 손발이 다 잘려 나간 가운데 가택 연금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중국 사법당국이 공식적으로 그의 실명과 혐의내용을 공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중국 언론이 관례대로 이를 쓰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중국인들은 물론 세계 각국의 언론은 과연 중국 사정당국이 저우융캉 본인에게까지 사법처리의 칼날을 들이댈지, 중국 당국이 이를 공표하는 시기는 언제일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저우융캉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이토록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일까? 저우융캉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이토록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일까?




‘상무위원 면죄’ 불문율도 깨지나

중국에선 오랜 불문율이 내려온다. “한 번 정치국원이 되면 설령 재임 중 비리 사실이 드러나 유죄가 확정되더라도 사형을 당하진 않고,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권력 핵심인 상무위원이 되면 모든 처벌을 면제받는다”는 것이다.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이후 중국의 정치체제는 집단지도체제다.

공산당 총서기를 겸하는 국가주석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은 주석이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이뤄진다. 만일 상무위원 사이에 이견이 있다면, 의견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논의와 조정을 거듭해 만장일치를 이끌어낸다. 13억 인구 중 현재 공산당 정치국원은 25명, 그중에서도 상무위원은 단 7명뿐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상무위원 개개인이 갖는 권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어림할 수 있다.

지난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당 서기는 정치국원에 머물렀고 끝내 상무위원에 오르지 못한 채 정치생명을 마감했다. 상무위원은 은퇴 이후에도 당의 주요 문건을 열람하고, 당 원로의 자격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에 의견을 개진한다. 헌법에는 아무런 명문 규정도 없지만 중국 공산당의 중요결정이 이뤄지는 베이다이허(北戴河)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한 번 상무위원은 영원한 상무위원인 셈이다.

상무위원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통해 중국의 권력이양은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어왔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이 퇴임만 하면 이런저런 혐의로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는 한국과 같은 일이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또한 권력 최상층부의 부패가 공개되면 공산당 통치 자체의 기반이 휘청거려 공멸할 수 있다는 공통의 위기의식이 이런 불문율을 지탱시켜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저우융캉을 겨냥한 당국의 조사는 매우 이례적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당 권력 핵심부가 얽힌 부패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오랜 불문율을 깨고 1949년 신중국 건국이래 부패 혐의로 정치국 상무위원이 처벌받는 첫 사례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마오쩌둥(毛澤東)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한때 그의 후계자로도 지목됐던 류샤오치(劉少奇)나 혁명 영웅 중 한 사람인 펑더화이(彭德懷)등 권력 실세들이 숙청당한 뒤 비운의 죽음을 당한 사례가 빈발했지만 이는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이뤄진 초법적 조치였다.

1989년 천안문사태를 전후한 시기, 자오쯔양(趙紫陽)과 후야오방(胡耀邦) 당 총서기가 잇달아 실각한 뒤 연금생활을 했지만 이 역시 사법조치는 아니었다. 만약 저우융캉이 처벌받게 된다면 중국은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셈이 된다. 그 경우의 후폭풍은 보시라이 사건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일 수 있다. 저우융캉의 거취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저우융캉을 거론할 때 늘 따라다니는 용어가 ‘석유방(石油幇)’이다. 이는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독특한 정경유착 고리의 하나다. 석유업계는 물론 전력·통신·금융업 등은 거대 국유기업이 시장을 지배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권을 독점 혹은 과점하는 정치파벌이 형성되어있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센 파벌이 석유방이다. 그 원천은 압도적인 자금력에 있다. 110여 개에 이르는 국유기업 가운데 순이익 상위 3개 업체는 모두 석유업종이 차지한다. 중국석유(CNPC)와 중국석유화학공업(시노펙), 중국해양석유(CNOCC) 등 이들 3개 업체는 2010년 국유기업이 납부한 법인세 총액 1조4840억 위안의 48%를 냈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CNPC의 2012년 매출액은 4086억 달러로 세계 5위의 거대 기업이다. 그러니 석유방이 얼마나 큰 이권을 누릴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홍콩 언론이 스위스 은행 등을 통해 석유방으로 넘어간다고 보도한 뇌물액수는 우리 돈으로 수조 원 규모다. 이런 자금력을 바탕으로 석유방은 장쩌민(江澤民) 주석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상무위원을 배출해왔다. 장쩌민 시절의 쩡칭홍(曾慶紅), 후진타오(胡錦濤) 시절의 저우융캉, 그리고 현 시진핑 집권기의 장가오리(張高麗)가 석유방 출신이다.

