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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포엠] 나는 자유다 

 

박형준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회현지하상가 중고 LP 가게’ / 사진:박종근 에디터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공기가 탁한 지하상가로 들어선다.
비 냄새에 뒤섞인 비늘 냄새, 천장까지 쌓아올려 벽을 덮고 있는 LP들,
아무것도 없이 떠나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레코드 판 위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침묵이 윙윙거린다.
“나는 두렵지 않다” 소리가 울려퍼진다.
흥겨움에서 솟아오르는 드럼 비트,
소리의 방울 하나하나가 파문을 일으키고,
시간의 제단 위에 놓인 커다란 돌에
물방울이 떨어지며 동그란 파문의 흔적을 남겨놓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LP판에서
음악이 단조로 바뀌며 부드럽게 속삭인다. “나는 자유다”

잊혀진 이름을 추적하는 손가락,
과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이 그 모습을 바꾸더라도
여기 이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있다.
지하상가 밖에는 비가 내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꾸준한 리듬.
내 영혼은 두려움 없이
바늘 밑에서 레코드처럼 돌아가고 지문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를 변주하여 시를 구성함.

※ 박형준-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창비, 1997),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 2002), [춤](창비, 2005),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 [불탄 집](시작, 2013),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 2020)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상, 육사시문학상, 풀꽃문학상 대숲상 등을 수상했다.

202410호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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