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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베스프렘 - 천년 흔적 깃든 ‘왕비의 도시’ 

 

베스프렘(헝가리) = 글·사진 서영진 여행칼럼니스트
베스프렘(Veszprem)은 헝가리인들이 추앙하는 천년고도다. 헝가리 초대 왕비가 살았고, 왕비들의 즉위식이 열리던 고즈넉한 ‘왕비의 도시’다. 언덕 위로 이어지는 성곽 돌길을 따라 걸으면 세월을 거스른 사연들이 ‘달그락’ 거리며 귓전에서 맴돈다.

▎베스프렘의 상징인 이스트반 왕과 기젤라 왕비의 동상. 붉은 지붕의 탐스러운 골목이 성채 아래로 펼쳐진다.
베스프렘은 아침이 좋다. 왕비의 호흡이 담긴 성채 언덕을 오르는 길은 가슴 설렌다.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숲속 놀이터에는 꼬마들이 뛰노는 정겨운 모습이다. 소담스런 일상의 계단 끝자락에 왕비의 성곽은 웅크리고 있다.

지난밤 몸을 기댔던 호텔 명칭이 ‘기젤라’다. 헝가리 초대 왕비의 이름을 빌린 숙소다. 별빛 아래 어슴푸레 보였던 거대한 형체는 기젤라 왕비가 거닐던 성곽이었고, 왕과 왕비의 동상이 내려다보는 절벽 낮은 곳에 무지한 세인들은 몸을 뉘였다.

중세의 온기 깃든 성곽 골목길


▎1. 발라톤 호숫가에 위치한 티허니 성당. 호수를 따라 따사로운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 2. 헝가리 주민들이 바다로 섬기는 발라톤 호수.
베스프렘은 9세기경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중세도시다. 헝가리 초대 국왕인 이스트반과 기젤라 왕비가 헝가리 통치를 시작할 무렵 터를 닦았던 곳이다.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베스프렘 주의 주도지만 도시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건국을 위한 시린 과거와는 달리 고요하고 아늑하다.

베스프렘 여행의 백미는 돌계단을 올라 성채 거리를 홀로 서성거리는 것이다. 시청 앞 오바로쥬 광장을 지나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화재 감시탑을 지나면 좌우로 도열한 성채 골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세의 온기가 서려 있는 성곽의 담벽은 과거의 환영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절벽 감옥 옆에는 현대미술관이 들어서 있으며, 주교의 궁으로 사용되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내부 인테리어는 이탈리아 아티스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왕비의 즉위식이 열렸던 세인트 미카엘 성당은 고딕과 네오로만 형식이 덧씌워진 모습이다.

성채 골목길 끝자락에는 이곳 도시의 상징인 이스트반 왕과 기젤라 왕비의 동상이 서 있다. 사후 9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동상에서 내려다보는 베스프렘의 풍경은 탐스럽다. 붉은 지붕의 마을과 교회첨탑, 베네딕트 언덕이 어우러진 모습은 유럽 여느 도시들처럼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멋을 전한다.

베스프렘의 성채는 인근에 조성된 숲길로 호젓함을 더한다. 성곽 주변으로 시냇물과 숲이 어우러진 ‘새드 밸리’가 이어져 있다.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예쁜 카페들이 문을 열고, 성채를 바라보며 하룻밤 청할 수 있는 숙소들이 불을 밝힌다. 아침에 눈을 떠 냇물과 새소리를 들으며 숲길과 마을을 지나 성곽을 오르는 일. 천년고도의 진한 감동은 이런 소소한 일상이 어우러지면서 완성된다.

발라톤 호수에 기댄 탐스러운 마을들


▎1. 왕비의 즉위식이 열리던 세인트 미카엘 성당 입구. / 2. 세계 3대 도자기로 명성 높은 헤렌드 자기.
매년 봄, 베스프렘에서는 왕비를 추억하며 ‘기젤라 왕비의 축제’가 성대하게 펼쳐진다. 13세기 이후 베스프렘의 주교만이 왕비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것 역시 관례로 굳어졌다. 베스프렘은 댄스, 음악, 무용 페스티벌 등 계절별로 축제가 열리는 헝가리 문화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그 페스티벌에 귀가 솔깃해지는 데는 도시 자체가 풍겨내는 분위기가 큰 몫을 한다.


베스프렘을 시작으로 헝가리는 이방인들에게 빗장을 연다. 베스프렘 주는 발라톤 호수에 기댄 축복받은 땅이다. 내륙으로만 둘러싸인 헝가리 사람들은 발라톤 호수를 바다로 섬기며 살아간다. 그중 호숫가 반도에 위치한 티허니는 언덕 위 성당과 함께 호수를 조망하는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 언덕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와인 한잔을 기울이거나,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며 매콤한 헝가리 파프리카를 구입하는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

발라톤 호수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티폴처, 헤렌드 등 개성 넘치는 도시들이 이어진다. 티폴처는 2000년 세월을 간직한 고풍스러운 도심 사이를 흐르는 수로가 잔잔한 분위기를 더하는 곳이다. 세계 3대 도자기 산지인 헤렌드에서는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도자기 공정을 엿볼 수 있으며, 자기에 담긴 식사와 커피로 그윽한 오후 한때를 보낼 수 있다.

헝가리인들은 ‘바린카’라는 독주와 ‘토카이’라는 달콤한 와인을 함께 즐겨 마신다. 슬픔과 기쁨을 승화시킨 헝가리 무곡의 춤사위도 극과 극의 다른 감정을 전해준다. 해묵었던 편견을 한 꺼풀 벗어내면, 오랜 유적과 서민들의 일상이 어우러진 낯선 마을들은 친근한 감동으로 다가선다.

- 베스프렘(헝가리) = 글·사진 서영진 여행칼럼니스트

201505호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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