저우융캉은 정계 입문 이전부터 석유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현장 발탁형 인물이다. 출신대학부터가 중국석유학원이다. 그는 다칭(大慶), 랴오허(遼河), 성리(勝利) 등 중국 3대 유전에서 모두 간부직을 경험한 뒤 중국석유 사장, 석유공업부 부부장을 거쳐 국토자원부장, 쓰촨성 서기를 지냈다. 그의 사돈, 즉 저우빈의 장인은 다칭 유전 발견의 공신이라 불리는 지질학자 황지칭(黃汲淸)이다.

출세가도를 달린 저우융캉은 후진타오 시절에는 석유업계와 상관없는 공안부장을 거쳐 당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발탁됐다. 정법위는 경찰·검찰·사법 분야를 모두 관장하는 권력기구다. 당이 사법부까지 지도하는 중국 특유의 시스템은 정법위를 통해 작동된다. 중국에서 이뤄지는 재판의 판결문은 법관이 아니라 공산당이 쓴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저우융캉은 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는 것과 함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여기까진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변이 감지된 것은 그 해 12월 저우융캉의 측근이었던 리춘청(李春城) 쓰촨성 부서기가 쌍규(雙規) 처분을 받으면서부터다. 쌍규란 당원자격을 박탈하고 모든 직책에서 면직시키는 공산당 기율위원회의 결정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이후엔 정부의 공안당국에 의해 사법처리 수순을 밟게 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년 4개월의 기간 동안 구속됐거나 조사를 받고 있는 저우융캉의 측근 인맥은 중국 매체에 대서특필 된 사람만 해도 어림잡아 20명이 넘는다. 장관급인 장제민(蔣潔敏)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주임, 궈융상(郭永祥) 쓰촨성 부성장 등 석유업계에서 일하던 시절부터의 측근을 시작으로, 쓰촨성 인맥과 공안계통 인맥 등 저우융캉이 몸담았던 모든 조직으로 조사대상이 확대됐다.

급기야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아들 저우빈과 친동생 저우위안칭 부부까지 당국에 구금되는 신세가 됐다. 또 다른 동생 저우위안싱(周元興)은 자택 압수수색을 당한 끝에 지병이 악화돼 2월 숨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저우융캉 본인을 제외하곤 모든 측근과 지인들이 처벌을 받았거나 조사를 받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2월 한 노인급식시설에서 식판에 밥을 담아 전달하고 있다. 시 주석이 친서민 행보로 권력 기반을 밑바닥부터 다져가고 있다.



반부패 전쟁 명분삼아 권력투쟁 본격화

저우융캉은 중국의 국경절인 지난해 10월 1일, 자신의 모교인 석유학원을 방문한 것을 마지막으로 일체 그의 동선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그가 마땅히 참석했어야 할 탕커(唐克) 전 석유공업부장의 장례에 불참한 사실이 공개된 이후엔 이미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전례에 따른다면 은퇴 후에도 당 원로로서, 또 석유방의 대표로서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누리고 있어야 할 저우융캉이 이처럼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보시라이와 관계 때문이란 게 정설이다. 2012년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영국인 사업가를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고, 이 사건을 처리하던 보시라이의 측근 왕뤼쥔(王立軍)이 미국 총영사관에 진입해 망명을 요청한 일로 보시라이가 실각 위기에 처했을 때, 정법위 서기이던 저우융캉이 끝까지 그를 비호했다는 것이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와 함께 범 장쩌민 인맥이며 정치적 입장도 함께 보수파로 분류된다. 더 나아가 저우빈의 사업을 통해 보시라이와 수백억 위안대의 이권관계로 얽혀 있다는 설도 있다.

국유기업 개혁이란 중국 사회의 절체절명의 목표를 이루기위해선 석유방을 치지 않고선 안 된다는 관점에서 저우융캉의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예측도 있다. 국유기업 개혁이 어제오늘의 과제는 아니지만, 그동안은 공산당내 보수 기득권 세력과 국유기업이 이권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로 인해 번번이 개혁이 좌절되어온 게 사실이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중반부터 국유기업의 특권을 남김없이 없애겠다며 개혁을 각별히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시진핑 주석의 강력한 권력 드라이브와도 관련이 있다. 태자당 출신이기는 하지만 당내에서의 기반이 그리 강하지 않은 시진핑 주석은 ‘부패와의 전쟁’을 무기로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당내 권력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마오쩌둥의 시대에는 이데올로기로, 덩샤오핑의 시대에는 개혁개방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한때의 권력자가 하루아침에 권력에서 밀려났고 밀어낸 사람은 그만큼 더 커진 권력을 다지고 누릴 수 있었다.

시진핑 주석은 공산당 1인자로 선출된 직후부터 “호랑이와 파리를 다 때려잡겠다”고 강조해왔다. 고위급이든 하위급이든 직위를 가리지 않고 부패와의 전쟁을 펼쳐나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실제로 그는 많은 파리를 잡고, 적지 않은 수의 새끼 호랑이도 잡았다. 3월초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의 보고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동안 뇌물 등 부패로 적발된 공무원은 5만1306명이었다. 이는 2012년에 비해 8.4% 늘어난 수치다.

통계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이 대중에게 파고드는 방식이다. 사치 배격 운동과 뇌물성 선물 추방, 엄정한 공금 집행 등 공직자 기강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함께 반부패 투쟁이 이뤄지고 있어 대중이 이를 체감하는 정도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도자들은 늘 부패를 추방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효과를 거둔 적이 없어 중국 국민들은 그런 다짐에 늘 반신반의해 왔던 게 사실이다. 공직자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의식도 뿌리깊다.

시진핑 주석은 한편으론 공직사회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반부패 캠페인을 벌이면서, 한편으론 만두가게에서 직접 음식을 사먹고 비좁은 서민 주택가의 뒷골목을 방문하는 등 친서민 행보로 인기를 높여가고 있다. 그가 내세우는 소위 ‘군중노선’을 실천하면서 권력 기반을 밑바닥에서부터 다지고 있는 것이다.

‘석유방’ 다음 타깃은 ‘군부’란 전망 나와

집권 2년째에 접어들면서 시 주석의 정치스타일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집권초기 시‘ 리(習李)체제’란 말이 나올 정도로 리커창(李克强)총리와 권한과 역할을 적절히 나눠 가질 것이란 예상이 유력했으나, 지금은 리커창 총리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권력은 날이 갈수록 시진핑 주석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는 형세다.

리커창 총리가 3월 8일 전인대 개막식 당일 업무보고 연설에서 “시진핑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의 올바른 지도”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 현재의 권력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외신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 시대에 보던 공포정치의 재현이 우려된다”거나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자리를 잡아온 중국의 집단지도체제의 장점이 시진핑 시대에 들어와서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파리도 잡고 새끼 호랑이도 잡은 시진핑 주석에게 이제 남은 건 큰 호랑이(大虎)를 잡는 일이다. 그 사냥감이 저우융캉 상무위원이란 사실은 이미 명백해졌다. 사방에 그물을 치고 포수를 배치하며 포위망을 배치한 시진핑 주석으로선 이미 물러서기 힘든 상황이다. 석유방을 잡고 나면 다음 차례는 군부란 전망도 나온 지 오래다. 자칫 중도에서 타협하게 될 경우엔 시 주석에게도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요컨대 시진핑 주석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형국이다. 한 번 올라탄 이상은 내려 올 수 없다. 그냥 내려왔다간 자신이 다치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호랑이 사냥을 숨죽여가며 지켜보는 이유다.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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